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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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ZI & CON

무지

호기심이 많고 장난기 가득한 무지의 정체는

사실 토끼옷을 입은 단무지.

토끼옷을 벗으면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콘은 가장 미스터리한 캐릭터.

알고 보면 무지를 키운 능력자로 묵묵히 무지의 뒤를 지켜준다.

 

요즘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가장 핫한 책.

바로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에세이다.

이번 책의 주인공은 귀여운 무지와 아는 사람만 안다는 콘의 이야기.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는 13만 팔로워를 보유한 작가, 투에고와 함께한다.

나는 알고 있었다.

무지가 바로 '단무지'라는 사실을.

얼핏보면 계란이나 토끼인줄 알겠지만 나는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읽으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파헤쳐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악어(?) 콘.

마치 뽀로로에겐 크롱이라는 악어 친구가 있듯이 (펫이 아니다. 크롱은 아직 성장 중이라 말을 못할 뿐 분명 친구 또는 동생이다)

무지에겐 든든한 친구, 콘이 함께 있다.

표지부터 느껴지지만 일단 책을 한 장만 펴도 느껴지는 이 무지무지한 귀여움.

무지의 익살스러운 얼굴과 빵빵터지는 제스쳐,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위로해주고 싶고 위로받는 이 그림과 글들을 보다보니

내가 카톡에서 쓰는 이 캐릭터들은 더이상 전에 알던 캐릭터가 아니다.

무지의 밝은 얼굴 뒤로 이렇게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숨어 있었다니.

그리고 콘의 한결같은 모습 속엔 얼마나 강한 내공과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무지 궁금해지는 책.

 

 

 

-어떻게든 되겠지

난데없이 슬럼프에 빠졌어.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일들이 하나둘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멈춰버린 거야. 글도 안 써져, 일도 잘 안돼, 심지어 몸까지 아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내 발목을 더 세게 붙들고 늘어졌어. 나에 대한 잣대가 엄격하다보니 하는 일에서도 자꾸 모자란 점만 보였어. 가시덤불 안에서 양날검을 쥐고 서 있는 모양새였지. 앞을 가로막ㄴㄴ 나뭇가지들을 싹둑 베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내가 다칠 수도 있는 그런 상황 말이야.

슬럼프라 생각한 순간부터 더 슬럼프에 빠졌던 것 같아. 내가 내 말로 스스로를 더 옭아매고 늪으로 빠뜨린 게 아닐까. 스페인어로 '케세라세라'라는 말이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뜻인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란ㄴ 말처럼 들려.

"케세라세라, 케세라세라, 케세라세라."

자신을 밀어붙이고 초조해지려고 할 때 이 말을 계속 떠올려.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천천히 케, 세라, 세라, 케, 세라, 세라. 입안에서 단어를 굴리다 보면 혼자서 저만치 달려 나가던 마음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는 것 같아.

 

 

 

 

헉, 무지야 콘아.

너도 그런 적이 있었니?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를 읽다보면 친근한 말투라 혼자 쓴 일기를 몰래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가 들려주는 카톡 메시지같기도 하고 편지같기도 하고 그렇다.

케세라세라.

내가 좋아하는 말.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Whatever Will Be Will Be (Que Sera Sera) - Doris Day.

잔잔한 재즈풍의 노래를 듣다보면 나른하고 편안한 기분과 함께 모든 자연스러운 쪽으로 흘러가는 기분이 든다.

어떨 땐 내려놓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때가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되어있고, 기억은 미화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그게 가장 베스트인걸.

모든 경험과 내공은 이런 마인드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무지와 콘의 귀여운 응원에 나도 한번 더 케세라세라.

 

 

 

 

-부정적인 감정을

이겨내는 게 뭔 줄 아니?

억지로 품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도, 우울도 끌어안는 용기야.

내가 모든 날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강해지는 거지.

-구름 너머를 보다

-어릴 때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니 구름도 하늘 밑에 있더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가진 불안과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한 때, 그리고 지금도 많이 읽어서 이제는 스테디셀러가 된 인문학, 심리학 책이 있다.

