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환상문학전집 30
아서 C. 클라크 지음, 고호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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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는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과학소설의 3’로 불리는 명실상부한 과학소설의 거장으로 출중한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미래를 철학적인 세계관으로 접근하는 관점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작가보다 오히려 미래를 족집게 같이 예언한 미레학자로 더 유명하고 현재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인터넷, 통신 위성, 우주 정거장 같은 것들 모두 작품에서 미리 예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작두 타는 무당 정도로 오해해선 곤란하지. 아서 클라크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날카로운 통찰력에 있다고 한다. 아서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가장 유명하지만 평소 그의 작품들을 쉽게 접할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닌데 시대 순으로 발간된 단편 전집은 우주여행의 시작부터 최고 정점에 이른 후대까지 순서대로 즐기면 된다는 이점이 있고 우주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위트와 진한 감수성이 한데 섞여 진국을 자랑한다. 물론 단편별로 각기 다른 개성을 선보여 이해정도도 천차만별이지만 이거야말로 진정한 과학소설의 표본임은 구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야. 퐈이야!!

 

<백일몽>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상상력이나 더 적은 상상력이 아니다. 상상력 그 자체다.”라는 멋진 명언을 작가는 남긴다. 절대 공감이다. 어디 과학소설에서만 통용되는 명언일까? 세상의 모든 대중문화가 개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튀는 것만 좆을 때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은 없노라는 명제는 진짜 중요한 것은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창작 대신 변형된 산물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기존작에 아이디어만 더 해도 혁신은 가능하다. 그것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뼛속 깊이 재밌는 단편은 1937년에 발표된 <유선전송>이 되겠다. 이해도 쉽거니와 유머에 대한 공감도 놀랄 만큼 일치한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수차례 실험의 장고를 거듭한 끝에 세계최초의 유선전송장치를 개발해내는데 성공한다. 이제 이 기술은 돈벌이 사업으로 이용되는데 처음에 사람을, 이후에는 하루에 수천 톤의 화물을 전송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이다. 신간 구입 시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온라인에서 결제 즉시 바로 책을 받아보게 되는 기쁨 두 배의 혁신이 될 터인데 실제로 이 기술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면 택배아저씨는 더 이상 볼일이 없겠지. 또한 이 시스템은 여러 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고루 보여주시는데 차량이동이 줄어드니 교통사고 사망자도 덩달아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지만 사람을 전송하던 중에 택배 분실처럼 600만명 중에 한 명 꼴로 실종되는 치명적 오류도 있으니 무조건적인 맹신은 금물일 듯싶다. 때때로 회로의 저항이 높아져 전송 고중 승객의 몸무게가 빠지는 기상천외한 결과도 나와 뚱뚱한 사람들의 다이어트용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수록작들 모두 맘에 든다. 고립된 우주공간에서의 고독함부터 외계문명에서 바라보는 우매한 인간세상까지, 이 모든 것이 상상력의 극대화가 이루어낸 산물이다. 그 누가 감히 예측하겠는가? 소설 속의 상상물들이 미래에 현실로 탄생할지 말이다.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과학발전에 지대한 영감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기술의 폐해 또한 잊지 않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앞만 보고 달리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아량마저 품에 넉넉히 안는 아서 클라크의 현명함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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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박성신 지음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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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의 책을 펼치면 우선 갤럭시탭-텍스토어 디지털 콘덴츠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란 경력부터가 눈길을 끈다. 생소한 공모전인지라 인터넷으로도 검색해보지만 신인작가들의 등용문 중 한 루트 정도로만 인지했고 더 이상 상세한 파악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근데 이 책은 징하다. “자수성가한 주인공이 30년 만에 아버지를 찾았지만 그는 가짜 아버지였고, 또 다른 가족들 간에 숨겨진 진실들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싶었다.”라는 것이 박성신 작가의 수상소감에서 그 느낌이 비롯된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족을 원하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주인공 민재는 고아원에서 자라 파양의 아픈 과정을 겪으며 누구보다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자수성가 한 것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갖가지 비리와 추악한 비행으로 성공이라는 열매를 거머쥔 위선적인 인물로 그의 열등감을 채워줄 마지막 퍼즐은 바로 가족이다. 아름다운 아내 혜리와 수빈이 있지만 부모의 부재는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할 필수조건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TV에 출연해서 헤어진 부모를 찾게 되고 30년 만에 만난 아버지 대도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만 민재에게는 가족 구성원의 결원을 충족하는데 만족한다.

