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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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위아래가 사라져서 그런 거죠.

세상에는 중요한 게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사람 사이의 등급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게 기준이 되고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죠.”

<62 페이지 중에서>

 

 

치명적인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지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세상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장벽이 새로 생겼으니 온갖 특권과 호사를 누려가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면역자와, 좀비로의 변이를 막는 약을 먹으며 근근히 버티고 사는 보유자로 나뉘게 된다. 이들은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거주구역아 다른데 면역자들은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반해서 보유자들은 장벽을 통과할 때 삼엄한 감시와 검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차별과 착취가 당연시 되는 더러운 세상.

 

 

여기 네 사람이 등장한다. 구인제약은 보유자들이 먹는 약 휴머넥스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곳으로 그곳의 연구원이었던 세영은 기자인 여동생이 게임장에서 좀비들과 갇혀있다 총에 맞아 자 군복무 시절 상관이었던 전직 소령 명철에게 범인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명철이 세영의 여동생을 죽인 범인을 조사하던 중에 밝혀낸 진실은 정말 한숨과 분노 한가득 토하게 만들었다. 악랄하고 잔인한 어둠의 심연 앞에서 할 말이 없더라는.

 

 

아참, 그러고 보니 구인제약이라... 분명 구할 자에 사람 이겠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것 같은 회사명이지만 알고 보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보급용과 판매용 약의 효능을 달리해 보유자들을 마치 약쟁이 처럼 만들었으니까. 약이 없으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악용해 철저히 돈벌이 수단으로 즐길 따름이다. 이들은 필요하면 보건군(좀비 관련 부대)에게 좀비들을 납품하기도 한다. 보유자들의 시위진압이나 질서유지 시 최루가스를 살포하는 게 아니라 좀비 떼들을 풀어 무차별 살상하게 하는데 이건 뭐 백골단이 아니라 말 안 들으면 그냥 죽여도 좋다는 배짱인 셈이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가축 살 처분 하 듯 생매장 하는 대목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로 소름이 쫙 끼치기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바이러스 농도를 측정하는 알람밴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수진은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게 되자 딸 미나를 어찌 키워야 할지 생계가 막막해진다. 이에 반해 회사 사장 석호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서 의도치 않게 수진과 충돌하게 된다. 처음에는 각자 갈 길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진의 사정은 딱하다 못해 따스한 온정을 받지 못해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네 사람의 운명이 무섭게 파국으로 치달아서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좀비의 창궐로 인한 세기말적 현상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소재지만 좀비처럼 끈질긴 생명

력을 과시하며 계속 소설로 선보이고 있다. 좀비들을 피해 도망 다니거나 공격에 대항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거론하기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좀비가 등장함에 따른 시스템의 설계 변화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가 재미의 관건이 된다. 국내작가들은 그런 면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다. 구태의연한 설정에서 못 벗어난 재탕과 재탕의 연속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새롭기가 힘든 좀비물을 영리하게 변주해내는데 성공했다고 보여 진다. 속도감을 위해 불필요한 감상과 사족 같은 단어를 과감히 도려내어 꼭 필요한 전개과정만 보여 주고 신속히 넘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적으로 읽혀진다. 능숙한 솜씨다. 이쯤해서 멈추겠거니 싶은 상황에서도 과감히 정면 돌파하여 액션의 쾌감을 남기는 지라 잠시도 주저함 없이 시원시원했다. 기존의 한국 장르소설들과는 다른 차별점을 느낄 수 있었기에 흡족했으며,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국내작가가 아닐까 한다. 늘 이런 만남이 징검다리라는 게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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