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으로 가는 길, 좀비를 만나다 - 제2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1
황태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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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이란 장르 자체가 장르문학에 관해선 열악하고 척박한 국내현실을 감안한다면 보편적으로 인지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 싶다. 이번처럼 <아버지들의 죄>와 함께 우수 서평자에게 증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더군다나 한국형 좀비소설이라니 생경하지 않은가? ! 그렇다, 상반기 중에 <웜 바디스>로 생애 최초의 좀비소설을 이미 접한 적이 있었지. 당시에는 좀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발상 자체가 신선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읽는 좀비문학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1회 당선작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2회 당선작과의 비교는 불가할 터이고 해외 좀비물들은 영상으로도 그렇고 <웜 바디스>의 경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을 닮아가는 좀비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반해 이번 당선작들은 한국사회의 내부에서 빚어지는 계급구조의 파생적 변화와 갈등 등이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좀비와 인간과의 대결구도 같은 액션 시퀸스가 아니라 고립된 공간과 심리에 분열을 꾀하는 장기말 같은 도구로 좀비가 활용되고 있어 다분히 정적인 기운이 강한 것도 이채롭기는 하다. 그래서 좀비보다 더 두렵고 끔찍한 존재는 인간 그 자체라는 메시지도 여전히 유효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옥상으로 가는 길>

좀비들이 도심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한 4층 건물에 일곱 남녀가 고립되어 있다. 외부에서 좀비들이 건물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면서 이들은 한 번씩 옥상에다 헬기로 공수하는 비상식량에 명줄을 부지하고 있는 현실, 식량을 둘러 싼 독점과 분배문제가 불거지면서 작은 신체를이용하여 유일하게 좁은 통로를 드나들며 식량을 내부로 공수하는 성국, 그에게 빌붙어 얻어먹으려는 사람들, 성국이 식량을 빼돌리지는 않는지 의심하는 종수와 그의 연인 희원, 나중에 좀비를 피해 건물내부로 피신한 모자까지 각자의 처지에 따라 관계를 맺었다가 끊기도 하면서 계급과 권력의 서열이 돌고 돌아 쳇바퀴를 돌기 시작한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그들에 의해 인간군상의 변화가 보여지면서 한정된 공간이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평상시에는 핸디캡이 되었을 성국의 왜소증이 작금에 와서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권력서열을 역전시킨다는 설정도 다분히 재치 있는 도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다는 설정만큼은 여전히 씁쓸하면서도 기억의 단면에 획을 긋고 끝낸다. 수록작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었다.

 

<연구소 B의 침묵>은 좀비물로써 보편적인 취향과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일 것 같다. 다른 수록작들이 좀비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내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이 작품만큼은 좀비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요리재료로 삼고 있다, 친구라는 관계와 그 속에 잠재해 있는 콤플렉스, 오만함, 이해 타산적 처신 등에다 남녀 간의 삼각관계를 접목해서 삐뚤어진 집착과 광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데 자신을 실험도구로 삼아 좀비 테스트를 시험하는 과정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라는 자문자답에 일침을 놓는다. 인간과 좀비의 경계를 이슬아슬 하게 넘나드는 두 남자의 시도는 그래서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호불호가 엇갈릴 듯하다. 무모하거나 신나거나.....

 

그 밖에 <나에게 묻지 마><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닥 인상적인 작품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에게 묻지 마>는 좀비의 창궐을 도시가 아니라 농촌으로 옮겨 구제역과 교묘히 엮은 아이디어 자체는 신선했지만 스토리의 흐름이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얼개가 느슨해지고 장황한 맛이 있어 아쉬웠고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냥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순애보에 그쳐 왜 좀비물로 차용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평범하고 단순했다. 선정작 중 하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흡사 별이 빛나지 않고 지는 밤의 분위기에 모든 것이 고즈넉이 가라 앉아 바닥을 쳐 버린다.

