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신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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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부의 역사"

서로 주고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두로만 약속을 맺으면 의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법도 없고 법을 감독하는 곳도 없었던 고대에는 계약이나 서약을 어디에서 보증받았을까요?

인간은 그 역할을 종교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논리와 도덕을 이끌어냅니다. 인간은 폭력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선악의 가치 판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합니다. 이기적인 행동을 멈추는 것이 다른 사람과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조화로운 자세로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도덕으로 선악을 판단할 때 모든 인간이 명명백백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속에 이를 반복해서 새기기 위한 제도나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필요에 응할 수 있는 것은 종교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 범죄를 막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종교였습니다. 수사력에 한계가 있었던 전근대사회에서 범죄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라는 시스템을 공동체 운영에 편입시켜야 했습니다.

죄를 범하면 신이 벌을 주는 것은 세계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벌칙을 규정해놓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신의 뜻에 따라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 세계의 안락과 신의 은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와 은혜를 교묘하게 섞어서 사람들이 신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신이 경제 기반을 반든다

고대 - 5대 머니게임의 서막

중세 - 종교, 경제에서 태어나 경제를 낳다

근세 - 인간은 어떻게 돈의 노예가 되었는가

근대 - 머니게임 후반전, 경제와 과학과 종교의 분립

현대 - 하나로 움직이는 세계 경제와 그 배후

요즘 핫한 책, <부의 역사>.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를 찍었고 페이스북과 인터넷서점을 돌아다니다보면 오야마 다쿠에이의 <부의 역사>가 종종 보이곤 했다.

드디어 나도 궁금해서 읽어본 <부의 역사>.

우선 책을 펴보면 바로 알겠지만 누구나 읽기 쉽게 쓴 부와 종교에 관한 경제경영서이다.

책의 하단에는 'must person', 'must affair' 이라고 꼭 알아두면 좋을 인물이나 사건을 콕 집어주고, 역사의 흐름을 잘 잡기 위해 도식화해서 표현도 해준다.

책의 제목인 <부의 역사>, 그리고 그 부제목인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이라는 말을 보고 책을 폈을 때는 정말 몰랐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의 역사는 곧 종교의 역사와 다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신성한 종교를 돈과 부와 자본주의에 묶을 수 있느냐고 성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런 비판과 비난에도 꿋꿋하게도 저자는 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은 곧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자 가치관이며, 시대의 정치과 경제는 물론 사회까지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부와 종교라니.

그동안 나왔던 역사책과 다른 <부의 역사>는 새로운 시야를 넓혀주며 쓱쓱 잘 읽히기까지 한다.

지금이야 법과 제도라는 장치로 악과 불법을 막는다고 하지만,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한정된 부와 자원을 가지고 싸우기 마련이다.

저자는 <부의 역사> 가장 앞단에서 왜 부의 역사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조율할 수 없는 바로 그 싸움을 인간 위의 존재, 즉 신이라는 고차원적인 절대자로 막으려했다는 것이고 이로써 종교와 부는 역사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사이사이의 역사적 큰 사건들과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색에서 묻어나는 부의 흐름은 <부의 역사>를 읽는 또다른 재미도 준다.





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장치

-그렇다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해관계 조정 기능입니다.

종교는 세속을 넘어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욕심 많은 인간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서 신처럼 세속을 초월한 존재를 이용했지만 종교 자체가 세속을 초월한 것은 아닙니다. ... 더 많은 풍요를 찾아서 경제 활동 규모를 크게 만들려고 할 때 광범위한 집단을 구성하기 위하 공동 이념으로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기부와 투자의 등장

-앙코르와트와 같은 거대 사원은 단순히 종교 시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족들의 사치품도 아닙니다. 거대 사원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폭제였습니다.

-앙코르와트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시작된 거대 사원 건설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유인이었고 기능적으로는 경제 유동 시스템이었습니다.

-성장의 파급 효과를 꿰뚫어본 부유층은 적극적으로 사원 건설에 투자 또는 기부를 했습니다. 기부를 하면 왕조에서 다양한 상업적 이권이나 토지 개발 및 개간을 허가해줬습니다. 이런 형태로 캄보디아 투자 경제가 거대한 순환을 이루면서 발전했습니다.

