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사랑한 소년 ㅣ 스토리콜렉터 6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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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쇄살인범들의 정신세계는 언제 들여다봐도 극단적으로 죄책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데다 그들만의 범죄성향을 분석하여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지가 이런 소설의 관건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년 전과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 이번 소설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일련의 어둠을 격리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낮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음을 등골 오싹하게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다.

 

 

프로파일러 슈나이더가 한 남자의 교도소 수감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범인을 검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슈나이더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 교도소는 오직 기차나 경찰 보트로만 갈 수 있는 외딴 섬에 소재하고 있는데 온갖 사이코패스 범죄자들만 가둬 놓고 어떤 교도행정 실험을 하고 있는 곳이란다. 교도소장의 설명을 듣자니 과연 그런 식으로 교화가 가능할까란 의구심이 처음부터 들 수밖에 없다.

 

 

일급보안을 자랑한다지만 그래도 으스스한 이 곳에 한나라는 여성 심리치료사가 방문하는데 경력일천한 그녀가 전임자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 곳에 올 수 있었을까? 우연한 기회였나? 한나가 맡은 재소자는 세 사람. 하나 같이 상종 못할 정신이상 범죄자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피트 판 론이라는 남자를 주목하라. 피트는 오년 전 슈나이더가 잡아넣은 연쇄살인마였고 다른 재소자들과 남다른 사악함, 영리함으로 한나와의 상담에서 숨길 수 없는 마각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바깥세상에서는 슈나이더와 일면식 있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살해당하기 시작하는데... 물론 오년 후의 이야기이다. 잔인하게 희생당한 시체들에는 어떤 기호인지 수식인지 알 길 없는 의문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이것들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슈나이더와 자비네는 골머리를 싸맨다. 그러고 보니 살인패턴이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감옥에 있는 그 남자? 설마??

 

 

오년 전과 현재가 왜 번갈아 교차되는 까닭은 바로 살인마가 누군지에 대한 단서를 독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방식이 아니라면 이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꽤 자연스럽게 섞었기에 한동안 다른 원인을 나름대로 찾아보려 애써야 했다. 한나와 자비네가 피트를 번갈아 면담하는 장면에선 특히 그랬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그렇게 속아 넘길 수가 있을까란 의문도 잠시 들기는 했지만. 사전작업 만큼은 오호라.

 

 

단지 연쇄살인마의 폭주였다면 시시했을지는 몰라도 살인패턴의 고리에 얽힌 비밀을 넘어 슈나이더의 특정 개인사와 연관된 기승전결이야말로 이번 시리즈의 하이라이트였다.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의 반전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슈나이더란 이 남자에게 닥친 감당 못할 불행은 자비네의 생사와도 직결되니 예상 못한 행동이었고 선택이다.


 

이 최후의 선택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향후 슈나이더의 정신세계를 죽을 때까지 지배할 것이다. 시리즈는 계속될 터인데 두고두고 회자될 결말 이후 슈나이더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그는 후회하지 않을까? 아, 정말 가엾다. 이 남자를 우째 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다람쥐 양은 어린 조카들한테 제발 그러지 말자. 애들 정신건장에 해롭다. 이모가 되가꼬 이 무신 해괴망측한 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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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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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희가 있고, 감명 깊게 읽은 이석원 작가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도 정희가 나온다. 더불어 이기호 작가의 이 단편 제목에도 정희가 들어있다. 이쯤 되면 정희 이름을 가진 세상 모든 여자들을 몽땅 사랑해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우동국물처럼 후루룩 마셔 버리겠다. 그럼 한정희란 어떤 여자인지 인물탐구에 들어가 보자 꾸나.

 

 

소설 속 ‘나’의 집에 온 사연부터가 마냥 단순하지가 않던데 장인어른이 30년 전에 다니던 전 공장이 부도난 적이 있는데 악덕사장이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해놓고 자기 몫만 쏙 빼돌렸더란다. 장인이 찾아가서 드잡이를 하다 폭력 죄로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들어갔고 형편이 어려워진 장모님은 어린 아내를 지인에게 맡겼었대.