 

그렇게 해서 한국형 좀비문학의 현 주소를 과감 없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좋은 착상을 끝까지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 속에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었으니 해외 좀비문학과는 차별화된 고유의 색깔들을 잘 살려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국 좀비문학의 소재적, 주제적 한계는 어디까지 가능한지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고 그 점에 대해서는 작가들의 고민이 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좀비 자체를 무대의 중앙으로 불러내어 한 바탕 풍악을 울리는 화끈한 소동극도 만나봤으면 한다. 금기와 영역을 극복한 보다 역동적인 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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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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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추리작가협회의 그랜드 마스터 로렌스 블록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AHMM)>에서 창간 5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했던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에서 처음으로 작품세계를 접한 적이 있었다. 볼록의 초기단편으로 <쇼핑백을 든 아줌마>라는 짧지만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탐정 스커더(매튜가 아니라 조라는 이름이었다)가 살해된 한 노숙자 아줌마로부터 뜬금없이 유산 일부를 물려받게 되자, 그냥 수혜받기가 꺼림칙해서 살인범을 찾아나선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범인을 잡고 보니 범행 동기 자체는 보잘 것 없었는데 유산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섬이 아닌지도 모르고, 누구나 다 섬인지도 모른다.”는 책 속 구절처럼 산다는 것 자체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진정한 데뷔작 <아버지들의 죄>로 본격적인 블록 월드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민완경찰이었지만 은퇴한 사립탐정 매튜 스커더에게 한 중년남자의 의뢰가 들어온다. 그 남자의 딸 웬디라는 여성이 살해되고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동거남 리처드 밴더폴로 피를 뒤집어 쓴 채 사건현장 근처에 있다가 체포된다. 하지만 리처드 밴더폴은 수감 중 곧 자살해버리고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려는 즈음에 딸의 죽기 전 행적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매튜 스커더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은 명백히 밝혀졌고 더 이상의 조사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닫힌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입장을 거절 못하고 수임을 맡기로 한다.

 

사건조사를 시작한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은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끈질기다’... 아니, 그냥 끈질긴 사람으로 부르는 편이 좋겠다는 매튜 스커더의 가상 인터뷰대로 별 다른 단서나 정황을 찾기 어려워보였던 사건의 내막의 꺼풀을 벗겨낸 것은 역시 그의 장기인 적당한 타협과 거래, 윽박, 내면의 심리를 응시하는 거울로 변신하자 이야기의 흐름은 조용한 끈기 앞에 백기를 들고 속살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내가 상상했던 거랑 달리 결코 정도만을 추구하는 고지식함은 없었다. 자신에게 흉기를 들어 위협하던 남자에게 가한 응징을 보라! 그에게서 돈도 뺏고 보복 차원에서 손가락도 부러뜨린다. 냉혹하면서도 실리도 고려할 줄 아는 매튜 스커더의 사실적인 면들은 이 시리즈가 뒤로 나아가면 갈수록 믿음을 고조시킬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하는 것이고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더라도 등장인물의 대화에서는 인장을 찍듯 마음 한 구석을 꾹꾹 눌러 담는 힘이 있다. 그 우아함이란 최근의 추리소설들이 시각적인 쾌감에 치중할 때 정서적인 성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기에 많은 독자들과 작가들이 추종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뛰어난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를 들자면 스커더가 이야기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법의 사각지대를 빠져나간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자신의 방식대로 처단했던 과거사를 털어놓는 대목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심경고백 차원이 아니라 웬디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눈치 챈 그가 마지막에 선택하게 될 집행방식이라는 복선을 암시하고 있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미처 표현 못했던 감탄을 뒤늦게라도 하게 된다. 다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점...

 

