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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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는 고양이를 단 한 번도 키워본 적 없다. 반려동물이라고 하면 언제나 개를 먼저 떠올리게 되고 소설과 영화로도 개를 가장 쉽게 접하곤 했다. 실제로도 개를 키운 적도 있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양이가 등장하는 소설과 영화가 부쩍 늘어난 것 같고 직접 감상하게 된 경우가 꽤 된다. 아마도 굳이 개가 아니더라도 인간과 고양이 사이를 잇는 외로움이란 단어가 필시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여기 도쿄 변두리 아오메 강에는 네코스테 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 인근에 조성된 물류촌의 창고에는 쥐 퇴치용 고양이들이 많이 길러졌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버린다.’는 의미의 네코스테가 은어처럼 사용되었다. 물론 실제로 버려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고양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번창해서 신식 창고가 생기는 현상을 도둑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곳에서는 고양이들의 집회가 종종 열린다. 집고양이든 길고양이든 상관없이 평등하게 참여 가능한 집회로서 고양이의 관련된 주제라면 토의가 벌어지지만 특별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단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가장 먼저 등장한 요시오는 인간 여자인 사오리와 자신이 연인사이라고 착각하여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려다 이 강에 빠져떠내려가다 간신히 구조 된다.

 

 

나중에 자신의 몰골을 보고서 인간 남자가 아니라 고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인간과 고양이 사이의 교감은 말이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과 함께 하고 사랑받고 싶은 고양이의 외로운 마음이 만나 서로를 필요로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고양이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진 고양이와 이름이 없는 길고양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란 고민도 따지고 보면 쓰잘 데 없는 도돌이표 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인간을 신뢰하지 않던 고양이도 딱 한 사람만큼은 의지하거나, 인간으로부터 사료를 제공받지 않아도 자유로운 객체로서 주거의 자유가 있는 고양이라면 속박 받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과 공생하는 집고양이들의 사연에 더 눈길이 간다. 연작단편처럼 각 단편마다 이어지는 인연들을 따라가면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서로의 빈곳을 채우며,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가기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인간의 행복과 고양이의 행복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서 체온을 느낄 정도로 꼬옥 안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화는 또 어떤 감성으로 다가올까? 작가와의 대담은 그런 만큼 호기심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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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괴물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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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로 공전의 히트를 거둔 스미노 요루 작가의 세 번째 소설 <밤의 괴물>이 나왔다. 이제는 청소년 라이트노벨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것일까 할 정도로 이번에도 그 세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게다가 왕따를 소재로 했다면 조금은 식상하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염려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어느 날 원인불명으로 괴물이 된 소년 앗치가 등장하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나 혼자 있으면 눈에서부터 검은 알갱이가 눈물 한 방울처럼 떨어지더니 이윽고 양쪽 눈에서 쏟아지면서 전신을 덮고 흘러내려 뒤덮어 나간다. 검은 색 말고는 색깔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물괴가 되어버렸는데 아직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잠들어 있을 뿐이어서 밖으로 나가 동네 개도 위협하는 재미에 맛들렸나 보다.

 

이제 밤의 학교로 까지 가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교실에 누군가가 있다. 누구지? 학교에 놔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간 이유라도 있으면 납득하겠으나 대체 같은 반의 왕따 소녀 야노가 왜 있을까, 놀러왔다는구나. 이 야심한 시각에. 그 말이 왜 그리 슬프게 들리는지. 낮의 학교는 야노에게 암묵적인 합의에 의한 무차별 왕따 당하고 있어서 차라리 혼자 있는 밤이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야노는 참 이상한 아이다. 이유 없이 반 아이 중 누군가를 콕집어 괴롭힌다. 그것 때문에 반 아이들은 단죄라는 명목으로 집요하게 야노를 괴롭히고 왕따 시킨 것이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도 모르겠고 그렇게 당하고도 그냥 웃고 만다. 아야 하면 그만.

