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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
시라이시 가오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나와 그녀의 머리 없는 시체>는 상당히 오묘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다 읽고 나면 확실히 그런 감각에 전신을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오전 6시. 공기는 맑고 상쾌할 그 시간에 도쿄 시부야역 주변의 하치 동상 앞을 시라이시 가오루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손에 든 편의점 봉지에는 그녀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머리를 스윽 꺼내서 조심스럽게 동상 앞에 놓아두고 지하철을 타려 한다. 이윽고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하치 동상은 실재하는 명소다. 책과 영화로도 나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충견의 실화에 나도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이 남자는 잘린 여자의 머리를 여기에 두는 것일까? 후속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탐정 노릇도 하는 모양인데 살인마가 어떻게 안면몰수 하고 당당히 주인공이 되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이 직접 여자의 머리를 잘라서 몸통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지 않은가. 늘 냉장고의 서늘한 냉기에 맞춰 몸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쓰는 중이란다.
이런 엽기 살인마 같은 남자가 의외로 낮에는 요쓰비시 상사의 건실한 신입사원으로 근무 중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나이는 20대 중반에다 입사 3년차로 아직 덜 다음어진 풋내기 같지만 명문대 출신에 비상한 두뇌와 기지를 발휘한다. 회사의 중요 프로젝트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절묘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순간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즉흥적, 직설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상사의 구박을 많이 받는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오버하지 말란 거지. 회사원으로서의 좌충우돌은 일본판 미생을 연상케 한다고 간주해도 무망하겠다.
그 어떤 가치관과 욕망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얼핏 봤을 때 차갑고 냉정한 사람 같다는 오해를 살수도 있지만 한 번 품었던 사람에 대한 애정은 끝까지 함께 가는 편이라 쉽게 변절하지도 않는 캐릭터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냉혹한 살인마일수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머리를 잘라 전시한 이유와 아무렇지 않게 후속편에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 윤리적 면죄부를 어떻게 설명하게 될 것인가가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데 과연 언제까지나 냉장고에 시체를 꽁꽁 숨겨둘 수 있겠는가? 얼릉 진실을 밝히라구, 나쁜 놈이 아니잖아. 일본경찰의 수사능력을 시험해서 어떤 떡밥을 회수하겠다는 걸까? 결국은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트릭 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지만 순전히 캐릭터의 개성만으로 온전히 미스터리를 해결하는데서 읽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은 이 캐릭터를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독특한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으니 읽어보시라. 시라이시 가오루는 살인마냐? 명탐정의 탄생이냐?
주인공인 시라이시 가오루 라는 이름은 소설의 성공에 따라 쓰게 된 작가의 필명이라는 점이 신선하다는 점 외에도 친구인 노다, 편의점 여자 알바생, 처음엔 잔소리 대마왕이었다가 점차 시라이시에게 마음을 여는 연상녀 사에구사실장(동시에 상사이기도) 같은 인물들의 관계가 다음 편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오피스 소설로서의 매력도 뛰어나서 짬짜면을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테니 이 시리즈를 놓치지 말자.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절단해 하치코 동상 앞에 안치했다.
서두에서부터 누차 설명했던 그대로.
그렇다면 머리를 잘라내고 남은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냉장고라는 설명 그대로,
냉장고 안을 비추는 조명에 새파란 피부를 내보이며
무릎을 접고 들어가 있는 그것.
그것은 머리통이 없는 여성의 나체였다. <70페이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