그렇다면 책의 제목과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인가? 지켜주든가 아니면 죽이든가라는 구절은 어쩌면 시대가 변하면서 위상도 달라지고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족들에게, 그 중에서도 아들과 딸에게는 어떠한 존재와 역할로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만드는데 탁월한 주제요, 난제다. 최근 독거로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인수를 자식들이 거부했다던 뉴스를 인터넷에서 보고 분노하며 탄식했던 내게는 <아버지들의 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이지 않게 연결하는 통로이자 참을 수 없는 아픔이다. 왜 이다지도 슬픈지? 결코 외면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 숙연해지고 반성하게 할 누아르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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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 메두사 컬렉션 2
제프리 디버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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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릴러 작가를 2명 정도 꼽는다면 마이클 코넬리와 그리고 제프리 디버이다. 제프리 디버의 소설들은 RHK에서 나오는 링컨 라임 시리즈 및 스탠드 얼론들, 모클에서 나오는 캐트린 댄스 시리즈로 접해왔는데 메두사클럽에서 나온 스탠드 얼론도 있다는 것을 한 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임팩트 없는 제목에다 역시 임팩트 없는 표지는 과연 제프리 디버 신화에 흠집을 내진 않을지 의구심마저 드는 것은 당연한 거고... 그리고 누군가가 이 소설 <남겨진 자들>을 링컨 라임 시리즈 중 하나라는 근거 없는 허위정보를 블로그인지 카페인지에다 게시한 것을 보기까지 했다. 링컨 라임 시리즈를 타 출판사에서 내놓을 리 만무하지, 게다가 전담역자도 따로 있는데 말이다. 난 왜 잠시 잘못된 정보에 혹했던 것인지? 반성 또 반성....

 

이 소설은 여름별장에서 걸려온 911긴급전화를 받고 여 경관 브린 맥켄지가 현장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수롭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현장에는 부부의 시체가 발견되고 브린은 두 명의 살인자로부터 갑자기 쫓기게 된다. 낯선 남자들의 다음 타깃이 자신이 되리라는 직감에 달아나다 또 다른 여성을 만나 함께 쫓기면서 이야기는 긴박감 넘치게 흘러간다. 숲 속으로 도망간 두 여자를 두 남자는 포기 대신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숨 가쁜 추격전으로 전개하게 만든다. 브린은 다른 여자와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건지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시간을 벌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면서 탈출을 꾀하는 것뿐이다.

 

추적자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다양한 도망 루트와 위장전술, 그리고 각종 기만전술을 총 동원해보나 살인자들은 용케도 간파하고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해오는데 한 치의 오차, 잠깐의 방심도 용납지 않는 치밀한 두뇌싸움 속에 서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대혼전은 짜릿한 스릴과 쾌감을 던져준다.

 

그렇게 중반까지 흡입력 있던 전개가 어느새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계속된 숲에서의 추격전은 한정된 공간과 환경적 특성으로 인하여 곧 지루함이 엄습하면서 그때부터 이야기의 흐름을 나도 모르게 놓쳐버리게 되는데 숲을 탈출하여 도시로 도주경로를 옮겼다면 집중력을 유지한 채 새로운 공간 설정으로 이채로운 전개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드는구나. 

 

<곤충소년>에서도 숲을 도망다니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누명인지, 진범인지 알 길 없는 의문 속에 먼저 이 같은 공간 스타일을 접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현대적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투를 더 선호하는 나로서는 영원히 숲 속 미아가 될 것 같은 설정 속에서 스릴과 반전 모두 놓쳤다는 점은 디버의 열렬한 독자로서 처음 겪는 상황이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디버가 착안하고 의도한 시도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다. 올해만큼은 제프리 디버의 고난기가 아닌지, <도로변 십자가>도 끝까지 집중해서 읽고도 아쉬운 반전으로 실망을 남기더니 이번 소설도 이래서 대략 난감했다.

 

좀 더 분발하시우~~ 디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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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8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8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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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어린이인 사건들은 늘 보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런 사건들은 그를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상처를 입혔다. 그 독이 묻은 탄알을 막을 만큼 두꺼운 방탄조끼는 없었다. 어린이 사건들은 이 세상이 잃어버린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본문 중에서)

 

다른 책들에 밀려 한동안 손에서 놓아버렸던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찾아 읽었는데 그것이 <유골의 도시>이다. <로스트 라이트><보이드 문>은 입질만 보일 뿐 해외 컨펌은 언제쯤이나 확정될지 기약이 없는 상태에서 우선 미처 읽지 못했던 나머지 작품들을 우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인데 솔직히 독자평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은 아닌 듯싶다. 평점이나 서평을 사전에 확인하지 않았어야할까? 무슨 영화나 책이든지 사전정보 없이 보는 게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인데 말이다. 이번 소설은 치열한 심리전이나 고강도의 액션, 거대한 음모나 배후 같은 노른자를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잔잔한 드라마적 요소가 주를 이루고 있어 심심한 것은 사실이다. 작은 소품 같은 느낌이랄까? 보슈의 내면에 더 치중하게 되는, 그렇다면 통속적이고 평범하게 비치는 점은 감안해야한다. 그래도 해리 보슈!

