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알렉시스 토크빌 지음, 이용재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토크빌의 냉정하고 분석적인 비판적인 사고로 적어내린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을 읽어가면서 나는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토크빌이 저술한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이 그가 죽기 전인 3년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분명 지금으로부터 150년 이전의 서적이란 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 가면 갈수록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다시 본다는 기분이었다. 토크빌이 지적한 보편적인 인간군상과 거기에 대한 행정과 관리제도, 계급과 사회적 변화로 통해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이 보는 프랑스혁명과 지금 그 지식인의 서적을 보는 나로서 같은 시대와 공간에 살지 않아도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존재란 분명히 공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통시적인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시적인 영역으로 보는 민주주의사회 과정이란 그야말로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1856년 토크빌이 보던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란 지금 내가 한국사회를 보고 있는 냉소적인 시선과 많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는 봉건주의사회인 전제군주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물론 심각성은 군주정의 시대가 심한 것은 당연하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군주정이 아닌 시절에 그런 문제를 현재 안고 있는 상황인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후자 쪽이 더욱 심각하지 않은가 싶다.

 

프랑스혁명에 참가한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교하여 생각하면 이 구절이 너무 와 닿는다. “오늘날 민주적 전제주의(despotisme democratique)라고 부르는 특이한 통치형태−이는 중세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것이다−에 이미 친숙해 있었다. 사회에는 계서제도 계급적 차별도 고정된 서열도 있을 수 없으며 국민들은 서로 비슷비슷하고 완전히 평등한 개인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전체 국민이라는 이 무차별적 다수가 이론상 유일한 합법적 주권으로 인정되긴 하지만 사실상 정부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감시할 권한마저도 교묘하게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권자(mandataire)가 전체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 엄청난 힘은 여론이나 법률의 통제도 미치지 아니하는 바, 그것을 타도하려면 엄청난 혁명을 동반해야만 할 것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법적으로 하위 기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지배자인 것이다.”

 

우리도 ‘국민의 정부, 국민의 주권, 국민의 사회’와 비슷 무리한 슬로건이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으나, 실제 국민 중에서 정치적 참여에 관여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제한적이다. 프랑스와 같이 일개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정치적 발언과 참여 그리고 현실로서 표현되는 일들은 없었다는 점이고,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토크빌의 이런 정치적 문제에 대한 논쟁을 거론한 점과 프랑스 혁명 이전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볼테르가 영국을 다녀오면서 보았던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가령 영국의 경우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다른 유럽사회보다 빨리 정착된 것이 분명하다. 토크빌의 친구이면서도 19세기 유럽 지식인 중에서 탁월한 인물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 하원에 의원직에 당선되던 일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고려해볼만 하다.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았던 시기에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전제군주로 등장하고, 몇 번이나 혁명이 있었고, 나폴레옹 3세까지 나온 시기다. 그에 반해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영국사회에서 그가 정치인이 되면 자신을 지지한 시민들을 위해 정치하는 게 아니라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의정 생활할 것이란 말에도 그를 의원으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지속적인 정치생활을 하지 못했어도 적어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토크빌이 지적했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문제점을 전반적으로 구조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토크빌은 다소 프랑스혁명에 부분을 냉소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보수적인 관점으로 기술했다. 그리고 보수적인만큼 그 보수에 대한 부분은 더욱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진보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변증법적인 논리를 그의 도서에서는 마지막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아무리 농민이 어리석어도 그 원인은 농민이 아니라 농민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구체제의 어리석음이란 점을 분명하게 명시하였기 때문이다.

