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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퍼즐 맞추기 -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보는 여자들이 건넨 위로 ㅣ 맞불
이현정.하미나 지음 / 동녘 / 2022년 12월
평점 :
하미나 작가와 이현정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둔 책이다. 우울증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와 인류학자인 교수의 만남이라 내용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지만 내가 기진 고민을 남들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되는 책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서로 나누는 대화가 깊어지고 편해지는 게 느껴졌고 특히 한 주제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오갈 땐 논리가 탄탄한 토론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계기
하미나 작가님의 전작인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인상 깊게 읽고 작가님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타인과 주고받는 편지로 하미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았던 까닭은 미나의 너그러움 덕분이기도 하지만, 더 깊숙이는 둘 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의 한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온 궤적과 말로 환원될 수 없는 마음속 세계를 글자만으로는 충분히 표현해내기 어려웠다. ('인사말' 중 일부)
모든 게 다 불만투성이로 보이고 사람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가 돋친 것처럼 버거울 때 떠올리고 싶은 문장이다. 아무리 현실이 형편없어도 분명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부분이 있을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은 참 따뜻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게 그것 외에 많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부단히 연습하며 마음을 전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 같아요, ('부단히 연습하며 마음을 전하려 애써야 해요.' 중 일부)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양날의 검이다. 그런데도 그 검을 부지런히 갈고닦아야 하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나 말고도 학문적으로든 생활적으로든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으니, 굳이 나여야 할 이유도 없고요. 종교를 갖고 있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기도 어렵고, 젊은 시절 목표였던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했던 꿈은 허물어진 지 오래였어요. 오히려 살면서 세상의 숱한 고통, 세세한 잔인함과 냉혹함이 점점 더 커지는 것만을 목도해 왔으니까요. 무력감과 좌절이 엄습했고, 궁극적으로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다고' 중 일부)
막연히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인생을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문제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난제인가보다. 막막하지만 왜인지 모를 위안이 든다.
"우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갈 거예요." 특히 이 부분에서 저는 위로를 받았어요, 나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노동과 고통 속에 사는 삶은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면 시련과 괴로움이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다고' 중 일부)
내 인생도 누군가가 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일까. 형편없이 낭비하기엔 아깝긴 하다.
삶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으니 나아지기 위해 애쓰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지향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꼭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우주는 너무도 크고 나는 티끌 같은 존재니까요. 바다에 갈 때마다 그걸 느껴요. '나'라는 경계가 얼마나 허상인지도 생각하고요. ('저는 또 다른 모래성을 쌓고 싶어요.' 중 일부)
나는 티끌같이 작은 존재. 그래서 아무거나 아무렇게 해도 괜찮은 존재라는 생각으로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조금은 더 쉬워질 것 같다. 본받고 싶은 태도다.
제가 대선을 겪으며 가장 두렵다고 느꼈던 것은 윤석열이나 이준석, 젠더 갈라치기를 일삼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제 SNS 타임라인 속에 윤석열 지지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날카롭게 양분된 세계가 가장 두렵게 느껴졌어요. 서로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서로를 향한 이해를 시작할 수 있을까 아득해졌거든요.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다구요!' 중 일부)
이 부분을 읽자마자 놀랐고 큰 공감이 갔다. 세상이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극단적으로 변해간다. 끼리끼리 모여서 다른 집단을 아예 배척해버린다.
선생님...... 저는 주제넘게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결코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지 않나요? 정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나요? 어려운 말로 가득한 정치를 좀 더 쉽게 대중에게 전달할 책임이, 교육의 기회를 가졌던 우리에게 있지 않나요? '다 똑같은 놈'이 아니라 정말로 이상한 놈이 누구인지를 가리킬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나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누구도 답을 하지 않을 때, 전문가로서 대중에게 최선의 답을 제시할 책임이 지식인에게 있지 않나요? .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다구요!' 중 일부)
멋있다.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그걸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저는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이 나아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이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보지 않거든요. (중략) 행동이란 "언젠가 좋아질 것이다'라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없어도 직면한 상황에 맞서 자신의 가치판단에 따라 결단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이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중 일부)
직면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서 사회변화가 온다고 믿는 거라면,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세상을 바꿀 순 있겠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한 거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명예남성' 이라고 일컫는 '가부장적' 여교수도 있어요. 그들도 젊었을 때는 여성으로서 차별을 느끼거나 힘들어했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남성화'됨으로써 그런 차별을 극복하려고 시도해왔다 보니 어느새 사회적으로 '남성'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학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 중 일부)
괴물과 싸울 땐 나도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직접적인 폭력이 줄어드는 만큼 더 교묘한 수법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건 꼭 성폭력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그런듯해. 우리 인간은 결국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는 농담처럼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면, 아마도 인간들의 모습이 지긋지긋해서라도 침략이고 뭐고 그저 빨리 지구를 떠나고 싶을 거라고. ('우리의 삶은 늘 삶을 넘어서고' 중 일부)
신선한 발상이다. 일상의 대부분은 이미 지긋지긋한 모습에 스며들어 그것이 문제인지 인지조차 못 하는 나조차도 지긋지긋한데, 이 모든 걸 아무 필터 없이 마주하는 건 너무나 지치는 일일듯하다.
감상
편지마다 있는 소제목이 찰떡같다. 한 통의 편지를 다 읽고 앞으로 돌아가 소제목을 다시 읽었을 때 생각이 정리되면서 편지가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1. 슬픔을 연구하는 슬픔
슬픔을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듣는 것도 힘들고, 돌봄을 주는 것만큼이나 받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다시금 와닿았다. 상대가 가진 마음이 진심일수록 그 정도가 커진다는 게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당연해서 그런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행동은 주기도 받기도 어렵다.
3. 나아지기 위해, 나아지지 않더라도
같은 주제에 대해 상반되는 두 생각이 재밌었다. 둘 다 주장하는 논리에 대한 근거가 설득력 있었지만 나는 이현정 교수님 쪽이 더 공감 갔다. 지식인들이 아무리 앞장서서 계몽을 시도하려 해도 결국 일반 대중이 움직이는 건 본인들 스스로 자각할 때이고, 그 순간은 누군가의 설득으로부터는 오지 않는다.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실천하는 순간 사회는 조금씩 변하지 많이 배운 것이 꼭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진 않는다. 우리가 사회를 망치는 주범이라고 욕하는 정치인들(구. 지식인)도 학업성취도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