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엿보다자기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분명히 알수록지금 있는 현실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ㅡ스피노자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봐야한다.이 책의 제목은 "나를 엿보다"이다.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아니라들춰보고 두고보며 나의 숨은 욕망까지도살피는 섬세한 시도다.이 책은 "정신분석 에세이"다.차에서 출발해, 가족, 사회 전반의 이야기들을정신분석학의 차원에서 풀어낸다.누구나 고민할 법한 주제이기에 공감을 얻으면서도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삶의 문제들을 진단하는 저자의 시각은 온기가 느껴지면서도 따뜻하다.특히 일상사들이 정신분석의 주요개념으로 설명되며 에세이로 시작해 정신분석으로 끝나는 구성은 지적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정서적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정신분석의 대해 관심을 갖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읽은 적이 있지만 학문과 현실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부족함이 이 책을 통해 해소되었다. 또한 저자가 심도있게 연구한 마르셀 프루스트가 간혹 인용되는데 그의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문장이 저자가 제시한 개념과 맥락 안에서는 더욱 선명해기지도 했다.“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행복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매일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주변을 살필 때 행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보다 잘 살필 수 있게 해주는 돋보기가 필요하고 졸보기도 필요하다. 바로 심리학이 유행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에 나의 작지만 큰 소망을 펼쳐놓고자 한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던 개인과 타자, 사회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독자들의 가슴속 연못에 조그만 조약돌을 던져본다.” - 저자의 말 중에서
ㅇ충과 관종의 시대, 카프카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어느날 아침 갑자기 벌레가 된 남자의 이야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누구나 떠올릴 것이다. 변신이라고 하면 슈퍼히어로나 신데렐라처럼 근사하고 화려한 변신을 기대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변신의 여정에서 제자리로 돌아와 안도하며 교훈을 남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가장 끔찍한 벌레로 변해 아무 이유도 모른채 서서히 존재의 종말로 향할 뿐이다. 가족들은 그의 비극 앞에서 불안과 불편을 느끼고 그를 멸시한다. 누구도 그의 부조리한 변신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위한 자기보존의 욕구에 충실할 뿐이다. 문학적 완충장치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누구나 벌레가 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사실적이라는 표현은 유효하다. 시선은 냉정한 선을 긋고 대상을 추락하게 한다. 우리 시대의 잔인한 호명, 즉 벌레는 부르는 방식은 익숙하다. 맘충, 급식충, 이백충.....ㅇㅇ충은 어디에나 있다. 언제든 벌레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벌레가 되고도 모르는 그들 그리고 나. 변신의 첫문장에 '그레고르잠자'대신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표제작인 <단식 광대>는 단식을 보여주며 존재를 확인하려는 광대의 욕망과 타인의 기이한불행을 지켜보는 욕망의 접점, 그리고 그 이후의 엇갈림의 비극을 보여준다. 광대의 단식은 존재의 이유면서 결국에는 제거의 이유가 된다. 단식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돈이 그의 단식 행위에 가치를 결정한다. 그는 관심이 사라지고도 단식을 이어간다. 단식은 결국 생명을 위협하고 죽음이라는 결말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단식 광대는 단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한다. 어쩌면 그를 관심종자라고 폄하할 수 있지만 결곡한 태도는 타인의 관심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 그렇다고 그를 예정된 실패 앞에서 용감하게 고군분투하는 투사로 이해할 수도 없다...<변신>과 <단식광대>를 비롯한 프란츠 카프카의 중, 단편들은 부조리한 실존을 대면하게 한다. 분명히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앞에서 주인공은 가혹하다거나 혹은 비참하다는 감정적 호소조차 하지 않는다. 실존에 대한 의지적 선언도 아니다. 기이한 상황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 존재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질문할 수 있으나 결국 카프카의 시선은 현실을 관통한다. 벌레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비극의 관음증을 관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익숙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시절과기분김봉곤..세상의 모든 것들 중 어느것이든 소설의 소재로 포획하는 것이 소설가의 숙명일까. 이야기를 만드는 자리에서 전지적 창조자로 군림하는 것에 이의는 없다. 작가가가 창조한 세계에 독자가 초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했던 이와의 일을 글로서 소설가가 되었다는 그는 소설 세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어떤 부담과 그리움의 고백이 전해지는 지점은 윤리적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생생한 묘사와 자기고백적 분위기에 과연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가늠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엔드게임>은 여타의 작품들처럼 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연애사는 가볍게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의 깊은 곳까지 침잠하게 한다. 사랑은 과거이고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그의 글로 복원되다가도 어느 순간 사그라든다. 과거에 그의 작품들을 보면 독자로서 속고있는 기분도 들었다. 대체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작품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었다. 소설이 될 수 없다면 시간 속에서 기억하려는 시도는 윤리적이다. 나는 작가의 마음을 온전히 지지하고 싶다. 사랑의 절절한 기억을 문학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성큼 들어온 사랑 앞에 그에 걸맞는 응대로 윤리적인 태도를 어떤 인연도 없이 보여주는 것. 나는 그의 소설을 이렇게 읽었다...이전에 읽은 <시절과 기분>이 곧 단행본으로 만날 수 있다니 기쁘다.
어둠의눈라스베이거스의 쇼제작자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듯 하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우울과 불안을 겪는 티나 에번스. 티나는 일이 몰두에 성공을 이루지만 혼자라는 공허감이 이어진다. 일상에 찾아온 공포는 점차 그녀를 뒤흔든다.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는아들 대니를 연상하게 한다. 끔직한 사고로 시신을 확인하지 못한 그녀는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대면했어야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일로 만난 엘리엇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사건은 급속도를 낸다...딘쿤즈의 장편소설 어둠의 눈은 40년전의 작품으로 최근 코로나19를 연상하게 하는 사건을 통해 주목받고 있다. "물질은 우한 외곽에 있는 DNA 재조합 연구소에서 개발되어 ‘우한-400’이라는 이름이 붙었소. 그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인공 미생물 중 400번째로 개발된, 독자 생존이 가능한 종이었기 때문이오. (p.435)" 이 대목을 보면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한 예언처럼 긴장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더라도 소설로서의 사건을 장악하는 작가의 필력에 놀라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소설의 장르를 특정할 수 없다. 미스터리, 스릴러, 로맨스 등 속도감있는 전개에 푹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예상 불가능한 스펙트럼을 펼쳐지며 어느순간도 소설의 재미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미쳤나 봐요. 이제부터 위험한 일에 뛰어들 텐데. 우글거리는 악당들과 맞서야 하고, 이 산속 어디를 걷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요?”“더는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기분이 좋은 거겠죠. 도망은커녕 오히려 공격을 펼치게 될 테니.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편이 사람의 자존감을 살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p.381)..엄청난 절망과 상실 속에서도 아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으로 초현실적 상황을 감지하고 용감하게 사건과 정면으로 돌파하는 그녀의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이 감탄할만하다. 다만 이런 미스터리 장편소설을 읽은 경험이 많지 않지만 소설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긴 분량이 충분히 소화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