 

 

다시 데려오려고 했을 땐, 기른 정이 무섭다고... 지인 부부가 아내한테 정이 들어 보내고 싶지 않아 해서 실랑이 끝에 겨우 데려왔대.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지인의 사정이 어려워져 그 집 딸 정희를 맡아 키우게 되었다고. 한참 예민할 사춘기 시절,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게 된 것이 어린 정희의 마음에 어떤 파장을 남겼을까. 겉보기에는 시크하게 학교도 잘 다니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학교로부터 나에게 호출이 떨어지네.

 

 

학교폭력 가해자래. 이럴 때는 보통 친엄마가 다녀가지 않나? 하물며 나는 친아빠도 아닌데.. 고모부라고 호칭은 정하고 있지만. 학교 가서 사정 듣고 피해 여학생 엄마를 찾아가 사죄하려다 문전박대나 당하질 않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방탄소년단”을 “방탕소년단”이라고 잘못 부르면 한소리 정도 하는 보통 소녀일 뿐인데. 가해자로서의 뻔뻔함? 자기 합리화? 아무렇지 않대. 또래들끼리 그냥 장난친 것뿐이래.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의 특정기억이 산산조각 되어 떠오르더라. 비슷하다. 우리 집에도 위탁된 친척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잘 대해주었다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반대로 심술 맞게 굴었다. 불쌍하다기보다는 우습게 보였던지 마구 괴롭히다 못해 “너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기까지 했지. 걔는 견디다 못해 으앙 울면서 엄마를 찾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왜 그리 못돼먹었나 싶은 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야만적이었어. 아직 이성적 판단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부끄럽고 미안하다.

 

 

소설 속 정희는 오히려 가해자지. 그 차이점은 대체 무엇일까? 한 번 읽고 나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어릴 적 기억이 교묘히 오버 랩 되면서 자꾸 마음에 걸리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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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시라이시 가오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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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는 상당히 오묘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다 읽고 나면 확실히 그런 감각에 전신을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오전 6시. 공기는 맑고 상쾌할 그 시간에 도쿄 시부야역 주변의 하치 동상 앞을 시라이시 가오루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손에 든 편의점 봉지에는 그녀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머리를 스윽 꺼내서 조심스럽게 동상 앞에 놓아두고 지하철을 타려 한다. 이윽고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하치 동상은 실재하는 명소다. 책과 영화로도 나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충견의 실화에 나도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이 남자는 잘린 여자의 머리를 여기에 두는 것일까? 후속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탐정 노릇도 하는 모양인데 살인마가 어떻게 안면몰수 하고 당당히 주인공이 되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이 직접 여자의 머리를 잘라서 몸통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지 않은가. 늘 냉장고의 서늘한 냉기에 맞춰 몸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쓰는 중이란다.

 

 

이런 엽기 살인마 같은 남자가 의외로 낮에는 요쓰비시 상사의 건실한 신입사원으로 근무 중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나이는 20대 중반에다 입사 3년차로 아직 덜 다음어진 풋내기 같지만 명문대 출신에 비상한 두뇌와 기지를 발휘한다. 회사의 중요 프로젝트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절묘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순간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즉흥적, 직설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상사의 구박을 많이 받는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오버하지 말란 거지. 회사원으로서의 좌충우돌은 일본판 미생을 연상케 한다고 간주해도 무망하겠다.

 

 

그 어떤 가치관과 욕망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얼핏 봤을 때 차갑고 냉정한 사람 같다는 오해를 살수도 있지만 한 번 품었던 사람에 대한 애정은 끝까지 함께 가는 편이라 쉽게 변절하지도 않는 캐릭터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냉혹한 살인마일수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머리를 잘라 전시한 이유와 아무렇지 않게 후속편에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 윤리적 면죄부를 어떻게 설명하게 될 것인가가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데 과연 언제까지나 냉장고에 시체를 꽁꽁 숨겨둘 수 있겠는가? 얼릉 진실을 밝히라구, 나쁜 놈이 아니잖아. 일본경찰의 수사능력을 시험해서 어떤 떡밥을 회수하겠다는 걸까? 결국은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트릭 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지만 순전히 캐릭터의 개성만으로 온전히 미스터리를 해결하는데서 읽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은 이 캐릭터를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독특한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으니 읽어보시라. 시라이시 가오루는 살인마냐? 명탐정의 탄생이냐?