 

이제 이 가족은 행복할 것이다. 아니 행복해야만 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남부러울 것 없을 것처럼 보이던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은 균열이 서서히 진행된다. 민재는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양심을 저버린 댓가로 협박받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사로 그들로부터 또 다른 위협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혜리 또한 민재의 친구이자 부하직원인 상우의 집착에 시달리고 있으며 아들 수빈이 조차 아무 조건 없이 사랑으로만 키우기엔 출생의 의혹이 드러나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고름이 곪아 악취가 진동하지만 정작 냄새는 맡지 못하고 대화의 부재 속에 서로의 가슴에 불신의 싹을 크게 키우기만 한다.

 

정작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정작 민재의 아버지 대도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민재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믿기지 않는 진실이다. 그는 30년 전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연쇄살인마 드라이버 살인마였던 것이다. 어려서 엄마의 사랑도 못 받고 외간남자로부터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다 우발적으로 그 남자를 살해 후 불륜남녀들만 표적삼아 드라이버로 살해하는 최악의 범죄자로 성장하게 되지만 세월이 흘러 공소시효 만료로 자유의 몸이 된다.

 

민재도 그랬지만 대도 또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살아생전 꼭 들어가고 싶은 구역이었다. 어떤 범죄자에도 가족은 반드시 소중하고 이루고 싶은 마지막 보루라는 소망을 상기시키며 서로의 필요에 의해 대도는 민재의 친 아버지로 위장 접근하여 한 가족이 된다. 모래성같이 위태위태한 이 가정은 예감대로 비극으로 침몰하지만 대도의 가족에 대한 간절한 집착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모두가 일터에서 매일 출근했다 퇴근하여 삶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곳에는 가족들이 있지만 급격한 현대화와 산업화 속에 전통적인 가치관이 변질되고 핵가족화가 대세로 자리 잡은 요즘에는 각 가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도 없고 실제로 관심도 없다. 가내 두루 평안 할까? 아니면 누군가는 폭력을 휘두르고 거기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되고, 또 누군가는 불륜을 저지르고.... 그 어떤 추악한 위선과 악행 등이 가족들을 병들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재의 바람대로 대도의 바람대로 외부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일이 우리 모두가 거부하기 힘든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해 파멸로만 치닫는 이들의 모습은 안타까움과 함께 산소 같은 가정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준 것 같다. 단지 챕터별로 이야기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해 단절되는 점이 눈에 상당히 거슬리기는 하지만 독자의 공감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은 이 소설에 대해 무난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 순간 통영의 여아 살해범이 문득 떠오른다. 그에게는 베트남 출신의 아내가 있고 세 딸이 있다. 저도 자식이 있으면서 왜 그런 짓을 했느냐면 울부짖는 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금수만도 못 한 그자에게 가족이란 어떠한 의미일지 그 내면의 심리가 궁금하다. 남의 가정을 파괴한 살인마를 아버지로 둔 세 딸들이 세상의 냉대와 비난 속에 헤쳐나아가야 할 가혹한 현실은 고달프다 못해 일생을 두고 떠나지 않을 악몽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런 자를 아버지로 둔 게 죄라면 죄라고 누군가는 단정 짓겠지만 피해자의 가족과 가해자의 가족은 나란히 달리는 열차 선로처럼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그 누가 대신 어루만져 달래 줄 것인가? 그래서 가족이라는 숙명은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이다. 마음대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그래서 슬프다. 