면죄부가 독일에서만 잘 팔린 이유

-푸커가는 알베르히트에게 독일에서 독점권을 갖고 면죄부를 판매하게 했습니다. 알브레히트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독일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판매를 하는 면죄부에는 엄청나게 큰 정치적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면죄부를 천만 원어치 산 사람보다 1억 원어치 산 사람이 호엔촐레른에 대하 공헌도가 높았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힘을 얻어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거액의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은 요직을 얻거나 농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존재라는 숙명

-인간이 이성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사회를 저절로 공정함과 정의로 이끄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이라는 초월자와 그 위대한 힘을 느끼고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인간인 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또는 숙명적으로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과 종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믿음과 신적 의미의 종교도 물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종교과 부가 어떻게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지를 재밌게 짚어낸다.

예를 들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캄보다이의 멋진 사원, 앙코르와트도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국가적 기부와 투자, 그리고 그런 인프라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경제의 힘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비슷한 의미로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곳곳에 멋진 성당이 있고 높은 철탑의 교회가 있는데, 이 또한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의 중심이자 부와 기부, 그리고 경제적 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 교화를 중심으로 구역을 나눈다고 하니 의미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학교다닐 때 배웠던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이 외친 독립기념문과 미국전쟁 안에서도 우리는 종교가 어떻게 한 국가와 경제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때론 그 종교가 부를 막기도 한다. <부의 역사>에서는 어쩌면 중국의 폐쇄적인 시장 경제가 유교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종교의 영향일 수도 있으며, 이슬람 또한 불로소득이나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인 문화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논한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의 빠른 셈과 기막힌 부의 흐름을 읽는 교육들은 유대교를 넘어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부의 상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각 국의 종교와 시대상을 따라가다보니 어쩌면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는 결국 비슷한 꼴을 가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와 명예를 나누고 싸우고 화해하는 역사적 모습은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나라의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종교라는 이름은 결국 부를 나누기 위한 방편이거나 더 많은 부를 거둬들이기 위한 국가의 표식일 수도 있다.

"신이 만든 부의 역사"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만든 종교 속의 부의 역사"이다.

하지만 그 종교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그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더 살기 좋고 행복하고 부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의 역사>에서는 이 책으로 경제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이제 우리 삶에 종교는 종교 그 이상의 많은 의미가 있음을 역사의 흐름과 함께 걸어가며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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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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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어떤 통상적인 확신이라든지, 어떤 명백한 사실로서가 아닌, 어떤 병처럼 찾아왔다. 이것은 음험하게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나는 조금 이상하고, 약간 거북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한번 자리를 잡고 나자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아주 조용히 있어서, 나는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은 공연한 걱정일 뿐이다, 라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기_1932년 1월 25일 월요일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내가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자, 이제 가야하는데, 마음이 분명치가 않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내게 재능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하지만 난 한 번도,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글을 써본 적이 없다.

...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한 권의 책. 물론 그것은 우선은 지루하고도 피곤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놓일 때가 올 테고, 그것이 발하는 약간의 빛이 내 과거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통해 나의 삶을 혐오감 없이 떠올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어느 날, 나는 바로 이 시간을, 내가 웅크리고 앉아 열차에 오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우울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드 게 시작된 것은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어"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자신을 -과거 안에서, 오직 과거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

 

 

 

 

살면서 한번씩 느끼는 구토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천재적인 철학가의 놀라운 소설 <구토>를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또 다른 매력에 반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언과 실존주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사르트가 소설가로서의 작품성과 인지도도 있었다니 아직 배우고 읽어야할 것이

<구토>의 화자 '로캉탱'은 어느날 문득 "그 무언가가내게 일어났다"는 서스펜스 주인공같은 말로 글을 시작한다.

마치 사르트르 본인의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나는데 이것, 저것, 그것 등 추상적인 표현과 꽤나 어려운 말들로 사유를 가지고 노는 사르트르의 글은 읽는 재미와 '구토'의 재미를 동시에 주었다. 나만 이렇게 난해한 것인가? 생각이 들 때면 '사르트르 소설'을 검색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며 난해한 글 속에서 많은 의미들을 찾아주었다.

근데 난해해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는글이 있는가하면, 난해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하며 계속 읽게되는 글이 있는데 사르트의 <구토>도 그런 책인 것 같다.

마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처럼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과 감정은 <구토>의 '로캉탱'에게 어쩌면 삶을 바꾸는 놀라운 하루였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평소와 같은 하루겠지만 그 '무언가가' 로캉탱 안에서 자리잡았다.

처음 <구토>의 제목을 봤을 때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삶의 막막함이나 부조리함으로 생기는 어지러움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르트르의 '구토'는 일상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안에 아이러니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느껴진다.