 

 

주인공인 시라이시 가오루 라는 이름은 소설의 성공에 따라 쓰게 된 작가의 필명이라는 점이 신선하다는 점 외에도 친구인 노다, 편의점 여자 알바생, 처음엔 잔소리 대마왕이었다가 점차 시라이시에게 마음을 여는 연상녀 사에구사실장(동시에 상사이기도) 같은 인물들의 관계가 다음 편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오피스 소설로서의 매력도 뛰어나서 짬짜면을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테니 이 시리즈를 놓치지 말자.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절단해 하치코 동상 앞에 안치했다.

서두에서부터 누차 설명했던 그대로.

그렇다면 머리를 잘라내고 남은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냉장고라는 설명 그대로,

냉장고 안을 비추는 조명에 새파란 피부를 내보이며

무릎을 접고 들어가 있는 그것.

그것은 머리통이 없는 여성의 나체였다. <70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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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맨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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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은 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우리는 흔히 ‘운’이 없다고 말한다. 누구나 목표의식을 갖고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설계해나가기를 바라지만 그 결실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있다. 이럴 때는 운명을 ‘운’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세상은 부족한 담금질을 요행수로 대신하려 한다면서 채찍질을, 그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에겐 불굴의 의지를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오로지 피땀눈물에 의해서만 가동되지 않는다. 때론 우연을 ‘운’이라는 선물로 획득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 기름칠 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짐을 덜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삶은 어떠한가. 때는 1970년대,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루크 라인하트라는 정신과 의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성격을 바꾸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문제적 성격들엔 신선한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안겨주고 싶었으나 정작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남들은 루크의 유복한 가정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부와 지위 등에 부러움을 표시하지만 순탄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진저리 친다. 분명히 권태기였다. 사는 게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배가 불러 출산하고도 남을 복에 겨워서 그렇다며 충분히 비난할 만 하다. 왜 참지를 못하니, 왜 극복하지를 못하니.

 

 

어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삶의 모든 결정은 주사위에게 맡기면 어떨까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너무 즉흥적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 아니라 주사위의 경우의 수가 가진 각각의 확률에 대해선 수학적 고민이나 분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겠단 의도였다. 주사위 신에게 귀의하나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묻거나 따지지 말고 종으로서 충심을 다해 이행하겠나이다. 육면체니까 6가지 경우의 수만 미리 정해두면 된다. 주사위를 굴러 해당되는 번호가나온다면 그대로 간다.

 

 

물론 첫 시도에선 주저한 적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동료의사의 아내를 강제로 범하라는 결정이 나오자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한 번 눈 질끈 감고 밀어붙였더니 그 뒤부터는 양심과 윤리 따위는 전혀 장벽이 되지 않더라. 이제부터는 파죽지세로 모든 선택은 주사위 신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그에게 등을 돌린다. 누가 봐도 미쳤다고, 광기에 탐닉 당했다면서 무법과 일탈에 빠진 루크는 더욱 주사위 신에게 집착한다. 루크는 다이스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제부터 사상 최강의 수퍼빌런이다. 그 결정의 결과가 살인이든 강간이든 개의치 않겠단다.

 

 

그래서 <다이스맨>은 본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을 운에 맡겼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맹신하는 한 남자의 기행담이다. 끝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선택에 대한 도덕적 가치관을 통렬히 전복시킨다. 주사위가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처럼 애초에 경우의 수를 올바르게 활용했다면 이렇게 죄악시 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선악과 공명정대함의 잣대를 들이대기엔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 이 소설의 창의성을 모방해 똑같이 행동할지도 모르겠지만 억압된 개인의지를 방목했다는 데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내 삶도 날마다 권태로워서 상상 속에서나마 루크처럼 주사위 신에게 결정을 맡기고 싶은 거다.물론 그 경우의 수에 뒤따르는 선택지는 몽땅 일탈로 말이다. 결코 선행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나도 수퍼빌런이 되어 세상의 모든 잣대를 뒤 엎어버릴 테다. 아, 그러면 안 된다고? 젠장, 결국 꿈이나 실컷 꾸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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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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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위아래가 사라져서 그런 거죠.

