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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를 읽고
1876년 '작가 일기'에 실린 이 짧은 소설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담고 있다. '뭐라고?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이라고?!',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늘 광인의 변주곡 연주하길 즐기며,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심오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내는 그에게서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이나 냉철함이 아닌 햇살 같은 따스함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건 도스토옙스키를 절반도 모르기 때문에 넘겨 짚은 성급하고 경솔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외과의사의 메스이기만 했다면, 그가 아무리 러시아 대문호라 하더라도 결코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알려지진 않았을 거라고.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어두운 민낯을 해부하기만 한 게 아니다. 구원도 이야기한다. 진창과도 같은 참혹한 현실에 따스한 햇살 같은 구원의 빛을 비춘다. 이러한 면모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도드라지는데, 그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라는 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꿋꿋이 작가이길 고집해왔다는 점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을 남기고 있던, 그가 타계하기 5년 전에 발표된, 그의 철학과 신학이 무르익은 시기에 탄생한 소설이다.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지 않을까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둘째 아들 이반은 무신론을 대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가 무신론의 근거로 들고 있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인데, 어른들의 죄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고 죽임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기독교는 철저히 무능할 뿐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끔찍한 현실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면서 기독교가 구원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을 묵인한 천국 따윈 거부하겠다는 게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장이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이 대목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한다. 기독교인인 나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든지, 우린 하나님의 일부만 알뿐 다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내세워 설명하는 궁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기독교는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즉각적인' 답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탄이 사십 일 금식한 예수를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요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반이 지어낸 대서사시 '대심문관'을 빛나게 만드는 대심문관의 치명적인 논리와도 결을 같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논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순수함을 고결한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급작사를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에서 알료샤와 함께 본격적인 등장인물이 될, 일류샤의 죽음이 남긴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열두 명의 소년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관찰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어린아이는 미래이자 희망이자 순수함이었고, 이는 예수가 어린아이를 대하는 자세와도 동일했던 듯하다.
이러한 시선이 이 짧은 작품 속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품 속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헐벗은 홈리스다. 술과 폭력과 음란에 사로잡힌 더러운 어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강제로 추운 겨울날에도 여름옷처럼 얇은 옷만을 걸친 채 밖에서 구걸이나 좀도둑질을 하도록 희생당하고 있는 불쌍한 생명이다. 이 아이를 묘사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과 생각을 짐작해보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태어난 게 죄라도 된단 말인가,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생명이 저토록 유린당하는 현실에 과연 희망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는 등등의 의문을 저절로 품게 된다.
결국 이 아이는 동사하고 만다. 죽어서 천사가 되어 꿈을 꾸게 되는 장면이 제목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가 뜻하는 바다.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들은 모두 주인공처럼 그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떠돌다가 객사하거나 동사한 생명들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크리스마스에도 선물이 주렁주렁 달린 트리가 놓인 따뜻한 집안이 아닌 지독히 추운 바깥에서 그 집안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고 슬퍼하다가 육체적 한계에 다다라 생을 마감하게 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현실을 묘사한 부분은 아래에 옮겨본다.
"어떤 아이들은 뻬쩨르부르그의 관리들이 현관 계단에 내버린 광주리 속에서 얼어 죽었고, 어떤 아이들은 형편없는 영아원에서 굶어 죽었으며, 어떤 아이들은 사마라의 기근 때에 자기 엄마의 말라붙은 젖에 매달려 죽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3등 열차 칸의 악취에 질식해서 죽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참혹한 현실을 르포르타주처럼 보고하고 끝내지 않는다.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를 찾는다.
"이들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천사들로서 예수님 곁에 있으며, 아이 또한 이들 가운데 하나로 있으면서 이들과 이들의 죄 많은 엄마들을 축복하며 팔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엄마들 또한 한쪽에 비켜서서 울고 있다. 모든 엄마들이 자신의 아들 딸들을 알아보고 이들에게로 날아와서 입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여기는 좋은 곳이니 이제 울지 말라고 달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참혹한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천국의 단면을 살짝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기독교가 할 수 있는 담백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즉각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이 대답이 가소롭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이반 카마라조프의 말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붕괴되고 마는 그의 말로를 말이다. 또한 이반 역시 스스로가 기독교에게 원했던 ‘즉각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참혹한 현실은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면의 근원적인 문제를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바로 이 문제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답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이 동반되는 참혹한 현실의 문제는 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육신의 빵은 곧 배고픈 상태를 유도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처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 곧 그리스도 예수다. 인간에겐 ‘즉각적인’ 답이 아닌 ‘궁극적인’ 답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일시적인 반면 후자는 영원하다. 물론 후자는 전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의 근원을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도 명징하게 간파했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결국 신의 존재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그 어느 작가보다도 인간을 잘 이해한 결정적인 증거라 생각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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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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