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의 죄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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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추리작가협회의 그랜드 마스터 로렌스 블록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AHMM)>에서 창간 5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했던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에서 처음으로 작품세계를 접한 적이 있었다. 볼록의 초기단편으로 <쇼핑백을 든 아줌마>라는 짧지만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탐정 스커더(매튜가 아니라 조라는 이름이었다)가 살해된 한 노숙자 아줌마로부터 뜬금없이 유산 일부를 물려받게 되자, 그냥 수혜받기가 꺼림칙해서 살인범을 찾아나선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범인을 잡고 보니 범행 동기 자체는 보잘 것 없었는데 유산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섬이 아닌지도 모르고, 누구나 다 섬인지도 모른다.”는 책 속 구절처럼 산다는 것 자체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진정한 데뷔작 <아버지들의 죄>로 본격적인 블록 월드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민완경찰이었지만 은퇴한 사립탐정 매튜 스커더에게 한 중년남자의 의뢰가 들어온다. 그 남자의 딸 웬디라는 여성이 살해되고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동거남 리처드 밴더폴로 피를 뒤집어 쓴 채 사건현장 근처에 있다가 체포된다. 하지만 리처드 밴더폴은 수감 중 곧 자살해버리고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려는 즈음에 딸의 죽기 전 행적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매튜 스커더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은 명백히 밝혀졌고 더 이상의 조사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닫힌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입장을 거절 못하고 수임을 맡기로 한다.

 

사건조사를 시작한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은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끈질기다’... 아니, 그냥 끈질긴 사람으로 부르는 편이 좋겠다는 매튜 스커더의 가상 인터뷰대로 별 다른 단서나 정황을 찾기 어려워보였던 사건의 내막의 꺼풀을 벗겨낸 것은 역시 그의 장기인 적당한 타협과 거래, 윽박, 내면의 심리를 응시하는 거울로 변신하자 이야기의 흐름은 조용한 끈기 앞에 백기를 들고 속살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내가 상상했던 거랑 달리 결코 정도만을 추구하는 고지식함은 없었다. 자신에게 흉기를 들어 위협하던 남자에게 가한 응징을 보라! 그에게서 돈도 뺏고 보복 차원에서 손가락도 부러뜨린다. 냉혹하면서도 실리도 고려할 줄 아는 매튜 스커더의 사실적인 면들은 이 시리즈가 뒤로 나아가면 갈수록 믿음을 고조시킬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하는 것이고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더라도 등장인물의 대화에서는 인장을 찍듯 마음 한 구석을 꾹꾹 눌러 담는 힘이 있다. 그 우아함이란 최근의 추리소설들이 시각적인 쾌감에 치중할 때 정서적인 성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기에 많은 독자들과 작가들이 추종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뛰어난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를 들자면 스커더가 이야기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법의 사각지대를 빠져나간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자신의 방식대로 처단했던 과거사를 털어놓는 대목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심경고백 차원이 아니라 웬디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눈치 챈 그가 마지막에 선택하게 될 집행방식이라는 복선을 암시하고 있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미처 표현 못했던 감탄을 뒤늦게라도 하게 된다. 다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점...

 

그렇다면 책의 제목과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인가? 지켜주든가 아니면 죽이든가라는 구절은 어쩌면 시대가 변하면서 위상도 달라지고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족들에게, 그 중에서도 아들과 딸에게는 어떠한 존재와 역할로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만드는데 탁월한 주제요, 난제다. 최근 독거로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인수를 자식들이 거부했다던 뉴스를 인터넷에서 보고 분노하며 탄식했던 내게는 <아버지들의 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이지 않게 연결하는 통로이자 참을 수 없는 아픔이다. 왜 이다지도 슬픈지? 결코 외면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 숙연해지고 반성하게 할 누아르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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