바로 <미움 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두 저자가 아들러 심리학을 통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들려주는 내용은 그 시대를 강타한 '힐링'이라는 코드를 정확히 저격했다.

지쳐있는 사람에게는 힘내라는 말 조차 폭력적일 수 있다.

더더구나 때론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 우울한 사람에게 그 힘으로 살자는 말조차 나는 이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다 내맘같지 않다.

그런 그들 모두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해봤자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아픔 뿐.

더 잘 살기위해 우리는 힐링이라는 문화를 좀 더 진취적으로 "미움 받을 용기"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품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도, 우울도 끌어안는 용기야.'

이 글에서 나는 '억지로' 라는 말이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뭐든 자연스럽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만약 행복하고 싶다면 인생에서 100% 행복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성공하고 싶다면 인생이라는 길엔 백전백승만 있지 않다는 게임의 룰을 깨달아야 한다.

아마 이 글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구름이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처럼

어른이 되는 순간 순간들이 쌓여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불안도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그래, 근데 그 일이 별거 아닐지도 모르고 진짜 별거 일지도 모른다.

근데 중요한 건 내 마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내 정신과 영혼의 주인이라는 것.

우리가 온전히 살아가는 것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내 마음은 여러 개

"검정색과 하얀색 중 무엇을 선택할래?"

"회색."

"낮과 밤 중 언제가 좋니?"

"어스름한 새벽녙."

편협한 이분법은 너무 싫어.

선택지가 두 개뿐인 건 재미없잖아.

나는 차라리 다른 걸 고를래.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아무래도 우리 친구 무지와 콘은 분명 어른스러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나는 이걸 꽤 늦게 알았다.

질문에는, 삶에는 이분법을 따라도 되지 않는다는 걸.

두 가지를 물었을 때 사람들은 사고의 폭이 좁아지면서 그 두가지 중 선택하게 된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근데 나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핵심을 찌를 또다른 답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무지와 콘에게 알려주고 싶은 또 하나의 인생의 진리도 있다.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야하는 건 아니야."

살다보면 무례한 질문, 되도 않는 말, 가치 없는 이야기,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도 존재한다.

그럴 때 우리는 1안, 2안, 그리고 생각치 못한 3안을 넘어서 답하지 않는 답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기. 답하기. 그리고 답하지 않고 생각하기.

 

 

 

 

 

 

 

 

-너도 나도 무지해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전제하고 출발해보기로 했어.

그러면 다수가 손을 들었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지.

'우리'나 '모두'같은 말로 뭉뚱그려서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어.

지금까지 우리가 모든 걸 다 아는 듯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걸 알 수도 있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한 방법 같아 보여.

서로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않을 테니

토끼옷을 입고 다니는 걸

애써 숨기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캐릭터 '무지'의 이름과 시선으로 쓴 이 글이 참 공감됐다.

"너도 나도 무지해."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살다보니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울까 싶다.

서로의 입에서 꺼내기가 참 어렵다. 때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도 존재한다.

아무래도 어느정도 말로 먹고 사는 업을 하다보니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 고집이 센 사람, 소통이 안되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그와 다르게 아는 게 많지만 겸손한 사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 솔직하게 호감이 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단면만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A 상황에서는 전자가, B라는 모임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자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적어도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황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를 읽고 느낀 건 우뤼에게 가장 필요한 건 공감이라는 사실.

쑥쓰럽지만 나도 이제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일단 해결해주고 싶고 멋진 솔루션을 제시해주고 싶고 조언을 하고 싶어지니까.

내가 주변에도 많이 전파(?)하는 것 중 하나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순간만큼은 경청해서 듣기, 그리고 심판의 잣대로 듣지 않기,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감해주기다.

힘든 이야기를 전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래, 그랬구나" 한마디니까.

때론 가장 쉽지만 실 생활에서 꽤나 어려운 이 말.

오늘도 나는 내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의 힘을 많이 나누려 한다.

바로 이 책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가 나에겐 그랬다.

무지와 콘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소소하지 않은 큰 위안을 준다.