민재의 가족과 통영 살해범의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모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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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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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라인에서 개인정보를 너무 많이 풀어놓고 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폭염주의보에 열대야 현상으로 많은 분들이 밤잠을 설치고 계신다. 찌는 무더위를 싹 가시게 만들 특효약으로 블록버스터 무비나 스릴러 소설 한 편이면 추천하기에 족할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제프리 디버의 신작 <도로변 십자가>의 등장은 오른 손에는 수박 한 조각을 든 상태에서 왼손을 채워줄 비밀병기로 기대하게 하는데 디버의 인터뷰에서도 확인가능 하듯이 이번 소설은 CBI 수사관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2탄이자 사이버스페이스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완결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메신저 등 사이버월드가 가진 어둠의 일면에 주목해 착안했다는 이번 사이버스페이스 3부작의 대미는 예상과 달리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와 절제된 책임에 대한 의무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익명성으로 보호받는 근거 없는 루머와 폭로, 그리고 바이러스처럼 번져가는 악플들로 확대되고, 현실과 가상세계 간 불분명한 혼돈, 이 모든 것에 편승한 현시욕이 범죄동기임이 밝혀지면서 사이버스페이스에 현대인들은 많은 애정과 관심을 몰두하면서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서투르고 메말라가는 인간관계의 책임에 새삼 통감하게 된다. 누구나 현실에서는 꿈꾸지 못했던 위선의 가면을 쓴 채, 뒤에 숨어 죄 없는 개구리에 돌을 던지고 절대적인 권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통치력을 뽐내기도 하면서 콤플렉스를 보상받고 응석받이로 대량 육성하는 이상한 세계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초래할 심각한 후유증에 대한 경고와 신랄한 비판의 메시지를 도로변 십자가 킬러의 살인예고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이 소설은 3부작 중 가장 현실적인,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잠재적 위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말이다. 제프리 디버가 누구이던가? 그만의 천재적 플롯과 충격적 반전은 한여름 냉동고에서 고드름 씹어 먹는 것 같은 짜릿함과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의심 속에서 허를 찌르는 트랩으로 타 작가와는 차별화된 재미를 전달하는 완소작가인 것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떠나 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소설들은 게임이라는 이름의 유희로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이 디버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처음으로 무패신화가 깨어지면서 디버 제국의 신화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것에서 열렬한 추종자로서 많은 아쉬움과 일말의 하탈감 마저 느낀다.

 

캐트린 댄스는 자타공인 동작학 전문가이다. 상대방의 표정과 눈짓, 손짓을 비롯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인 버릇과 습관 등에서 감춰진 의도와 속내를 캐치하여 범죄를 유추하는 것이 주특기인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가 상대해야 할 범인은 직접 대면 같은 오프라인 공간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이기 때문에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된다. 소재와 주인공의 주특기가 상극을 이루는 대표적인 케이스라 특유의 색깔과 향기를 상실한 채 힘을 잃고 지지부진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숨바꼭질 속에 범죄의 결과만이 드러날 뿐 범인의 심리 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전형적인 디버 스타일에서 한참 이탈해버린다.

 

자신만의 주특기를 살릴 수 없는 캐트린 댄스에게 가상공간에 대한 무지는 전문가의 초빙을 필요로 하게 되고 강습 받는 과정의 묘사는 흡사 해리 보슈가 후배 키즈민 라이더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대목이 오버랩 되면서 댄스와 보슈의 닮은꼴을 확인하게 되어 살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두 사람은 아날로그 수사의 아이콘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범인에 대한 단서 포착과 검거과정도 들여다보면 과학적, 논리적 근거 대신 우연이라는 개연성과 맞물려 단단하다고 생각되었던 매듭이 어느 순간 느슨하게 풀려있음을 눈치 채게 되는데 솔직히 개운치가 않다.

