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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어요, 이렇게 좋은데 - 시시한 행복이 체질이다 보니
김유래 지음 / 레드박스 / 2018년 8월
평점 :
빡빡한 삶이라는 게 절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아마도 초등학생때까진 몰랐던 것 같은데, 그 후부턴 천천히 내 삶을 조여왔던 이 빡빡함이, 30대가 되고 한 가정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되면서 더 강하게 들어온다.
나는 스스로가 자신과의 타협을 잘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말이 좋아 타협이지 게으른 사람의 포기라고 하는 말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엄마’라는 것이 되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신과의 타협이 되어버렸다. 온전히 나 하나만 생각하고 맞춰갔던 일상의 흐름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나를 위한 무언가라는 타이틀은 생각보다 갖기 어렵다. 나를 위한 타협은 정말 어렵다. 이런 빡빡한 내 삶에서 ‘훌쩍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은 상상만 할 수 있는 사치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여행 책도 별로 안 좋아한다. 읽을 땐 즐겁지만 책을 덮고 나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허상이란 걸 안다.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를 하고, 화를 내는 것이 여행 책을 읽고 나서의 내 뻔한 엔딩인걸 알기 때문이다.
근데 왜 이 책은 읽는다고 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아마 제목 위에 써있는 ‘저低자극 우붓 생활기’ 때문인 것 같다. 화려하고 자극적이며 눈을 즐겁게 해주는 여행기는 읽는 동안만 즐겁다. 온전히 책의 모든 것을 느끼고 뭔가를 나에게 남겨주는 책을 원했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전혀 가고 싶지 않은 우붓이라는 곳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읽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
작가는 나만큼이나 소심했다. 나는 공포영화, 스릴러, 추리물을 좋아하는 장르물 매니아지만 현실세계에선 엄청난 쫄보다. 혼자가는 여행은 상상도 안하고, 어두운 곳은 시간이 걸려도 빙 돌아가며, 사람들의 만남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쫄보다. 나만큼이나 이 책의 작가도 소심하고 울보라 했기에 정말 그런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던 일을 관두고 여행을 훌쩍 떠난다는 것만큼이나 대담한 짓도 없다. 작가는 자기가 엄청 대담한데도 아직까지 소심하다고 광고를 한다. 이 부분이 참 재밌었다. 소심하다고 믿는 대담한 여자의 여행기, 어떤 식으로 써놓았을지 궁금해지는 포인트였다.
여자 혼자 가는 여행,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도시라니 역시나 대담하다. 힐링 여행지로 많이 알려져있다는 우붓의 자연을 느끼고, 원주민들의 여유를 배우는 과정 역시 대담했다. 만약 내가 용기를 내어 우붓까지 갔다하더라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잘 다닌다. 낯선 나라의 시골 동네를 혼자 돌아다니다니, 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 읽으면서도 속으로는 미쳤네 미쳤네라며 어르신들처럼 혀를 찼다. 내가 우붓에 대해 잘 몰라서 이럴수도 있지만 남편의 말에 따르면 엄청 소심해서 그런다고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역시 내 입장에서는 너무나 대담하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혹시 원인을 제공한 게 내가 아닐까 생각하는 버릇. 누군가 생각 없이 던진 말과 행동의 원인을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 곱씹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자체가 힘든 나는 결국 나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나를 진짜 힘들게 하는 문제는 그런 것이었다.
p. 102
작가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상처 주었던 사실들을 깨닫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신경쓰지않아도 될 부분까지 남들의 반응을 신경쓰다보니, 정작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을 발견하지 못해 결국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상처받아 주저 않아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일은 해결 되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나에게도 많았다. 이 부분을 보고 이해했다. 나도 나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었구나. 남에게는 행복한 하루가 되라면서 정작 나는 행복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오늘 이 것을 깨닫고 내일 다시 잊는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나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었다.
“우리는 슬픈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해요.”
며칠 후 크틋이 낮은 선 베드에 앉아 말했다. 수영장 물이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거렸다. 얼마 전 크틋의 형수님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형은 매일 술을 마셨고 온 집안이 슬픔에 잠겨 엉망이었다고 했다. “네. 슬펐어요. 하지만 일하러 와서는 웃었어요. 우리는…” 그는 땅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며 밝게 한번 웃었다. “슬퍼도 웃어야만 해요.” 그의 웃음은 나를 울고 싶게 했다.
“혹시 알아요” 만약 어떤 문제를 피해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그곳에 똑 같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대요.”
p.148
여행을 가는 이유 중 하나에 ‘도피’가 있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피하기 위한 여행.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적이 많았다. 약하게는 안 풀리던 일을 내팽개치고 휴가다녀와서 보면 그 일은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많은 이들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의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러 도망간다. 언제나 그 문제는 내 옆에 있다. 이 책이라고 해서 해결책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도망이 답이 아니라 맞서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당연히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망각한다. 나 역시 몇 년전 내 인생에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고, 그 일은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2년 이상 정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흐르다보니 결국 깨달은 것은 맞서야 한다는 것 이었다. 내가 지치지만 않으면 그 녀석과는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참 오래 걸렸다.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갈 수는 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마음도 그만큼 단단해지더라. 고통과 싸우면서 나도 강해지는 초사이언 같은 사람이 되더라.
그녀의 담백한 여행기는, 당연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씩 천천히 느끼게 해주었다. 가끔 삶은 자신도 모르는 악마 같은 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가 만난 우붓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은 그러한 악마 같은 내 모습 역시 나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녀가 우붓과 사랑에 빠진 것 역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해준 곳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우붓에서의 일들을 잔잔한 음악처럼 써내려간 솔직한 이야기가 내게는 어떠한 장르 소설보다도 고자극으로 착착 꽂히면서 꽤나 괜찮은 여행기로 랭킹이 올라갔다. 사실 아직도 그녀처럼 우붓으로 여행을 간다거나 하는 대담한 일은 꿈꾸지 않지만 이렇게 대리만족을 한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좋은 장소를 만날 날이 10년안에는 꼭 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살짝 대담 스킬을 올려야할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