무지가 나에게 힘이 되어준 것처럼, 나도 이 세상에 많은 주변 무지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이 글은 아르테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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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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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는 악동뮤지션의 찬혁이 쓴 첫번째 소설으로, 이번 앨범 <항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됐다.

처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자유분방한 두 남매가 오늘도 라면이냐고 외치는 그 자작곡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간단한 멜로디에 아름다운 음색.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공감가는 가사들까지.

그 뒤로 악뮤 팬이 되어 꼭 챙겨듣게 되었다.

오랜만에 완전체가 되어 돌아온 악동뮤지션.

이 책 <물 만난 물고기>는 주인공이 살랑살랑 들려주는 아름답고 심오한 연작 이야기이다.

어떤 생각과 어떤 감성을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지, 아티스트의 철학을 알 수 있었던 책.

마냥 장난끼 많고 음악 잘 만드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런 섬세하고 섬세하고 또 섬세한 감성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동화같고 소설같고 일기같고 노래같은 책.

 

 

 

항해

-선홍빛 구름으로 물든 가을 하늘의 절경.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관객이 저 구름들이다. 하루의 끝에서 과연 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세상에 빛을 내리쬐는 준엄하고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누구보다 지친 기색을 하고 있을까, 그것의 퇴근길 뒤로는 거대한 그림자만이 고독의 안쓰러움을 알아주듯 한 발치 멀리서 새까만 이불을 들고 따라갔다.

-"나는 음악이 없으면 바다로 나갈 거야."

그녀는 의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심술이 나서 말했다.

"왜 하필 바다야?"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거든."

입을 꾹 다물고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를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 "나는 음악을 사랑해. 하지만 이제는 이 바다 소리만큼 음악 같은 것도 없는걸."

... "전에 이런 장소를 혼자 지나쳤을 때는 단지 어둡고 조용한 곳이라고만 생각했어. 지금 이 바람 소리를 들어봐. 난 너를 만나고 모든 게 음악이야."

항해

-"그건 바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야."

..."그들은 예술가 사이에서도 진정한 예술가지. 자신이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이거든. 예술가인 척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못해."

...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건 손이 떨리도록 멋진 말이었다. 나는 그날 합주를 거기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순간에 나는 다짐했다. 수많은 거짓과 모방이 판치는 그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사이에서 '진짜'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예술가로서 음악을 할 것이라고.

맞다, 바다는 음악 같다. 음악이 바다같고.

고요한 바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들리지 않던 소리도 들리고 기억하지 못했던 추억도 떠오르고 이제 기억에 남게될 소중한 시간들도 생긴다.

어쩌면 제목 <물 만난 물고기>는 주인공 남녀인 '물고기들'일수도.

어떤 음악가가 진짜인지 어떤 노래가 좋은 노래인지 고민하는 부분.

책에도 고전이 있다면, 음악에도 고전이 있다.

클래식, 오페라, 판소리 같은 음악도 물론 좋지만 나는 옛날 흑백 영상이 나오는 시절의 음악도 참 좋아한다.

그리고 그 때 음악가는 진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수가 처음이라 한참 이슈가 됐었던 노래하는 음유시인 밥 딜런의 음악과 자서전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책이 출간되었는데 밥 딜런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책의 표지만 봐도 머릿 속에 울려퍼지는 밥 딜런의 음악과 기타 선율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이런 게 음악이 가진 힘이 아닐까.

진정한 예술은 모르지만 진정한 예술가가 들려주는 음악의 한 단편은 알 것 같다.

 

 

 

 

 

물 만난 물고기

-"너와 즐겁고 행복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내 꿈이 아주 조금 뒤로 미뤄졌을 뿐이야. 여전히 이 세상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나는 내가 동경했던 바다를 만나는 거야."

... 뭐라도 해야 했다. 그녀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선 그녀의 표정은 겉으론 다 이룬 듯이 평온해보였지만 만지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눈물이 담겨 있는 것도 같았다.

"다만 내 이름을 기억해줘."

..."난 여기서 작품이 될 거야."