 

또한 이 장르의 재미를 결정짓는 요소를 어둠이 가진 악마성과 가공할 파급효과, 특유의 스킬에 중점을 둔다면 이 역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고 보여 진다. 3부작 중 전작들이 범인의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천재적인 장악력과 두뇌, 목적을 수행하는 강력한 스킬로 현실을 무시무시한 공포로 몰아넣는 혼돈까지 무엇 하나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던 밀도 높은 스토리와 현란한 스피드에서 압도적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물먹은 솜처럼 시종일관 무기력한 분위기가 팽배하고 심장의 박동 소리가 작다. 하다못해 1편의 악당 다니엘 펠 처럼 시종 악마 같은 심성에 몸서리치게 하는 등장 인물 조차 없으니 대체로 전작들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 넣었던 건 아닌지 안타까움마저 든다.

 

주인공의 주특기도 빛바래지고 악의 가공할 위력마저 상실하여 입체감 없이 모든 토끼들을 마구마구 놓쳐버린 아쉬움을 그나마 달래는 것은 캐트린 댄스와 그녀의 가족들 이야기이다. 전작에서 범인 다니엘 펠을 추적하다 안락사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던 수사요원 후안 밀라의 죽음을 두고 안락사를 시킨 용의자로 그녀의 어머니 이디 댄스가 지목되어 검거된다. 도로변 십자가 킬러 검거와 어머니의 무죄방면 해결이라는 양 극단의 갈림길에 놓인 댄스의 가혹한 처지는 결국 십자가 킬러 검거에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결단으로 이어지고 모녀간의 불편하고 섭섭한 오해로 맞물리면서 그녀의 고충은 점차 커져간다.

 

그녀의 미처 피지 못한 로맨스의 싹(?)도 아쉽기만 하다. 그동안 아들 눈치 땜에 변변한 연애조차 못한 댄스에게 자문교수인 조나단과의 업무적 만남은 의외로 그녀의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호의를 이끌어낸다. 특히 아들 웨스는 조나단과 많은 점에서 잘 통하면서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데 주위에서 생각하는 남녀관계와 당사자들이 보는 관점은 많이 다르나보다. 상호 간 인간적인 호감은 개인사의 아픔에 발목 잡혀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하지 못해 그냥 아무 일 없었듯이 끝나고 마는데 내 맘이 많이 안쓰럽더라. 괜찮은 남자인데.... 언젠가 그녀의 인연이 보린 듯이 등장해 재혼으로 이어져 아이들에게도 아버지라는 존재를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기찬의 또 한 번 사랑은 가고~~~~

 

그밖에도 그녀와 아이들, 부모님, 친구들까지 가족 구성원들의 단란한 일상은 물 흐르듯이 행복감과 일상의 편안을 가져다주면서 이런 것이 가족이라는 끈끈한 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좋았다. 비록 추리적 재미는 상당히 약하지만 디버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캐트린 댄스의 인간적인 매력을 캬라멜 마끼아또 처럼 생동감 있게 살려낸 깔끔함을 즐기면서 댄스 시리즈의 차기작 <XO>을 출간을 빌어본다. 디버에게 실망하기엔 그간 그에게 공들였던 내 진심이 아까워서라도 아직 이르다. 그래도 디버는 디버니까.

 

!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인데 디버는 혹시 한국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불편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엣지>에서는 한국의 다방문화를 소개하면서 차 배달하면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을 다방 아가씨라고 지칭한다고 언급해 놀라움과 찝찝함을 남기더니 이번 <도로변 십자가>에서는 온라인 게임에서 한 미국인 소년과 가상커플로 결혼한 여학생의 국적을 한국으로 또 한 번 지칭하는데 이 여학생도 공부 못하는 존재로 언급된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여성에 대한 의도적인 비하들일까? 아니면 단지 우연일 뿐 지나친 확대 해석을 경계해야 하나? 이상해!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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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마이클 코넬리 엮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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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릴 만큼 위대한 천재소설가.

코난 도일, 도스토예프스키, 보들레르 등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준 최초의 추리소설가. 죽기 전 며칠 동안 묘연한 행방으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그의 죽음. 솔직히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전무하고 생전 그의 작품들을 접해 본 적 없는 내게 <더 레이븐>은 포를 만날 수 없는 최초이자 마지막 부스가 되리란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했다.

