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모시고 쑥을 캐러 갔다.
배넷골에 5월이면 산딸기를 사러 가는데, 가죽잎이 나왔나 보기도 할 겸 물금을 지나 언양쪽으로 넘어갔다.
물금을 넘어서는 순간, 낙동강 유역에 그 많던 채소밭과 모래감자 밭이 모두 다 파헤쳐져 사라지고 없었다.
신문에서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진 사진을 보기는 했지만, 자주 지나다니면서 보던 풍경을 이렇게 순식간에 삭막하게 바꾸어 놓은 것을 만나는 것은 충격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이 어디까지일까.
법정 스님 다비식이 시작될 때, 이미 혼은 떠나고 없을 스님의 죽은 몸에도
" 불 들어 갑니다." 외치며 불을 당겼는데 어쩌자고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강에게 이런 고함의 소리조차 없이 황폐한 시신을 만들어버리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효과"가 산 목숨을 불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그 산 목숨을 태워서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비가 많이 내리고 어둡던 봄,
비가 그치자 이틀만에 벚꽃이 만개해서 온세상을 하얗게 아름답게 나부끼게 한다.
스님 법문에, 내가 다 하지 못한 말은 피어나는 꽃에게서 들으라던 말씀이 생각난다.
꽃에게서 듣는 법문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삶을 꾸려가는 우리의 무지가 빚어내는 하루하루의 촌극을 보고 있자면 우리의 무지와 어두움이 태산처럼 무겁다.
물 속에 자식을 묻어 두고, 죽음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일상을 꾸려가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봄은 찬란하게 꽃으로 제 몸을 열어보이는데
우리는 무엇이 그리 가릴 것이 많아서, 알맹이 없는 뉴스를 보고 또 보고
사람이 간섭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잘 흘러흘러 우리를 먹여살리던 강과 산하를
천안함처럼 이렇게 댕강 잘라내어야 하는 것이지
경제에도 거시적인 문화에도 문외한인 나는 정말 모르겠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외치던 소리만 쟁쟁하게 가슴에 남아
불 들어갑니다 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수장되고 잘라진 무수한 죽음들이 슬프고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