그녀가 자유롭게 두 팔을 벌렸다.

-한바탕 휩슬고 간 폭풍의 잔해 속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파도

비치는 내 얼굴, 울렁이는 내 얼구

너는 바다가 되고 난 배가 되었네

-너는 꼭 살아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내이름을 기억해줘

음악을 잘했던

외로움을 좋아했던

바다의 한마디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항해

-갈대밭에 그림을 그리던 우리의 뜀박질. 너를 껴안고 넘어졌을 때 뿜어져 나오던 입김. 너를 업고 질주하던 횡단보도. 흑백 세상에서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했던 너의 눈동자. 세상 모든 것을 빠뜨려 담을 수 있을 만큼 깊은 너의 눈동자. 나보다 바다를 사랑했던 너. 그렇게 두 팔을 벌리고 바다로 돌아가던 마지막 순간.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색깔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기운이 뭐였는지 알아채자마자 감정이 벅차올랐다. 여러 색으로 펼쳐진 이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난 마땅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원'.

문 앞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띠링.

한동안 계속 듣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이 책 <물 만난 물고기>를 읽고 나면 악동뮤지션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는 더이상 전에 듣던 노래가 아니다.

귀에 들려오는 수현의 목소리는 선과 해야, 그리고 바다와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야가 선에게 바다와 만남, 사랑과 이별에 새로운 의미를 준 것처럼 이 책은 노래에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그래, 그렇게 살길.

*이 글은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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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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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할매가 돌아왔다>.

다산책방에서 새롭게 나온 개정판으로 할매가 돌아왔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건 책의 뒷 표지. 아마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조남주 작가님이 기대평을 써주었다.

현재 영화로도 개봉했지만 <82년생 김지영>을 흥미롭게 읽은터라 "<할매가 돌아왔다>는 시대를 너무 앞섰던 소설이다."라는 문장 하나 만으로도 기대되는 소설이었다.

우선 이야기는 주인공 제니 할머니가 한국의 가족들에게 돌아오면서 생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핏덩이같은 아이들을 두고 (주인공 동석이의 아버지와 고모) 떠나버린다.

그러나,

그런 할매가 돌아왔다.

그것도 무려 60억이라는 거금을 들고!

목차를 보면 나오지만, 할매의 누명(?)을 벗길 수 있을지, 진짜 누명인건지?

그리고 60억은 정말 있는건지? 그리고 누구에게 줄건지? 이 책을 끝까지 봐야하는 이유가 너무 많다.

<할매가 돌아왔다> 책은 다소 폭력적이다.

싸우고 죽이는 폭력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뿌리 깊은 가정폭력의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심어져있는 페미니스트 코드도 있어서 조남주 작가님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소설"이라는 의미가 더 크게 와닿았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으나 그래도 생각할 거리들을 준다.

이 시대의 모든 제니 할머니에게, 그리고 한국이라는 세상이 좁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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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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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였던 어른들이 전하는 '그날 거기' 그리고 '지금 여기'"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고작 20여분이지만 우리가 인터뷰하고 서로 이야기 나눈 시간은 장장 5시간 4분이었다. 사전 인터뷰까지 모두 합치면 8시간도 넘는다. 모두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값진 이야기들인데, 영상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으로 인해 확 줄여 편집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출간하며 제목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영상 제목인 <왕따였던 어른들>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왕따'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학교 폭력 문제를 피해자의 문제로 한정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지적에, 결국 출연자들과 상의 끝에 최종 제목을 '나의 가해자들에게'로 결정했다.

-이 책은 같은 아픔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가해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공감대였다.

어느 순간 유행어가 된 인싸.

다 알고 있겠지만 인사이더의 줄임말로 모임이나 관계에서 활발하고 친화적인 사람을 뜻한다.

'새학기 핵인싸 되기', '인싸들의 잇템', '인싸 인사법' 등 내로라하는 핫한 콘텐츠에는 바로 이 "인싸"가 꼭 들어간다.

모든 사람이 인싸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인싸인 것도 아닌데

마치 "인싸=성공한 사람" 이라는 인식을 만들고 있는 듯 하다.