 

내가 단편을 사랑하는 이유는 누누이 밝혔듯이 뷔페음식에 비유하면 되겠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일반식 메뉴는 호기심에 금전적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단점이 있지만 뷔페는 입맛대로 골라먹으면 된다. 물론 모든 뷔페 메뉴가 입맛에 맞진 않지만 그래도 기본 이상은 하기에 선호하는 것이고 이 책 또한 성찬이긴 하지만 몇몇 단편만으로도 충분히 제 값을 한다는 게 괜찮다.

 

그럼 어떠한 단편들이 내 감성을 제대로 자극하였을까? <검은 고양이>, <M 발데마 사건의 진실>, <고발하는 심장>, <함정과 진자>이 좋았다. 포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물줄기는 예외 없이 공포, 우울, 광기, 죽음, 고통 등 어둠의 요소들이 빼곡히 들어차 낮에 읽었을 때랑 심야에 읽었을 때 두려움이 확연히 배가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지금 언급한 단편들을 제외하고는 쉽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난해함은 끝내 극복하기 힘들었다.

 

<검은 고양이>는 바로 스티븐 킹의 <지옥에서 온 고양이>가 즉각적으로 연상될 정도로 두 작품은 닮아있다. 혹시 킹이 포에 대한 오마쥬로 만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고양이를 복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와 야만적인 공포를 한데 섞어 끔찍한 고양이 미스터리로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플루토에 비해 킹의 고양이가 더 능동적으로 업보를 집행한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M 발데마 사건의 진실>의 경우에는 죽음에 최면을 걸고자 한 실험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저열하고 광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변질되어 썩어 문드러진 발데마의 껍데기로 화하면서 가장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안락사도 인간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권리라는 깨달음이다. 편하고 싶다. 편하다.

 

<고발하는 심장>에서는 이웃집 노인을 살해하는 것에 명확한 동기가 없다.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살해하는데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할지,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지 구분 짓기 힘드나 정작 살인 이후 봉인되었던 양심이 봉인해제 되어 광기를 반성하게 한다는 결말은 상상력의 널뛰기로 장악된 섬뜩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다. 끝내 주는 이야기! <함정과 진자>는 시각적인 공포의 총합으로 영화 한 편을 보는듯한 서스펜스의 극치를 시전하다 역사적 근거에 의한 뜻밖의 결말로 마무리 짓는데 이 역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예상 밖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대단히 훌륭했다.

 

맘에 든 몇 편은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별로였고(모르그가의 살인, 황금벌레는 고문수준이다.) 다른 분들처럼 현존 추리작가들의 헌정 에세이가 오히려 더 쏠쏠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본 메뉴보다 디저트가 맛있는 실례란 이런 경우일 것이다. <시인>을 집필하는 여정을 언급한 마이클 코넬리의 에세이가 단연 갑이었고, 에세이 기고를 의뢰받고 처음엔 포의 작품들에 몰이해의 반응을 보였던 수 그래프턴은 일방적 찬사 일색의 에세이들 중에서도 발군의 웃음을 주면서 혼자 낄낄대며 읽어 내려갔다. 과감한 솔직함이 돋보였고 공포, 추리문학의 효시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에드거 상이 유래되었다는 사실 또한 첨 알게 되면서 나의 무지함에 언뜻 낯부끄럽기도 했으며, 첨 읽었다는 그의 단편들이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도 들면서 포를 위한 세계 유일무의 컬렉션은 그렇게 끝났다.

