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보라보라 사람들
보라보라 섬이라.
아주 예전에 나 때는 말이야, 동방신기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해서 처음 보라보라섬을 알게 되었다.
예쁜 휴양지 느낌의 멋진 바다가 펼쳐진 뮤직비디오였다.
그곳이 어딘지 무슨 언어를 쓰는지 인구는 얼마나 되는지 모른채.
<우리만 아는 농담>은 보라보라섬에서 지낸 일상을 엮은 에세이다.
그래서 보라보라섬이 어디라고?
초록창에 검색해보니 타히티에 있는 섬인데, 타히티는 어딘가하니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속하는 소시에테 제도의 주도라고 써있다.
아~ 그래서 프랑스어를 하는거였구나!
아무튼 <우리만 아는 농담>에 중간 중간 실려있는 사진과 여행지 관련 연관 이미지를 보다보니 여행가고 싶어진다.
여행과 일상의 차이.
그곳에 살아보면 어떨까.
보라보라섬의 일상을 책에서 보물처럼 건져올리는데 참 가보고 싶어진다.
폴 고갱, <타히티의 두 여인>, 1982년
보라보라섬이 있는 타히티라고 하면 폴 고갱이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타히티의 두 여인> 그림이 떠오른다.
와, "고갱 타히티"만 쳐도 그것 말고도 참 많은 그림들이 있다.
이 자유롭고 아름답고 신 적인 여인들의 모습을 보니 타히티의 전경과 그림을 그리는 고갱이 눈에 그려진다.
폴 고갱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 마음이 아려오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책까지.
이렇게 내 머리 속으로 조합해온 타히티, 보라보라섬의 이미지는 그랬다.
자유롭고 또 자유롭고. 물론 육지와 떨어져 있어서 삶의 제약은 있지만 예술이 살아 숨쉬고 삶의 애환이 있는 그런 곳.
생소하다 못해 낯설어서 이 <우리만 아는 농담> 책이 더 신선했다.
나는 지금도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일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괜찮다.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도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우리들의 일
살아가면서 느끼는 게 있다.
어머니, 아버지 세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그리고 그리고 더 올라가 윗 세대까지.
일을 해보니 일이라는 게, 업이라는 게, 그 단어가 지닌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이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일하는, 아니 일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히어로다.
거창한 일이 아니라도 꾸준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고수고 장인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일 아니더라도 무의미하고 사소한 일도 모두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표현이 참 좋았다.
기뻤다. 그리고 망설어졌다. 좋아하는 것과 책임지는 것의 차이. 곧 진심과 태도의 차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사실 남편은 오래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했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했다. 건강검진도 데려가고, 놀아주고, 언젠가 우리가 섬을 떠날 때 필요한 고양이 여권도 알아서 만들겠다고 했다(지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저녁마다 친구들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친구들은 비틀즈의 노래 <Hey Jude>를 듣다가, 우리 고양이의 이름을 '쥬드'라고 지어주었다. 친구의 아이를 위로갛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던 폴 매카트니의 마음처럼, 쥬드에게도 우리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가 훨씬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도 고양이가 찾아왔다.
대화 소리에 깬 사촌이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모 이렇게 태연이랑 24시간 붙어 있는 거 오랜만이죠?"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눈가를 쓱쓱 닦아냈다. 사촌이 헛기침을 해서 옆을 보니 그도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몰라. 그냥 눈물이나." 덕분에 웃음이 터졌다. 사촌과 엄마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들 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모든 여행에는 여행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겨진 목적지가 있다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앤텔로프 협곡을 기점으로 이번 여행의 숨겨진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람, 곧 함께 여행하는 가족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 조금씩 용기를 내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차 더 길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끔은 미웠고, 피곤했고, 자주 막막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이나, 유명 관광지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전처럼 지루하지는 않게 되었다.
의외로 엄마와의 대화가 제일 새로웠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한 가지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나는 엄마를 몰랐다. 물론 엄마도 나를 몰랐다. 이제는 엄마를 안심시키기보다,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가족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데 가면 재밌고 힘든 일이 참 많다는 거, 그리고 돌아오면 함께 나눌 추억이 있다는 게 소중하다.
물론 여행지다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들과 날씨 등등 힘든 순간들도 많지만 결국 다녀오면 행복함이 두고두고 쌓인다.
괜히 이 구절을 읽다가 마음이 뭉클뭉클해졌다.
보라보라섬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는 가족이 얼마나 보고싶을까.
요즘 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비행기를 타고 슝~ 날아가서 만날 수 있고 필요하면 화상 채팅이나 보이스톡으로 통화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만날 수 있는데 안보는거랑 보고싶어도 못보는 건 천지차이다.
가족들간의 끈끈한 마음으로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는 그 부분에서 나도모르게 같이 웃고 같이 울게 된다.
여행지에 가면 느끼는 게 그거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영원할 수 있을까." "언제 또 다시 오게될까".
물론 영원한 건 없고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순간 순간이 더욱 소중하고 여행을 가서 잠자기 전 하루를 마감하며 누워있는 시간 이런 생각과 감정들이 떠오르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계속 가고 시간과 추억은 같이 흐른다.
내일의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어제오늘과 똑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계속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지루함이 축복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뭐 그렇다고 별 수 있나.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지루함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늘이 언젠가 우리만 아는 농담이 될 날을 기다리며,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에필로그,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이 글은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