이 불편함을 잠시 떠올리면서 이번에는 아싸를 들여다본다.

인싸의 반대말인 아웃사이더, 아싸.

주변을 맴돌며 비주류인 사람인데 다들 인싸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된 것 같다.

여기 인싸도 아니고 아싸도 아닌 사람들이 있다.

아니, 그랬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바로 왕따와 학교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터뷰를 모아 만든 살아있는 책이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읽으면서 느낀 건 시간이 지나도 시대가 바껴도 왕따문제는 계속 나온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동물, 곤충의 세계에서도 발생한다는데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최소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경계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 그리고 피해자들은 마음 놓고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상담이나 치료, 그리고 그들이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제 3의 안 이상의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참 많이 힘들었을 인터뷰이들과 설문 응답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잘 자라서 멋진 어른이 된 모습에도 큰 울림을 주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시작하는 말에도 있었지만 이 책은 학교처럼 좁은 (때론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같은 아픔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에게 꼭 읽어주고 싶다. 그리고 자기 얘기는 아닐거라 생각하고 있는 가해자들에게는 "그래, 맞아. 니 얘기야"라고 돌직구를 날리며 인생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교시 그때의 감정

-가연

왕따가 되면 진짜 무서운 게, 내가 나를 놓아버리는 게 다 합리화가 되는 거예요. '너는 챙길 가치도 없는 애야.' '그냥 이대로 있다가 먼지처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야.' '이유는 없어, 그냥 너니까.' 진짜 웃지도 못했어요. 학교생활하다 보면 반 전체가 빵 터지거나 하는 일 있잖아요. 저는 웃으면 "이빨 깐다"고 화장실에 끌려갔어요. "너 왜 이빨 까냐, 네가 왜 이빠 까냐고!" 그랬죠. 집에서 웃을 때도 반사적으로 엎드려서 끅끅거리며 웃는 게 습관이 됐어요.

-주연

그 나이 때는 웃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냥 친구들이랑 얘기하다가 웃고. 어느 날 집에서 <무한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웃긴 장면이 나와서 막 웃는데 호흡이 안 되는 거예요. 과호흡이 와서 병원에 실려 갔어요. 병원에서는 지금까지 웃은 적이 너무 없어서, (씁쓸하게 웃으며) 제 호흡이 웃는 호흡에 맞출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후에도 웃다가 갑자기 헉, 하고 호흡이 멈춰 쓰러진 적이 한두 번 정도 있었어요. 지금도 막 그렇게 크게 웃거나 하지는 못해요. 중학생이 웃지 못해 병원에 가다니, 참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중,고등학교 한창 크고 재밌는 일 많은 나이에 웃지를 못한다니. 사소한 웃음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니.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읽기 전에는 웃음이 얼마나 큰 특혜인지 몰랐다.

아니, 웃는다고 끌려가서 맞고 나중에 혼자 웃다가 과호흡으로 병원에 실려갈 수 있는 일인지 몰랐다.

그동안 웃어본 적이 너무 없어서 몸이 어떻게 웃는지를 몰라서 과호흡으로 병원에 가다니...

정말 여기 나온, 그리고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을 겪은 사람들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정말 악질인게 누군가에게는 착한 사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지옥보다 못하다.

아마 가해자들은 일부 싸이코패스들은 미안함 조차 느끼지 않고 여전히 그렇게 살거나, 조금이라도 미안함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땐 아직 어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기합리화하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학창 시절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고통이다.

그리고 가스라이팅이 진짜 무서운 것이 누군가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못나다고 말하면

낙인이 찍히고 본인도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닐까하며 여기 "가연"이라는 사람의 말처럼 나를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자기 중심을 잡는 일인 것 같다.

또 다시 해주고 싶은 말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학교다닐 때는 종종 매스컴에서 왕따문제를 마치 왕따의 잘못인 마냥 묘사했다.