물론 하루종일 구토를 느끼면 문제가 있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소설 속 구토의 느낌은 어느 벤치나 카페에 앉아 거리를 보면서,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음에 행복함을 느끼며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처럼 아이러니함 속의 행복과 다짐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서를 접하면서도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이번 <구토> 를 읽으면서도 다시 읽고, 또 다시 읽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읽은 이 작지만 강한 힘이 있는 <구토>는 내 이해와는 별개로 사르트르의 사유와 철학을 함께 느끼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불완전함을 함께하고, 만나는 인물들과의 관계와 마지막을 나누면서 '구토'라는 단어와 감정을 이렇게 오래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딘가 사르트르의 다른 글에서 본 것인데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나마 내 삶의 본질을 표현했다."라고 했다는데

사르트르의 실존과 존재의 치열한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고 사르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구토>라는 작품도 소중하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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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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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올케와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기분이 고약했다. 죄책감 같기도 하고 소외감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내게 될까 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래도 희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남아 있지만 우리 식구에겐 그게 없었다. 엄마도 남아서 그들처럼 하려고 나만 피난을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미처 그렇게 하기 전에 엄마의 아들은 효자답게 살아서 돌아와 지금 엄마의 품 안에 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저들보다 행복할까. 엄마가 행복하건 말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게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 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는 강씨가 그 정도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그날을 앞두고 식구들은 잠을이루지 못했다. 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가슴을 쥐어뜯곤 하는 엄마를 올케가 천사 같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임진강만 안 건넌다면요."

"오냐,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지 임진강만은 건너지 말거라."

올케하고 엄마가 입을 맞추는 임진강 소리가 나에겐 암호처럼 들렸다. 내 마음속에는 삼팔선이, 그들의 마음속엔 임진강이 각각 넘어서는 안될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차차 나도 식구들과 같아졌다. 최소한도로 말했고 최소한도로 움직였다. 무언가 먹긴 먹었겠지만 다음에 무얼 먹을까 걱정하지 않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었기 때문에 먹지 않음과 같았다.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이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비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한 여름의 죽음

나는 혼자 다니는 데 더 익숙했다. ... 구속되기 싫었다. 남을 의식한다는 게 나에게는 일종의 구속감이었다. 남한테 신경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유년기에 이미 형성된 버릇이었다. 일학년 때부터 산을 넘어야 하는 긴 등굣길을 친구 없이 혼자서 다니다 보니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위안이 필요했고, 그건 자신 속에 침잠해 공상을 일삼는 거였다. 그렇다고 내내 외톨이로만 지낸 건 아니다. 엎드러지는 친구도 생겼지만 한때였고 오래 우정을 유지한 친구는 한눈팔거나 딴생각하고 나도그냥 거기 있는 친구였다. 정말 좋은 친구는 화제가 끟긴 동안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내밀하 소통의 시간이 되는 친구였다.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문밖의 남자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에필로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 박완서 선생님.

이번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멋진 책들이 타계 10주기 기념 아름다운 표지로 웅진출판사에서 다시 태어났다.

타계 10주년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다시 나타나셔서 그동안에 책들을 엮고, 신간도 내고, 시대에 대한 한탄도 같이 하면서 그래도 삶은 살아가는 것이리라 말씀해주실 것만 같은데 말이다.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알게된 건, 아마도 학교 수업시간.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이 짤막하게 실려있는데 시험에도 꼭 출제되니 잘 읽어야하는 부분이었다. 대부분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이 그러하듯 그저 문제를 위한 문제, 작가의 의도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엄마의 말뚝>을 읽는 순간 몇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그동안 내가 읽은 우울한 한국문학 작품과는 결이 다른, 우울함 속에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몰랐다. 박완서 선생님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고, 읽으면 읽을수록 빛이 나는 작품인지도 몰랐다.

더 커서도 몰랐다. 40살 이후 등단하신 기적같은 분이라는 것과 한국문학의 정수라는 말들을.

이제는 그때보다 책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잘 모르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세대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함을 느낀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책 소개를 읽어보자면,

"미완으로 끝났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작이며, 작가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다" 라고 말한다.

미완으로 끝났던 작품의 후속작...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

워낙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풀어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박완서 선생님 답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처절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각기다른 주인공들의 삶이 펼쳐진다.

