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 86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으면서 프랑스혁명이 장점보단 그 자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을 나열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장 자크 루소에 대한 부분이 매우 희박했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에서 주체자요, 또한 망가뜨리기 시작한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하자면, 그는 항상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지롱파와 귀족, 왕족들의 목은 단두대 아래 무참히도 몸에서 분리되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의 촉진제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가졌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분명히 민주주의 사회체계를 지닌 국가에서는 반드시 인용해야할 서적이다. 아마 헌법 내지 각종 법률이 루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 많은 부분을 가지고 왔다. 삼권분립 내지 자유와 평등, 인권과 자유 시민에 대한 부분에서 말이다. 프랑스혁명이 구한말 조선시대에서 군주제를 해체하는 직접적 요인이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을 생각하면 피할 수 없다.

 

당시 3·1운동에서 민족주의자, 유학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모두가 모여 선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위와 같이 보수와 진보만이 아니라 이미 허물어진 구체제의 잔재인 전통의 역사마저 흡수한 것이다. 민족의 자유와 공화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들은 모두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거기서 루소의 이론 역시 피하기 어려운 매력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직접 우리에게 역사적인 여파를 전해주지 못해도 우리의 민주주의 사회체계에서 생각해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담긴 내용은 분명 민주자유주의사회에서 반드시 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진정한 시민사회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진정한 시민사회는 모든 것이 멈춘 정지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그리고 시민사회가 이룩한 국가체계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로 나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가 숨 쉬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흔히 바라는 평화롭기만 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폴란드 왕의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했던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말은 상당히 깊은 맛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론> 3부의 ‘민주정치에 관하여’에서 나온 문구였다.

 

루소의 문장을 생각하면 어려운 말로 채워져 있기보다는 간략하면서 논리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그의 집필능력에서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수많은 왕국들이 그의 도서를 불태워 그의 사상을 부정하고, 그가 무슨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수배령을 내릴 정도이니 루소가 당연히 프랑스혁명에 빚이 지게 했던 이유는 아마 그렇다고 본다. 토크빌이 비록 루소에 대해 언급을 크게 하지 않았으나, 프랑스혁명 이전의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해 준비했다면, 프랑스혁명 실행자들은 도시 노동자나 농민이었다.

 

후자들이 혁명을 이끌어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에겐 루소란 존재가 과연 큰 존재였을까? 기실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세계에서 놓칠 수 없는 혁명으로 러시아혁명이 있다. 러시아혁명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같은 인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닌 이전에 많은 혁명가들이 활동했으나, 결정적인 행동으로 본다면 1917년 2월 혁명과 동시에 11월 혁명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자리에 있기까지 레닌은 마르크스와 레닌이란 정신적 지주가 존재했다. 레닌과 많은 볼셰비키들은 마르크스주의였다.

 

물론 아쉽게도 스탈린의 집권 아래 소비에트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비우고, 그들이 절대로 동조해서 안 될 파시스트인 히틀러와 불가침동맹을 맺었다. 그런 점에서 루소와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그들의 가르침은 오래 가지 못한 채 독재자인 나폴레옹과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의 의지보단 대중의 잠재적인 의식에 의해 침식당했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당통의 죽음과 러시아혁명의 트로츠키의 추방은 역사의 반증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멈출 수 없다. 루소는 지상의 완벽한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펼쳐졌다고 하나, 그것은 노예에게 받아온 착취로부터 가능했다. 노예가 그리스시민의 수배에 이르던 그 시절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프랑스에서 노예제도는 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있어보았자 귀족이나 영주들의 농노정도만 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노예를 없어진 만큼 자신이 노예가 되어야 했다. 주인이 없는 노예, 즉 자신의 판단력과 이성이 없는 충동에 의해 말이다.

 

생각하면 테르미도르반동 이전까지 로베스피에르와 일부 지식을 가진 자들만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프랑스 시민이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사회계약론>에서 주석을 달고 있는 글을 보면 알다시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왕실의 사치도 있었지만, 행정 그 자체의 문제였다. 루소는 넓은 토지에 그만큼 어울리는 인원과 그 지역에 알맞은 직업이나 산업체계가 필요하다 보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농민들에게 지나친 세금과 황폐화되어가는 농촌이 있었다. 귀족과 귀족처럼 되어버린 부르주아는 권력을 공익이 아닌 사익에 투자하고 루소가 지적한 “좋지 않은 정부에서는 이 평등이 허울뿐이며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 평등은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 속에서 살게 하고 부자는 계속해서 침탈하게 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실제로,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해롭기만 하다. 따라서 사회 상태는 인간들 모두가 어느 정도씩 갖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는 한 유익하다”

 

이 문구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 약 250년 전에 적어 내려간 이 한권이 도서가 루소에겐 보편적 현상이고, 이런 모순을 타파하는 것이 일반의지로 연결되어야 할 점이다. 루소는 정치적 관점을 매우 잘 보았던 것 같다. 정치적 참여인 선거로 통해 대표되는 자와 그 대표를 뽑아내는 주권자의 비율이 늘어나면 날수록 주권자에게 돌아오는 권리나 혜택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사실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 왕정의 실수는 바로 지역자치기구의 저지이다.

 

지역자치기구를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많은 금액을 투여하고, 게다가 지사들을 임명하여 지역마다 통치하게 하여 행정력의 왜곡과 모순만 남겼다. 결국 지역사회는 그만큼 피폐하게 변해가고, 지역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던 문제들은 중앙정부가 해결해야 하나 그 인원과 물자, 행정력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루소는 바로 이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에서 주권자로서 행정력을 행사하는 자로 하여금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시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고도 그들과 같이 시민사회를 만들어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국가는 불가능하고, 땅의 규모나 국가적 체계가 클수록 필요했다. 즉 지방자치 기능은 토크빌이 주장하는 점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다. 주권자 만 명에 대표자 1인과 주권자 10만 명에서 대표자 1인에서 주권자들이 후자로 가면 갈수록 대표자에 대한 접근성이 떨이지게 되며, 그 대표자는 10만 명에 대한 권력을 소지하게 되어 그만큼 공권력을 커지게 되는 점에서 민주주의사회에서 권력의 집중화는 바로 최악이란 사실을 알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반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피해를 주는 자에 대해 혹은 기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루소는 그들을 시민이 아니라고 한다. 시민이란 존재는 서로 간의 계약으로 통해 이루어진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을 하였기에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인권을 주장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의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문제는 그 자발성의 여지에서 우리는 로마와 같이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권을 주어야 하는 점이다. 로마시민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스스로 칼과 창을 들고 전장을 향하여 달려간다.

 

시민들만 전쟁에 참전이 가능했기에 로마후기로 가면 시민들의 인구가 많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시민들이란 존재들은 공화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스스럼없이 대변하는 존재다. 가끔 우리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민주주의 역시 공화주의라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제군주를 위한 참두제로 가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있다고 한다면 대통령과 그 밖의 조직 그리고 지식인들과 사회적 지각이 있다는 사람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반드시 읽어봐야 생각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사회와 보편적 국민들의 정치권에서 루소의 영향은 막대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체계에서 루소가 주장한 바는 무엇이며, 그것으로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물론 프랑스혁명의 자기이성적이라고 여기는 반이성적 행위는 폭력을 합리화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의 바스티유감옥과 같은 상징적인 구체제의 폭력 역시 합리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프랑스혁명이 부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나,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행한 행동은 우리가 분명히 인정하고 배워야할 부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