TV나 영화에서 나온 왕따의 스테레오타입은 뺑뺑이 안경을 쓰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왜소한 몸집에 자신감 없는 태도로 어딘가 끌려가서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근데 이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읽어보고 자신이 겪은 집단들을 떠올려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왕따당할 만한 사람은 없고, 맞을 만한 사람은 없고,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는 절대 없다.

만약 아직도 왕따는 왕따당할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고쳐먹게 해야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또는 어딜가나 그렇고, 그런 일은 또 생길 수 있다고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폭력과 마찬가지인 동급이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견해를 이해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 세상 속에는 정당화할 수 없는 생각도 분명 존재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기를, 한 번이라도 틀릴 수 있다는 (다름이 아니고 틀림이다) 관점을 주기를 바란다.

 

 

 

 

 

3교시 가해자와 방관자

-주연

학원 선생님도 그랬고, 학교 선생님도 그랬고 "넌 대단한 사람이야, 넌 잘할 수 있어" 이런 말을 종종 해주셨던 분들이 계셨어요. 그럴 때마다 멀어졌던 자존감이 조금씩 높아지는 느낌, 정말 그게 너무 고마웠어요. 언젠가 상담 선생님하고 상담을 하다가 그분이 분노를 하셨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시고 울컥하시고. 근데 그게 제 고통에 대한 첫 공감이었거든요. '내 시간을 이렇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그게 너무너무 감사했고, 이렇게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줬던 거 같아요.

4교시 가족

-피디

그럼 혹시 지영 님은 그때 들었으면 좋았을 말이나 행동 같은 게 있었어요?

-지영

그냥 "많이 힘들지? 괜찮아" 같은 그런 격려의 말 한마디. "학교 생활 잘하고 있니?"처럼 다독여 주는. 조금이라도 나에게 관심 있어 보이는 그런 말 한마디였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성호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물론 자살 시도라는 게 하면 안되는 거고 죽었으면 끝이었겠지만, 저는 그 이후로 엄청 잘 살고 있어요. 내가 왕따당해서 신경 못 쓰던 것들을 다시 느끼게 해 줬어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저를 챙겨 줬던 사람들도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부모님도 챙기게 됐어요. 나는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그 대다수의 마음을 무시한 채 1명이 괴롭힌다고 내 목숨을 버리려던 게 어리석었다 싶고. 최대한 그렇게 안 살려고 하고 있어요.

방과 후

-희정

물론 제가 "왕따를 극복한 어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한없이 낮은 위치에 있었던 내게 심심한 위로를 건넬 용기는 생긴 것 같습니다.

"희정아, 과거에 왕따, 가정 폭력을 당했다고 해서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남은 인생을 피하자로 살지 않았으면 해. 약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남지 않아도 괜찮아. 굳이 정답을 찾아 살려고 하지 말고 지금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사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더딘 성장이지만 힘내. 그동안 충분히 잘해 왔어. 조금 불행한 과거가 있으면 어때.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불편한 경험이 생기면 어때. 지금처럼 좋은 친구들과 평생의 동반자, 널 응원해주는 모든 분들과 함께 맛있는 것들, 재밌는 것들, 좋은 것들 많이 누리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았으면 해. 한꺼번에 많은 변화를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아. 불행한 생각들 그만 내려놓고 자신에게만큼은 관대하고 긍정적이게 생각하자."

그동안 감추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나니 마음 한편이 후련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많은 위로를 받은 것 모두 감사합니다.

내가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읽고 이렇게 큰 위로를 받을 줄 몰랐다.

"이렇게 왕따당하면서 불쌍했던 사람들도 회복하고 잘 사는데 힘내자"하는 비교하고 남을 까내리는 힐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었을 힘듦, 그리고 시간이라는 힘으로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 가해자를 꿈에서라도 죽일 듯이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이젠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선택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느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를 읽기 전에는 몰랐다.

왜 그동안 왕따,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뉴스, 이야기는 많지만 그리고 나서 어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는 건지.

그 궁금증을 씨리얼이 풀어준 것 같다.

아마 평생의 상처로 남아있겠지만 그들은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잘 살아준 인터뷰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용기내서 그 때의 아픔을 살아있는 이야기로 들려줬다는 게 또 고마웠다.

