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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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즐거운 살인>이란 책을 소개받았을 때,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목 자체가 소설과 같아 보여, 마치 살인이나 미스터리 혹은 탐정물에서 나올 것 같은 제목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문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문학에 대한 도서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사회학적인 요소로 통해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범죄가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고, 그 뒤에는 범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추리 및 탐정소설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도 보여주었다.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만화의 기원을 대해 먼저 다루고 싶은데, 그 이유는 만화의 시초가 거의 당시 풍속에 대한 민중의 시선 내지 또는 풍자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화의 시초에서 당시 사회의 그림을 보면 특이한 것이 사형에 대한 장면이다. 사형 이전이나 사형 집행 순간 또는 사형이후의 모습이다. 사형에 대한 그림으로 내가 생각나는 것은 루이16세가 바스티유 광장에서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 루이16세의 목을 어떤 남성이 잡고 군중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인상 깊은 장면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혁명 이후의 성난 민중들이 왕비의 지인이던 어느 귀족부인의 잘린 목을 창으로 꽂아 왕비에게 보여준 그림이다. 예술이란 것이 결국 당시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시 그리는 사람들에겐 예술이란 관념이란 보단 하나의 재미 내지 기록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어느 대상을 그리는 것은 신성한 인물임을 부여하기 위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대혁명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소집이후 입헌제를 여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거나 또는 위에 언급한 루이16세의 처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테니스의 코트의 서약은 미술가가 미술로 그린 것이나 당시에는 기록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러나 지금에 보는 그 그림은 위대한 문화재일 것이다. 그렇듯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적 상황이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문화나 제도, 그리고 우리 인간이 즐기는 문학이나 예술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이나 예술운동에서 로코코에서 낭만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기는 것 역시 시대에 따라 흘러가는 하나의 조류다. <즐거운 범죄>에서는 바로 그런 문학의 흐름에서도 범죄에 대한 문학에 대해 저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학이나 혹은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생활 그 자체가 문학이나 문화라는 것을 변모시키는지 다소 난해한 요소가 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본다면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와 달리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 즉 이미지가 매개된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이미지에 의해 즉 있지도 않은 가상적 존재에 의해 현실적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즐거운 범죄>를 작가의 의도가 어떠한들 초반에는 문화유물론적으로 간다면 후반에는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도입에 따라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대혁명 시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는 자본주의 도래하던 시절로,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제 아무리 능력과 자산이 있어도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봉건주의라는 모순 아래서 그들이 열어갈 수 있는 시대는 한계적이다.

 

또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맨 처음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일화처럼 다미엥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당시 봉건사회의 범죄자들은 범죄자로 취급당하기보단 오히려 민중의 대변자로 통하기도 했다. <즐거운 살인>에서 목록을 보면 영웅에서 악당으로 혹은 악당에서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간은 개인에 결정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에 인간은 그 사회의 거대한 조류에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요소도 사회적인 조건에 부합되어야 움직이는 것이다.

 

범죄로 인해 교수형이 처해진 사람이 광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설파한다. 그는 왜 이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광장 앞의 많은 군중들은 그에 대해 어떤 때에는 조롱과 비난을 퍼붓기도 하나, 때로는 교수대를 탈취하여 범죄인을 구하기도 한다. 범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 범죄의 단죄보다 더 큰 범죄자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당시로서 분명 납득이 가는 상황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계몽주의사상가의 지식에 의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힘의 원동력은 파리의 성난 군중이었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1789년, 1830년, 1848년, 1871년에도 이어진다. 혁명의 원동력이 일어난 것이 분명 계몽주의철학에 의해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은 민중의 생활에서 보인 비참함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면 절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식량을 구할 수 없기에 저지른 생계형 범죄이고, 그 대가는 아주 긴 교도소 수감과 수감 이후의 감시다. 감시의 대상은 일을 할 수 없고, 또 다시 범죄의 길로 빠진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보게 되면, 사드가 만든 이야기도 하나, 당시 권력층의 부패나 하층농민들의 생활을 다소 알 수 있듯이 누가 더 나쁜가에서 개인의 존재보단 오히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범죄소설이 처음에는 개인적 원한이나 증오, 이익을 위한 하나의 개인적 영역이었다면, 시대가 흐르면서 범죄자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단지 붙잡혀야 할 존재, 모든 소설의 시점은 탐정 내지 일부 영웅이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잘 지적한 것처럼 탐정이나 주인공인 사람은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탐정업무나 추적하는 것은 평소 자신의 생활이 업무로 인해 자기 하루일과가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범죄자는 처음에는 그런 대상을 피해 도주하겠지만, 결국 상황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경우 주인공의 시점은 자베르 경감을 비롯한 경찰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자인 장발장에게 부여된다. 장발장이 처해진 시점은 비참하고 억울하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이다. 장발장은 항상 세계에 대해 증오를 가지게 되나, 자신을 용서해준 신부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걷는다. 하지만 자베르 경감의 추적에서 결국 둘은 만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헤치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서 그를 대해준다. 그래서 자베르는 자신이 믿은 법의 정의에 모순을 느껴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범죄라는 것이 왕정시대에는 개인의 이기심 내지 원한, 질투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자본주의 시대로 오면서 범죄는 단순히 생계에 대해 이루이지고,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생계에 대한 문제이었기에 결국 범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조직성을 띠게 된다. 마피아의 구성에서 그들이 범죄자로 된 이유는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서였으나, 그 생계 부분이 해결되면서 거대한 범죄조직으로 형성된다. 당초 피난민 내지 외국군에 의해 억압당하던 원주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런 대립구도는 계속 세력 확장으로 이어지고 결국 범죄조직은 자신의 생계가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범죄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에서 집단적으로 이어지면 그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인 폭력으로 동원하게 된다. 미국이 밀주법을 시작할 무렵 범죄조직들은 밀주 내지 혹은 밀주가 어려울 경우 마약, 매춘 등에 손을 대었으나, 추후에는 합법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범죄조직이 공공사업, 건설사업, 식품산업 등 많은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법은 제대로 된 방법이기보단 기존 시장체계에 들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로비가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가령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 중에 하나가 자국의 경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헌병과 야쿠자가 결탁하여 조선인들의 상업을 고의로 방해한 점이다. 범죄조직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등에 업을 때 심각한 폭력이 이제는 폭력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이런 방식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에 동원되고, 이제는 합법적인 기업도 범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온다.