 

공감과 비 공감, 이해와 몰 이해의 경계점을 수시로 넘나들며 현대 추리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로와 족적들은 이 장르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자양분의 역할을 충실히 자임했었기에 오늘날 많은 독자층으로부터 사랑받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전은 언제나 어렵지만 고리타분하다며 외면할 수 없는 미래의 거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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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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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회와 진실의 빛 - 누쿠이 도쿠로

 

몇 개의 별이 쑥스럽다는 듯 반짝이는 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괜히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는 도입부, 도쿄의 한적한 변두리 어느 공터에서 한 여인의 사체가 발견된다. 피범벅으로 발견된 사체에는 집게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없다. 연이어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인의 살인예고가 인터넷에 게시되면서 세상은 그를 "손가락 수집가"로 부르게 된다. 그리고 예고했던 대로 희생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손가락이 없는 엽기살인이 발생하지만 이를 막지 못하는 수사당국에는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에 대한 각종 억측만 난무할 뿐 결정적 단서는 포착 못한 채, 혼선은 혼선을 낳고 분노와 자괴감만 늘어날 뿐이다.

 

<통곡>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누쿠이 도쿠로의 소설이었는데 솔직히 기막힌 반전이나 트릭은 기대치를 미치지는 못한다. 흔히 추리소설이 독자들에 주는 즐거움이라면 의외성에서 비롯된 어긋난 범인의 정체나 예측을 가볍게 뛰어넘는 트릭이나 사건의 진실 등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어느 것 하나 틀을 깨뜨리지 못하면서 통속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범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도 범인은 항상 가까이에 있는 주변인물 중 하나라는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기에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용의자 제외와 특정인물의 범인 지목은 어떠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추리소설에서의 범인들은 그냥 직감에 의해 정체를 눈치 챌 수가 있기 때문이 아닐지.. 그래서인지 이번 소설의 범인도 왜? 그여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유년시절의 불행한 기억의 편린들에서 기인했다는 점도 무난한 설정이라고 보면 된다.

정작 흥미를 끄는 요소는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 반전이나 트릭 같은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찰조직의 내부갈등과 개인사에 더 비중이 쏠린다. 수사권한을 두고 각 부서간의 권위와 자존심을 둘러싼 불협화음은 경직된 관료조직의 병폐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에 대한 조롱과 함께 별개로 개개인의 끊임없는 신경전과 반목은 범인 검거라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만 할 장애물이자 불편한 동거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심을 끌고 나가는 주축은 단연 사이조일 것이다. 다른 동료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기지와 판단력 등 뛰어난 수사적 재능으로 진급도 상대적으로 앞선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를 시샘하는 경쟁자들의 질투와 불행한 결혼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와 압박감 속에 많은 고충을 겪는다.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가 짙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 비유하면 적절할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완벽하고 똑똑한 사람이지만 이면에 가려진 인간적인 결함과 나약함은 누구나 완전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시켜준다.

 

결혼생활만 해도 그렇다. 애초에 아키호의 도도함과 억척스러움에 반해 일방적인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지만 남편을 단지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욕망의 도구로만 이용하려한 뼛속 깊은 아내의 속물근성에 힘들어하다 불륜에 이른 사이조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맘이 씁쓸해진다. 물론 그의 불륜 자체를 무조건 정당화할 생각은 없지만 결혼이라는 시스템을 두고 여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결혼관은 또 다르겠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진정 자신에게 어울리는 반려자 선택의 기준은 어떤 것인지 많은 고민을 던져준다.

 

인연을 먼저 만났더라면 행복했을 것 같은 사이조의 회한이 <후회와 진실의 빛>이 얘기하고자하는 그림자인 것 같다. 또한 두 번 다시 리셋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이조의 처지와 더불어 나만 잘났다는 유아독존적인 사고방식은 주위에 상처와 자신에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는 현실은 현명한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회와 진실의 빛>이 얘기하는 또 다른 숨은 교훈이다.

 

그래서 추리소설로서의 쾌감은 비록 덜하지만 주인공 사이조의 처신에서 무수한 동정과 연민, 반성을 촉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여운이 짙은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던 점이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렇기에 뒷 담화가 던져주는 그 미묘함은 누쿠이 도쿠로의 추리소설 <후회와 진실의 빛>를 읽고 나면 소주 한 잔 털어놓고 싶은 씁쓸함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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