 

하필이면 그렇게 눈치도 없고 무신경한 야노에게 괴물의 모습과 정체를 들키고 말았을까, 야노는 그런 앗치를 경이의 시선으로 대하면서 정체를 까발리지 않으며 낮에도 밤에도 앗치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었다. 사실 낮의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도 있지만 무심코 편들었다가 같이 당하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며 조종하는 아이도 있어서 앗치는 진짜 괴물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에 빠져버린다.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어른들이 이들의 세계에 개입하여 조정하기를 교묘히 거부하는 아이들 때문에 침묵하게 된 어른들, 그래서 아이들을 마냥 순수한 심성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거 같다. 어른들 못지않게 어쩌면 오히려 더 악랄하고 교활하다고 판단될지도 모를 이들의 세계에는 잘못을 두려움으로, 질서를 깨뜨리면 제재를 가한다는 자신들만의 순화방식이 존재한다. 선악의 결정과 판단에 대한 공감을 보류하고서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또 있을 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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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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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책을 두고 인생소설이라고 까지 말한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분명히 내가 선호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부산을 배경으로 한 건달들 이야기가 뭐 그리 잼날까 싶기도 했다. 단지 허세일 뿐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으면서도 그 입소문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해 볼까 해서 무심히 펴들었다가 그때부터 제대로 된통 맞은 격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부산 변두리의 구암 바닷가와 그곳의 만리장 호텔로 잡혀있다. 구암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영도와도 가깝고 남부민동과 완월동과도 가깝다고 설명되고 있어서 송도 정도면 어떨까란 상상도 해보게 된다. 그곳에 살고 있는 희수는 마흔 살에 지금은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자 구암 건달의 중간 보스 정도에 해당되고 구암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손영감의 가장 확실한 꼬붕이기도 하다.

 

 

소싯적은 한 가닥 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건달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구암 바다를 지긋지긋 해하면서도 정작 떠날 곳이 없어 눌러앉아 있는 형국이다. 첫사랑 인숙과 그녀의 아들 아미와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는 동안 구암 바다를 호시탐탐 노리는 영도 지역의 건달들의 위협에다 내부적으로도 지역 상권의 이권다툼에 이 곳은 잠시도 바람 잘 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희수의 보스인 손영감은 건달이 양복을 입고 다니면 눈에 띄어 잡혀 들어가기 쉽다면서 건달다운 복장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웬만해선 안팎의 도전과 갈등에 전면대응 하기보다는 협상과 관망자세로 가늘고 길게 조직생활을 하며 구암 바다를 오래 동안 지배하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수습은 늘 희수의 몫이었고 최대한 몸을 사리려 해도 승냥이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기에 그의 일생이 시한폭탄 같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강호의 정의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되었으니 제 아무리 처신을 잘한다 해도 비정한 조직 간의 암투는 음모와 피비린내는 사지로 내몰고 있어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개개인의 발악이 참 싸하더란 말이다. 배신과 회유는 종이 한 장 차이. 어떤 영달을 바란다고 이토록 처절하고 잔인하게 비수를 꽂아대는지 읽는 내내 가슴이 얼얼했고 머리엔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든다.

 

 

그 생존본능 앞에서 뜨거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고 책은 이미 브레이크 풀린 논스톱의 고속열차였으니 그 피바람 속에서 정리되는 인연과 끈질기게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결연한 의지마저 목도하게 된다.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어쩔 수없이 겪어야 했을 이별과 상실감에 눈 질끈 감게 되면서도 살아남으라.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한 순간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후반이야말로 압권이었다. 진정한 느와르를 뒤늦게 만났다는 후회와 함께 필력과 흡입력의 어떤 합일된 경지를 만나 진정 행복한 소설이구나. 진짜로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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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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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재의 인연이 미래에 어떤 관계로 귀결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고교시절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카라는 네 소녀가 전학 온 노리코라는 소녀에게 친구로서 손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순수한 우정의 발현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처음엔 소중했다. 노리코는 그 누구보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고 누구든 불법을 저지르는 이가 있으면 신고만이 정의의 실현인양 가차 없었다.