각자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의미로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책이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선물이다.

*이 글은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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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심는 꽃
황선미 지음, 이보름 그림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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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기억하다"

-그다지 소통할 일이 없었던 대학 동기, 마지막 연락도 꽤 오래전이었는데 무슨 용건일까.

그가 물었다.

-맨 처음 데뷔할 때 그 원고, 책으로 나왔나?

나는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프로필마다 있잖아. <마음에 심는 꽃>.

나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작가로 산 시간이 스물하고도 네 해째다. 그동안 아무도 그 원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프로필 맨 앞에 적으면서도 나조차 굳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데뷔작이 분명하니 언급은 하지만 그것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수상작도 아니고 우수상. 내 시작은 그랬다. 주목받지 못하는 이등. 일등이 아니니 옆으로 비켜났고 책이 되기에도 어중간한 분량이라 그 작품은 제목으로만 남았다. 그런데 그걸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니.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워 가며 고친 원고가 대학 노트에 그대로 있었다. 시간을 먹은 종이가 누렇게 변했어도 흑연의 흔적은 선명해서 다만 뭔가를 쓴다는 것에 하루하루를 붙잡아 세우고 견뎌 냈던 서른 초반의 나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했다.

-다소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제목으르 바꾸려고 한 적이 없다. 초고를 완성하고 공모전에 보내고, 프로필에 데뷔작 제목으로 적을 때도 시골집을 벗어난 적이 없는 여자애 같은 젬족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것 말고는 달리 어울리는 제목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 작품은 스물하고도 네 해 전, 나의 시작 어떤 지점이다. 그런데 꽤 오래 걸어 온 나의 지금에 이것이 어떤 의미가 되려고 한다. 등을 구부려 손끝으로 발을 만지는 기분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황선미 작가님의 신간 <마음에 심는 꽃>이 나왔다.

신간인데 가장 오래된 책이다.

작가님의 초고작이자 프로필 데뷔작인 <마음에 심는 꽃>이 2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24년.

24년을 작가로 산 시간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그 기간이 꽤 무겁게 느껴지지만,

5년, 10년 훅훅 지나가는 시간을 보는 관점에서는 참 빠르게 달려오셨겠구나, 하는 여러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건 그동안 수 많은 일들과 경험이 쌓여서 지금의 황선미 작가님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다.

책의 문을 여는 '작가의 말'에서 다정하게 말해주었지만 다소 촌스러워도 따뜻한 감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힐링 그림책이다.

그 시대 옛날 감성의 느낌이 많이 묻어난다.

그런데 아마 지금이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쓰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황선미 작가님의 좋은 점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가 읽어도 좋다는 것.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읽어도 좋고 청소년이 읽어도 좋고 어른이어도 좋다.

시골 학교의 수현, 서울에서 올라온 민우네 가족이 그려내는 이야기.

<마음에 심는 꽃>을 읽으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감정의 한 부분을 탁! 하고 꺼내주는 기분이 많이 들었다.

작가님이 시작을 기억하며 초심을 깨내볼 때, 우리도 같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수현이는 꽃밭이 걱정되었습니다. 아직 꽃이 많이 없어서 풀인 줄 알고 꽃밭을 함부로 밟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수현이는 울컥 울음이 솟았습니다. 어른의 발자국에 제법 자란 과꽃 줄기가 밟혀 있었습니다. 부러진 것도 있고 기우뚱 넘어진 것도 있습니다. 수현이는 쓰러진 꽃들을 세우고 돌멩이로 받쳐 주었습니다.

<마음에 심는 꽃> 책의 주요 배경은 바로 여기 인동집이다.

이름도 인동꽃이 피어서 인동집.

삼촌이 일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 수현에게 미션을 준다. 바로 여기 인동집에 꽃밭을 잘 가꾸라고!

이젠 모두 떠나 아무도 없지만 수현은 삼촌의 미션도 있고 꽃을 가꾸는 재미도 있어서 소중히 다룬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에서 승용차 한 대가 오는데..!

바로 서울에서 온 민우네 가족이다.