 

새해 첫날부터 자살사건 현장에 출동한 해리 보슈는 헐리웃 언덕에서 소년의 뼈가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다시 현장으로 간다. 보슈는 소년이 20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생전에 수 많은 육체적 학대를 받았음을 알게 되면서 사건해결을 위하여 다각도로 수사에 매진하게 된다. 하지만 오래 전 사건인데다 별다른 단서 없이 제보 전화에만 의존하게 되어 지지부진한 수사진행에 부딪치면서 자칫 다른 사건으로 방향을 돌리게 될 상황에 놓인다. 마침내 언덕근처에 살던 아동 성추행 전과경력의 용의자가 물망에 오르고 그를 만나 탐문 수사를 하고 돌아간 후 누군가의 정보유출로 언론에 의해 유력한 사건 용의자가 되어버린 그 남자는 수치심에 결국 자살하고야 만다. 경찰은 신속한 사건해결을 위해 그를 범인으로 지목, 언론에 발표하고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한 보슈에게 살해당한 소년의 가족사에 숨겨진 비밀과 진실이 밀려들면서 새로운 국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진정한 악은 세상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기껏해야 양손에 물이 새는 양동이를 하나씩 쥐고 절망의 어두운 시궁창 속을 허우적거리고 다니며 물을 퍼내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보슈가 생각하는 도시에서의 악의 존재와 그에 대항하여 승산 없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대결에서 자신의 직무와 본분에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을 결과물을 낳고자 하는 보슈정신을 이만큼 적나라하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 나 또한 보슈의 행적을 뒤쫓다보면 사회라는 거대한 장벽에 끊임없는 좌절과 분노, 연민과 동정을 표하게 되니 이 시리즈를 왜 계속 읽게 되는지에 대한 소소한 답변이 되고 있는데 이번에도 보슈는 하나의 사건 이면에는 더 많은 더 암담한 어둠의 기원을 보게 되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게 된다. 미처 꽃피지 못한 소년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불행한 가족사, 무고한 용의자를 희생양 삼아 공적에 이용하려하는 경찰이라는 무능한 관료조직, 그 와중에 개인적 잇속에 눈이 멀어 정보제공에 뒷거래한 개인과 썩어빠진 언론까지 사체를 두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이 사회는 보슈의 힘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시궁창이다. 게다가 보슈는 이성문제와 관련하여 불행한 사고마저 겪게 되니 이쯤하면 불행과 재앙과는 가까운 친구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평생을 업보로 여기고 살아야 함은 역시나 안타까운 맘이다.

 

그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부조리에 달관해버렸다. 계속해서 경찰로 사는 이유가 거창한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가끔씩이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매력이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는다. 그래서 낮에서 밤으로 전환되면 빛보다 어둠이 거리를 잠식하는 도시에서는 한 마리 코요테가 되어 어슬렁거리며 하이에나들을 처단하고 있다. 그는 동아줄을 잡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스스로가 코요테임을 자처하며 과감히 포기해 버리게 되니 잠깐 동안의 외도가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가 자못 궁금해진다. 그렇게 구성적 재미와는 별개로 코넬리의 필력과 그 속에 담긴 함축적 주제의식 만큼은 음미할수록 진국이라 중독되는 것이고 다음 편 <시인의 계곡>을 읽는 동안에 해당 출판사에서 속히 협의완료 짓고 국내에 해리 보슈라는 남자의 후속작을 공개하기 바라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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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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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

 