주인공 '나'가 스무살이 되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장편소설은 박완서 선생님의 실제 연작 자전소설로도 유명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지요? 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는데 아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질문하면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만 같기도 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주인공 '나'는 1951~1953년이라는 한국전쟁 전후의 한참 힘들었을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우여곡절들을 겪는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들만큼 살아가는 것보다 죽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 '나'에게도 많은 인물들의 만남이 있다. 모두가 피난을 간 서울 한복판. 자기네 식구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알게 된 '강씨' 아주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된 인민위원회 사람들. 가족들을 두고 홀로 피난을 가면서 함께한 '근숙이 언니'. 그리고 그 언니를 통해 취직한 한국물산 '파마자부'와 피엑스 생활. 무엇보다 이제 반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일들까지. 그리고 남보다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는 불보다 진한 '나'의 일가친척 가족들까지. 주인공 '나'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

'그래도 '엄마'와 '오빠'인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무심하고 철없어 보이는 그 둘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아린다. 사람이 힘들면 어려진다고 했던가. 다리에 총상을 맞아 종아리에 총구멍이 뚫린 '오빠'는 박완서 선생님의 다른 많은 작품들 속 '오빠'처럼 1인분의 몫, 제 구실을 못한다. 걷지 못해 피난도 가지 못한다. 훗날에도 올케와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자기 힘든 속만 말하니 원.

주인공 '나'에게 '엄마' 또한 마음껏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이다. 워낙 시대적 배경이 남자, 남자를 외치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풍토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설움이다. 더구나 어렸을 때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남녀차별의 한방이란. 지금도 한번씩 트라우마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마 어른이 되어도 평생 가겠지만 그 아픔을 '나'가 조금 달래준다.

"할머니는 그럼, 작은아버지 지게 지는 것만 속상하고 작은 어머니 광주리 이고 다니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우리 근본이 뭔데요. 작은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면서기 하신 거? 그건 할머니, 일본놈의 아전 같은 거예요. 창피해요, 창피해. 그것 때문에 해방되고 나서 친일파라고 동네 청년들이 우리집 깨부수고 난리 친 생각도 안나세요?"

참다 참도 보다못한 '나'가 이번에는'할머니'에게 가하는 따발총이다. 자기 자식(남자) 힘든 것만 알지 남의 자식(며느리)과 식구들(딸, 손녀) 힘든 건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이 다 화가난다. 결국 서울대학까지 갔었던 이 시대 인텔리, '나'는 참을 수 없다. 아마 박완서 선생님 본인의 투영이리라.

어렸을 때는 일상 생활에서나 책과 영화 속에 이런 장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시대에 화가 나는 분노를 느꼈다. 왜 악습을 계속하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찰나에 이제는 어느정도 양보하게 된다. 그래 그 시대는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고 자라며 배우지 못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배경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 거친 세상을 살아남은 패기를 응원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인물들의 인생이 참 기구하고 연민이 든다. 불쌍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말로는 십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을만큼 일반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시련이 닥쳐온다.

수많은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배경이된 한국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상처는 개인을 이렇게 파괴할 수 있구나. 서적과 자료로만 보던 상처를 소설 속 '나'와 인물들에 투영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함께 느껴봤다. 전쟁의 아픔을 없앨 수는 있지만 이후 세대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최소한의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너무 좋은 글들은 그래도 어찌됐든 살아갈 수 있다는, 살아가게 된다는 희망이 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을거야. 하는 희망이.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고 악다구니 받쳐서 외치는 말들도, 내 안에 참고 참았던 설움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도 모두 소중하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같은 작품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시대를 함께 나누는 순간들의 기록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처럼 아름답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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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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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박완서 선생님, 아름다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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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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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예속이다

무지는 힘이다"

1984_당의 3대 강령

4월의 화창하고 추운 날, 시게들은 13시를 쳐서 알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해 보려 애쓰며 턱을 가슴께에 파묻고, 승리맨션의 유리문을 통해 빠르게 미끄러져들어갔다. 그럼에도 함께 따라 들어오는 모래 먼지의 소용돌이를 막을 만큼 충분히 빠르지는 못했다.

윈스턴은 확실히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의 눈길이 마주친 이우에도 오브라이언이 친구였는지 또는 적이었는지를 확신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또한 그것은 심지어 크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애착이나 당파심보다 더 중요한 이해의 고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될 걸세." 그는 말했었다. 윈스턴은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실현될 것이었다.

사람들이 인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제정신을 지켜가는 것으로서였다. 그는 탁자로 돌아가, 펜을 담갔다가, 썼다.