이 부분은 수현이 잘 가꿔놓은 꽃을 이 집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니 헤쳐놓아버려 주저 앉아 서러움에 울컥 울음을 쏟는 장면이다.

역시 첫 만남에도 이야기거리가 가득하다.

그리고 수현의 꽃밭을 사랑하는 마음, 그 아이에게 꽃밭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그림 속 오버랩 되며 울고 있는 수현에게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기도 하다.

괜찮아 수현아. 살다보면 더 힘든 일도 많단다. 가 아니라 ㅋㅋ

얼마나 속상할까, 아마 저 사람들이 처음와서 잘 몰라서 그런걸까야~ 하는 위로 말이다.

수현의 순수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부분.

-"어디로 갔지?"

수현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꽃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돌멩이로 받쳐 두었던 과꽃이 없습니다. 뽑아 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게다가 노란 붓꽃이 피었어야 하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방문이 덜컹 열려서 수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방 안에 앉아 있습니다. 수현이는 당황했지만 곧 괜찮아졌습니다.

"이 꽃들은 내가 키웠으니까 내 것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했어? 왜 네 맘대로 뽑아 버린 거냐구!"

수현이는 화가 나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수현이는 방 안에 꽂혀 있는 노란 붓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자 더 속이 상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수현에게 소중한 꽃을 없애버리다니!

결국 내꺼니까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담아둔 결정타를 날린다.

근데 구석을 보니까 민우가 있었고 꽃병에는 안보였던 노란 붓꽃을 발견한다.

흠, 이래저래 속상하지만 복잡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저마다 꽃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말이다.

 

 

 

-"수현아, 인동집에 다녀와라."

어미니가 빨간 토마토를 소쿠리에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수현이는 낯을 찡그렸습니다. 낮에 좋지 않았던 기분이 되살아났습니다.

"낮에는 고마웠습니다. 엄마가 이것 좀 드시래요 하고 말하면 되는 거야."

수현이는 어머니가 들려 준 소쿠리를 안고 나왔습니다. 좋은 얼굴로 토마토를 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업이 수현이는 인동ㅈ딥으로 왔습니다.

와, 이 부분은 너무 공감되서 적어봤다.

요즘은 이웃집 사람과 얘기도 잘 안하고 이 시골집처럼 친근하지 않지만 나름 예전에는 어른들끼리 서로 얘기도 자주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나를 이용(?)해 관계의 매개체로 저렇게 선물이나 먹을 것을 나눠주고 나눠받았던 기억이 난다.

직접 주고 받으면 되지 왜 나를 심부름시키는거야, 하는 어린 마음에 귀찮기도 했는데

이제야 <마음에 심는 꽃>을 읽으며 어른들의 마음에 대입해보니까 옆집의 어린 아이가 어른들이 시켜서 선물도 주고 인사하러 오면 진짜 귀여울 것 같고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그땐 정말 귀찮았지. 하지만 군말 없이 했던 소소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라면 꽃밭을 가질 거야."

수현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민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삼촌이 돌아오는 날,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는 질문에 수현은 "예쁜 꽃이랑, 머리띠 그리도 동화책"을 말한다.

"나라면 그런 것 안 갖는다."는 민우에 말에 수현은 그럼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어보는 대목.

민우는 "나라면 꽃밭을 가질 거야"라고 대답한다.

아픈 민우에게 꽃밭은 그저 꽃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질 수 없는 시간, 건강, 아름다움, 그리고 수현과 함께 가꿀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의미가 다른 사람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오다니.

잠시 잊고 있었던 책의 제목 <마음에 심는 꽃>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민우라면 선물로 달라고 말했을 '꽃밭'을 떠나면서 수현에게 남겨둔 편지에 "이거 너 가져라. 너 꽃밭 좋아하자나."라고 무심한듯 다정하게 말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그래서 과연 그 둘은, 민우네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지내게 될지 이야기 속에 계속 남아있겠지만

오랜만에 잊고 있던 감성들을 꺼내주는 힐링 북을 만난 것 같아서 꽃밭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글은 시공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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