기시 유스케는 그동안 한 번쯤 읽어봐야지 했던 작가 중 한사람이었고 4월중에 이 소설을 읽다가 갑작스럽게 발령이 나는 바람에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완독하게 되었다. 것도 신작 출간 소식이 아니었더라면 기억을 되살리기도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시 유스케는 국내 사인회가 이상하게도 기억에 많이 남는데 내가 그의 사인회를 가본 적도 없지만 사인회가 개최소식이 들릴 때마다 어땠을지 궁금함이 꽈리를 튼다. 또 이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극찬을 접할 때마다 도대체 어느 수준일지 역시 궁금함이 또 알을 낳던데 이번 입문작을 계기로 나머지 작품들도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소설은 실업자, 이혼녀, 퇴직자, 약물중독자 등 호주의 황무지 벙글벙글 레인지에 총 9명의 일본인이영문도 모른 채 모여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에 자신도 모르게 참여하게 되는데 게임을 포기하려면 자신이 죽어야하고,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게 된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에서 서바이벌 게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가 이 소설의 주요 줄기이다.

 

서바이벌 게임 형식이라 <배틀 로얄>이나 <인사이트 밀>이 반사적으로 연상된다, 관건은 게임 진행방식과 게임의 동기와 결말에서 차별성을 발견해야 할 터인데, 그 점은 확실히 판정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주인공 후지키 요시히로가 낯선 곳에서 눈을 뜨게 되는 장소가 하필이면 '진정한 호주'라고 불리며 서 호주에서도 아웃백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한 벙글벙글이라는 점이 이채롭긴 하다.

 

2000만년에 걸친 침식 작용으로 이루어진 벙글벙글은 오렌지색과 검은색 띠가 교차해 마치 벌집을 연상하게 한다고 한다. 이곳의 독특한 바위들은 해발 578m의 높이로 우뚝 서 있고 규모만큼이나 다채로운 색감도 신비롭기만 하다. 거대한 벙글벙글의 협곡 안으로 들어서면 물웅덩이들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종려나무들은 아슬아슬하게 바위 절벽 틈을 뚫고 자라난다 이 곳은 남자의 자격에서도 다녀간 적이 있는 명소인데 그때는 지명을 몰랐고 왜 이 곳을 소설의 무대로 정했는지 모르겠으나 이국적인 풍광에 갖가지 동, 식물들이 공존하는 환경이 지구가 아니 외계행성이나 고원무립의 공간으로 설정하기 적합하리라는 단순한 의도가 있었을거라 추측해본다, 아님 작가가 실제 여기를 여행 다녀왔을지도 모르겠고.

 

서바이벌 게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진행 방식을 설명 받고 일행은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으로 호신용품, 식량, 도구, 정보 등 총 4가지 중 하나를 각자 선택하게 되는데 순간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와 효용가치 판단 등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했을까 라는 상상과 함께 이들이 헤쳐 나갈 게임의 과정들을 지켜보면 극한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이 드러내는 사악한 욕망과 본성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단 한명의 승자가 되기 위해 잠시도 숨 돌릴 겨를 없는 처절함과 잔혹함을 광기와 공포와 스트레스로 실감나게 그려내기에 밤에 읽으면 더욱 공포스럽다는 혹자의 추천평이 결코 허언은 아니었다. 그렇게 미지의 공간에서 눈치작전을 펼치며 벌이는 살육전은 인간성의 말살로 이어지는데 사람고기를 탐닉하게 되어버리는 식신귀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소름끼친다. 한 번 맛보면 계속 먹게 되는 그 맛에 외모마저 변해버리는 부작용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란 무엇인지 실감나게 한다. 그 와중에 나오는 불신과 의혹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긴장을 더욱 증폭시켜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아이의 정체는 후지키의 짐작대로 일까? 게임의 주최자는 돈 많은 부자들의 저열한 호기심과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내기판을 조성하기 위한 일종의 스너프 무비였을까? 아니면 후지키의 꿈? 정신착란? 결말은 무엇이 정답인지 깃발을 들지 않고 여러 가지 가설을 공개한 채 미스터리하게 종결하고 만다. 그냥 게임이 보여준 가공할 전개만을 소설로 읽고 즐기라는 것인지 알 길 없는 작가의 의중은 모든 것인 혼돈인 세상 그 자체를 벙글벙글이라는 실제 장소를 빌어 꼬집고 싶었나보다. 결말에 대한 분분한 감상에도 초연한 듯싶기도 한데 확실히 기시 유스케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시하고 배열하는 데엔 탁월한 능력자인 것 같고 그 점은 또 확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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