미래 혹은 과거에게, 생각이 자유로운 시대에게, 사람이 각자 다르면서 혼자 살지 않는 시대에게- 진실이 존재하고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 고독의 시대, 빅 브라더의 시대,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인사 드립니다!

자신은 이미 죽었다, 라고 그는 되새겨 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 시작한 바로 지금,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여겨졌다. 모든 행동의 결과는 그 행동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썼다.

사고범죄가 죽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범죄가 곧 죽음이다.

"당신들은 방금 묘사한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꿈이에요. 불가능합니다."

"왜지?"

"문명사회를 공포와 혐오와 잔인함 위에 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왜 그렇지?"

"거기엔 생명력이 없을 테니까요. 그건 붕괴될 겁니다. 자멸하고 말 겁니다."

 

 

 

우리에겐 너무 친숙한 조지 오웰.

영국의 소설가로 <동물농장>, <위건 부두로 가는길> 등 마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밑바닥 생활과 인생에 대한 고뇌로, 탄생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유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우울하지만도 않다.

사실 <동물농장>을 어렸을적 읽었을 때는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고 동물들마다 무엇을 뜻하는지 비유적 표현을 알아맞추는 문제적 문제를 위한 작품으로 접했었는데, 크고 나서 읽어본 <동물농장>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그의 멋진 필체로 얇은 책의 두께보다 배로 두꺼운 생각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오랫동안 다른 고전 작품을 읽는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는데, 이번에 새움 출판사의 이정서 번역가를 통해 조지 오웰의 <1984>가 재탠상했다. 나는 아직까지 <1984>의 유명세는 알았지만 읽어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드디어 읽어봤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역시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 작품은 모두 이유가 있다. <The Kiss>라는 그림 작품의 멋진 표지만큼 이번 <1984> 고전도 소장각이다.

<1984>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건, 한참 광고 공부를 할 때다.

광고인의 영원한 워너비, 스티브 잡스를 파헤치다보면 그의 놀라운 광고역작들을 만나게 된다.

때는 1983년 봄, 매킨토시 광고를 출시하기 위해 가히 놀라운 작품을 선보인다.

바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광고라는 평을 듣는, 소설 속 1984가 왜 실제 1984와 다른지 도끼로 깨부시는 그 멋진 장면이 담긴 광고!

광고 속에서도 빅브라더와 세뇌 당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에어팟을 낀) 여자가 나타나 화면을 부숴버린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책 속 <1984>가 아닌 희망이 있는 <1984>를 강조하는걸까.

단순히 디스토피아라는 작품을 넘어, 조지 오웰의 <1984>는 인생의 쓴맛이 아주 가득하다.

주인공 윈스턴은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 하루는 역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는 빅브라더와 함께다.

그런 그에게 스멀스멀 반발심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일기도 쓰면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느낀다. 이상한 강령은 또 뭐고 전쟁과 예속과 무지를 찬양하다니! 당의 3대 강령이 <1984> 속에서도 여러번 등장하는데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화가 난다.

이런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상한 신어를 만들고 사상경찰, 텔레스크린, 헬리콥터, 마이크로폰 등을 통해 철처히 감시하는 자유 없는 삶이 이어진다. 그런 윈스턴에게 용감한 변화가 찾아오나 싶은데 과연 <1984>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암울함으로 유명한 이 책의 명성만큼이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만나기도 하고 체포되기도 하고 무기력한 그저그런 인간1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소설 속 <1984>가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일들이 너무 많고 국제사회를 봐도 독재정치와 암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이 1948년 (눈치 챘겠지만 1984를 살짝 뒤집은 숫자다) 에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70년이 넘어도 이 말도 안됨은 계속되고 공감하는 슬픈 역사인 것 같다.

더욱 놀라운건 <1984> 속 예견된 일들이 2020년대에도 지속된다는 것! 조지 오웰의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함에 놀라고 아직도 변하지 않는 빅브라더 시대에 한번더 놀란다.

<1984> 속 사람들이 빼앗긴 건 천천히 죽어가는 자유다. 주인공 윈스턴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생명력이 없는 힘은 붕괴되고 생각이 자유롭지 못한 자유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1984> 보다 자유로운 삶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을 넘어 <1984> 속 윈스턴과 그의 동료들의 삶으로 투영되어 책 속에 뛰어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구 던져보게 된다.

오래도록 사랑받은 <1984>와 책 속에 나온 놀라운 신어들, 그리고 깜짝 놀랄 결말만큼 우리는 더 놀라운 삶을 자유롭게 투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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