세상에는 중요한 게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사람 사이의 등급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게 기준이 되고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죠.”

<62 페이지 중에서>

 

 

치명적인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지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세상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장벽이 새로 생겼으니 온갖 특권과 호사를 누려가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면역자와, 좀비로의 변이를 막는 약을 먹으며 근근히 버티고 사는 보유자로 나뉘게 된다. 이들은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거주구역아 다른데 면역자들은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반해서 보유자들은 장벽을 통과할 때 삼엄한 감시와 검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차별과 착취가 당연시 되는 더러운 세상.

 

 

여기 네 사람이 등장한다. 구인제약은 보유자들이 먹는 약 휴머넥스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곳으로 그곳의 연구원이었던 세영은 기자인 여동생이 게임장에서 좀비들과 갇혀있다 총에 맞아 자 군복무 시절 상관이었던 전직 소령 명철에게 범인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명철이 세영의 여동생을 죽인 범인을 조사하던 중에 밝혀낸 진실은 정말 한숨과 분노 한가득 토하게 만들었다. 악랄하고 잔인한 어둠의 심연 앞에서 할 말이 없더라는.

 

 

아참, 그러고 보니 구인제약이라... 분명 구할 “구”자에 사람 “인”이겠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것 같은 회사명이지만 알고 보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보급용과 판매용 약의 효능을 달리해 보유자들을 마치 약쟁이 처럼 만들었으니까. 약이 없으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악용해 철저히 돈벌이 수단으로 즐길 따름이다. 이들은 필요하면 보건군(좀비 관련 부대)에게 좀비들을 납품하기도 한다. 보유자들의 시위진압이나 질서유지 시 최루가스를 살포하는 게 아니라 좀비 떼들을 풀어 무차별 살상하게 하는데 이건 뭐 백골단이 아니라 말 안 들으면 그냥 죽여도 좋다는 배짱인 셈이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가축 살 처분 하 듯 생매장 하는 대목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로 소름이 쫙 끼치기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바이러스 농도를 측정하는 알람밴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수진은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게 되자 딸 미나를 어찌 키워야 할지 생계가 막막해진다. 이에 반해 회사 사장 석호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서 의도치 않게 수진과 충돌하게 된다. 처음에는 각자 갈 길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진의 사정은 딱하다 못해 따스한 온정을 받지 못해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네 사람의 운명이 무섭게 파국으로 치달아서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좀비의 창궐로 인한 세기말적 현상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소재지만 좀비처럼 끈질긴 생명

력을 과시하며 계속 소설로 선보이고 있다. 좀비들을 피해 도망 다니거나 공격에 대항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거론하기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좀비가 등장함에 따른 시스템의 설계 변화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가 재미의 관건이 된다. 국내작가들은 그런 면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다. 구태의연한 설정에서 못 벗어난 재탕과 재탕의 연속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새롭기가 힘든 좀비물을 영리하게 변주해내는데 성공했다고 보여 진다. 속도감을 위해 불필요한 감상과 사족 같은 단어를 과감히 도려내어 꼭 필요한 전개과정만 보여 주고 신속히 넘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적으로 읽혀진다. 능숙한 솜씨다. 이쯤해서 멈추겠거니 싶은 상황에서도 과감히 정면 돌파하여 액션의 쾌감을 남기는 지라 잠시도 주저함 없이 시원시원했다. 기존의 한국 장르소설들과는 다른 차별점을 느낄 수 있었기에 흡족했으며,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국내작가가 아닐까 한다. 늘 이런 만남이 징검다리라는 게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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