 

특히 정경유착이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고, 특히 대규모 병참산업이나 건설사업, 또는 공공사업에서 투입된 요원이 처음에 이용당하다가 오히려 제거되는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 윌 스미스의 주연의 <enemy of the state>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국민을 불법도청 내지 감시를 하는 것에 대한 음모를 특수요원이 저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로 나온다고 해도 영화 자체가 소설이란 텍스트를 문자서사에서 영상서사로 전환했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국가 내지 대규모 자본기업의 범죄를 다룬 영화는 계속 나온다. 범죄의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그 규모에 따라 소설이나 혹은 그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변화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요건에 따라 움직인다.

 

범죄소설이 초반에는 인간 개인에 맞추어졌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개인적 영역을 떠나 대규모로 이어지고, 특히 국가의 개입은 피할 수 없는 소재다. 국가 그 자체보다는 그 국가조직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이익이 범죄소설의 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간의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겠지만, 그 법이 법으로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사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는 것이 이성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라면 결국 국가관료 조직이 범죄조직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범죄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나 해체 이전의 소비에트연방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자신과 다른 세력이나 혹은 제3국가에 무기나 자금을 부여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에 지원한 외국군이나, 베트남전의 통킹만사건,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경우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 군부 쿠데타 세력이 다른 국가에게 군사훈련과 지원을 받은 것이다. 범죄적인 부분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 국제법의 위반이고, 폭력적 방법으로 합법적 정부를 전복하는 것 역시 불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이나, 폭력적 수단을 가진 자들은 결코 피지배계급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력에 의한 수단에서 범죄, 스릴러 소설은 이제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그 중간에 등장하는 요원과 스파이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스파이물의 특징은 자국의 주인공이 다른 국가에 의해 자국의 위험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므로, 상당히 내용이 보수적이란 점이다. 이런 범죄소설을 보면 결국 죄라는 것을 다루게 된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이 당시 사회의 비판적인 견해를 다룬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 범죄소설에서 등장하는 범죄인들은 특수한 이익이나 목적을 가진 점이다.

 

개인적 영역에서 이렇다면 집단적 영역에서는 범죄가 하나의 사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실제로 폭로나 수사에 의해 국가가 범죄를 일으키거나 용인하는 경우가 분명한 사실이다. <즐거운 살인>에서 미국 항공기제작 기업인 록히드 마틴이 일본 정치인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점에서 뇌물의 수여자는 단순히 그 정치인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실이다. 국가 내지 대규모 범죄가 하나의 스펙타클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되어야 할 조건이고,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미디어의 장악 내지 미디어의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영국비밀첩보기관을 소재로 한 007 시리즈는 국가차원의 지원과 대규모 자본, 그리고 첨단기술과 주인공의 마초적인 요소와 더불어 로맨틱한 모습은 남성으로 하여금 동화의식을 여성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특히 범죄소설의 경우 단순히 괴도에 의한 절도, 미치광이의 살인을 지나 대규모 집단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단학살까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범죄소설은 매우 인기가 많아진 장르이고, 많은 대중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소비로 통해 동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적인 과정의 축적은 외면한다.

 

소설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인 만큼 자신도 그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이야기에 빠져 자신 안의 가려진 살인충동을 소설로서 풀어내는 심리적 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은 부조리함이 숨어있고, 처음에 등장한 범죄에서 범죄자는 단순한 물욕이나 질투에 의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내지 반항이다. 그런 비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여전히 하층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범죄의 대상이 처음에 개인적 동기에서 이제는 국가적 비리와 부조리라면 이제는 그가 비화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예전에 이런 농담 같은 유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 아프면 그 치료 수단이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 기도하면 되요 → 약을 드세요 → 수술하면 되요 →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어떻게 보면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결국 부정의 부정에 따른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식물의 뿌리 대신 다시 기도로 이어지니 어느 것이 딱 옳다고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이야기가 되돌아오는 것은 분명하다. 범죄구조가 자본주의사회 이향에서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모순에서 자본화로 통해 개인의 물욕, 이제는 자본주의 그자체가 앙시앵레짐으로 대체되었다면 범죄이야기 역시 바뀔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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