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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맨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재능은 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우리는 흔히 ‘운’이 없다고 말한다. 누구나 목표의식을 갖고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설계해나가기를 바라지만 그 결실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있다. 이럴 때는 운명을 ‘운’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세상은 부족한 담금질을 요행수로 대신하려 한다면서 채찍질을, 그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에겐 불굴의 의지를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오로지 피땀눈물에 의해서만 가동되지 않는다. 때론 우연을 ‘운’이라는 선물로 획득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 기름칠 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짐을 덜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삶은 어떠한가. 때는 1970년대,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루크 라인하트라는 정신과 의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성격을 바꾸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문제적 성격들엔 신선한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안겨주고 싶었으나 정작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남들은 루크의 유복한 가정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부와 지위 등에 부러움을 표시하지만 순탄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진저리 친다. 분명히 권태기였다. 사는 게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배가 불러 출산하고도 남을 복에 겨워서 그렇다며 충분히 비난할 만 하다. 왜 참지를 못하니, 왜 극복하지를 못하니.
어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삶의 모든 결정은 주사위에게 맡기면 어떨까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너무 즉흥적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 아니라 주사위의 경우의 수가 가진 각각의 확률에 대해선 수학적 고민이나 분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겠단 의도였다. 주사위 신에게 귀의하나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묻거나 따지지 말고 종으로서 충심을 다해 이행하겠나이다. 육면체니까 6가지 경우의 수만 미리 정해두면 된다. 주사위를 굴러 해당되는 번호가나온다면 그대로 간다.
물론 첫 시도에선 주저한 적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동료의사의 아내를 강제로 범하라는 결정이 나오자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한 번 눈 질끈 감고 밀어붙였더니 그 뒤부터는 양심과 윤리 따위는 전혀 장벽이 되지 않더라. 이제부터는 파죽지세로 모든 선택은 주사위 신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그에게 등을 돌린다. 누가 봐도 미쳤다고, 광기에 탐닉 당했다면서 무법과 일탈에 빠진 루크는 더욱 주사위 신에게 집착한다. 루크는 다이스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제부터 사상 최강의 수퍼빌런이다. 그 결정의 결과가 살인이든 강간이든 개의치 않겠단다.
그래서 <다이스맨>은 본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을 운에 맡겼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맹신하는 한 남자의 기행담이다. 끝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선택에 대한 도덕적 가치관을 통렬히 전복시킨다. 주사위가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처럼 애초에 경우의 수를 올바르게 활용했다면 이렇게 죄악시 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선악과 공명정대함의 잣대를 들이대기엔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 이 소설의 창의성을 모방해 똑같이 행동할지도 모르겠지만 억압된 개인의지를 방목했다는 데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내 삶도 날마다 권태로워서 상상 속에서나마 루크처럼 주사위 신에게 결정을 맡기고 싶은 거다.물론 그 경우의 수에 뒤따르는 선택지는 몽땅 일탈로 말이다. 결코 선행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나도 수퍼빌런이 되어 세상의 모든 잣대를 뒤 엎어버릴 테다. 아, 그러면 안 된다고? 젠장, 결국 꿈이나 실컷 꾸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