 

 

버스에서 치한에게 당할 뻔 했던 가즈키를 구하는 등 노리코의 용기 있는 행동들은 귀감이 되었으며, 신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리코의 신고정신은 도가 지나쳐 그 어떤 공감과 배려보다는 오로지 흑과 백의 논리에 사로잡혀 네 친구들을 악몽으로 내몰면서 각자의 가슴 속에 증오와 원한의 싹을 피워버렸고 마침내 네 친구들은 노리코를 살해해버린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완전범죄를 꿈꾸었던 네 친구에게 동시에 도착한 초대장. 뜻밖에도 5년 전에 자신들이 죽였던 노리코로부터 날아온 초대장이었다. 그녀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경악하게 되고 정말 노리코가 보낸 초대장인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약속장소로 함께 가는데...

 

 

오직 정의실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황홀한 표정을 짓던 노리코를 읽으면 굉장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묘한 기분을 나도 느껴야만 했다. 성적 쾌감에 몸부림치는 그녀만의 에로티시즘 같달까, 어떠한 원인과 사정도 배제시킨 채, 정의와 불의라는 2가지 공식만 입력된 인공지능 같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융통성 없이 숨통 조여 가며 살 수 있나. 팍팍하니 적당히 넘어갈 건 그렇게 하자 싶다가도 어쩌면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얼렁뚱땅 처리해버렸던 우리들의 일상적인 태도야말로 불의를 만연시킨 주범일지도 모르겠다는 자각도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어디까지가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인가 묻는다면 그 또한 정답이 없다란 반론도 당연히 들게 된다.

 

 

그래서 초대장의 진의는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다른 식의 결말 유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스스로 정의롭다고 자부하던 노리코의 완벽할 것 같은 신념과 논리에도 모순이 있음을 역공으로 되받아치는 것 말이다. 난공불락이라는 결집체에 발생한 빈틈이 점차 켜지면서 마침내 거대함이 무너지는 순간, 그 누구도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면 내로남불이란 이럴 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예상대로 흘러간 결말이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아니면 리카랑 노리코를 한 방에 같이 때려 넣는다거나. 실험 연구 자료로 충분히 흥미롭지 않은가? 집착이라는 두 화신이 만난다면 좋겠다.

 

 

그리고 앞서 읽었던 <성모>에서도 불임에 따른 인공수정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더니 이번에도 등장인물 중 한 명도 그런 상황으로 설정한 것 보면 집요하다거나 예사롭지 않은 작가인 것도 같다. 마치 <살인출산>의 무라타 사야카가 임신과 출산의 상관관계에 특화되어 유사한 사례 같다는. 두 작가는 서로를 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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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소설가 - 대충 쓴 척했지만 실은 정성껏 한 답
최민석 지음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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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구나 고민을 안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고민이 너무 많아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마음이 늘 무겁다. 주변에서도 미리 걱정하는 타입이라고 할 정도니까. 그럴 때마다 대놓고 항변은 못하면서 문제발생에 미리 대비해서 나중에 큰 화근이 될지도 모를 싹을 미리 잘라두는 게 뭐가 나쁘냐며 속으로 삭히는 편이다.

 

 

그렇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 자연스레 해결된 것도 같고. 내 능력으로 부딪혀서 해결된 것도 같고. 또 그냥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불안에 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소설가 최민석이 들려주는 고민상담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해답이라기보다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해석일지, 시간만이 약이라는 식의 해석인지는 읽고서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민석 작가도 처음과는 달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이 마흔에 접어들면서 2,30대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가능한한 열심히 답변해주기로 말이다. 처음엔 마냥 똥폼 잡지 않고 나름 유머를 곁들여 가며 편안하게 자신의 견해를 읽어주기로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해진 듯하다.

 

 

꾸준히 자신의 책 홍보에도 열심이다. 은근슬쩍이 아니라 이건 대놓고 책 좀 사주십시오. 읽어주십시오. 지루해서 수면제로는 딱이랬다가 재밌고 유익하다며 태세 변환하는 작가의 익살을 어찌 미워할까. 오히려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 아무렴 어때. 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깨에서 힘을 빼라는 거다.

 

 

결국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일찍부터 고민하는 청춘에겐자신만의 인장이 필요하다는 말이 쉽지는 않겠지만 참 멋지게 다가온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이런 저런 길은 있더라는 식의 참고서 역할만을 작가에게서 얻어내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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