 

루이16세의 통치기간 통안 토크빌은 루이16세에 대하여 무능하기보단 그저 마음이 약한 왕이란 점과 선의를 가지고 정치를 하였으나 그 선의 자체가 틀렸다고 적었다. 결국 루이16세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한 것이라 간접적으로 무능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때의 시기에 가장 문제점은 너무 많았으나 제일 중요한 점은 지역자치지구의 해체와 관련된 것이다. 결국 왕정의 중앙집권화가 모든 것의 시초였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지역자치를 실행할 경우 그 지역구의 시민들이 직접적으로 시장 내지 구장을 선출하여 그들 스스로 운영하기에 세금이나 행정, 관리 등을 직접 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왕정시대에 왕권에게 가장 치명적인 존재는 귀족이란 점에서 지방자치는 지역귀족들에게 하나의 권력을 인정하는 셈이다. 중앙집권화로 통해 귀족들이나 혹은 지방자치기구의 힘을 약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행정시스템을 무효로 하고, 그 행정통치권을 매입하는 점에서 엄청난 예산을 투자한 것이다.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은 곧 예산의 낭비로 이어졌고, 그 낭비는 또 다른 낭비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약 길가를 지나가는 도로가 훼손되어 있고 성벽과 성당이 상당히 노후화 되어도 지방자치에서 수리나 복구를 할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한 처리권한은 왕권이 임명한 지사에 의해 가능했다. 그들은 1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기본은 2~3년 정도 기다리는 행정착오를 만들었다. 지사의 권한이 지나치게 주어지자, 중앙집권화 그 자체를 보여주며, 구체제가 루이왕정이라고 하여도 생각해보면 지역자치기구의 행정 역시 구체제였다. 하지만 지역자치기구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것이야 말로 왕정시대이지만 마을주민에게 정치적 참여권과 행정적 감시권이 주어지고, 의사표명을 할 수 있는 민주주의제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귀족사회가 주관하는 점에서 다소 한계치를 보이고 있었으나, 적어도 귀족사회는 지역사회의 시민 내지 혹은 농민들에게 중앙집권화로 통해 실시되던 정치적 이득보다 탁월했다는 점이다. 귀족들은 비록 농민들에 자기영지에 대해 경작을 하게하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세금을 받았으나, 이들은 농민들의 복지와 생활을 어느 정도 돌본 점은 분명한 점이다. 중앙집권화로 통해 지역사회의 귀족들이 모두 중앙의 벼슬로 가게 되고, 파리는 어느 순간 프랑스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귀족 없는 지역사회에 가난한 귀족만 남았고, 그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게다가 지사의 등장과 중앙집권화로 그들은 귀족으로서 책임이던 장병을 소집할 필요는 없으나, 그 만큼의 혜택도 사라져 갔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업적 기술을 관리해주고, 생활고에 시달릴 경우 도움을 청할 수 있던 귀족과 그리고 지역 교구들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지역 교구라는 관리들은 지사로 인해 자신들의 행정적 권한이 축소되었고, 그나마 농민에 대해 호의적인 지역 교구마저 힘을 잃어가자 농민의 생활을 비참해져갔다.

 

중앙정부에서는 그런 와중에 귀족과 귀족처럼 되려고 하던 부르주아의 세금감면이라는 특혜를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을 지역사회의 농민에게 부과했다. 농민들의 생활은 점차 어려워지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분노, 이기심, 증오, 폭력으로 가득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의 준비는 지식인들이 실천하였으나, 실행은 후자와 같이 무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실행한 점이다. 이들의 실행에서 혁명 자체는 성공했으나 혁명 후의 과정이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글도 읽을 줄 모르고, 정치적 판단력도 없었다.

 

구체제의 상징인 루이16세가 단두대 아래 이슬이 되어도 프랑스사회에서 농민의 생활을 개선되지 않았다. 대신 루이왕정과 그 주변의 자리에 다른 자들이 앉아있었을 뿐이다. 아니라면 주인 없는 노예만 되었을 뿐이다. 다소 토크빌이 헤겔의 말을 빌려온 점에서 분명히 프랑스혁명의 계몽되지 않았던 주체들의 실시에서 그 이후의 폭력은 예기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성이 옳고 인간의 이성을 가졌다고 믿는 휴머니즘이 오히려 폭력을 야기한 것처럼 계몽이란 칸트의 말처럼 자신이 스스로 깨고 나온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프랑스혁명보다 오히려 개혁정치로 통해 농민에게 강압적 행정보단 그들의 농사체계의 개선, 빈곤의 문제를 해결, 세금의 과중에 대한 격감 등을 보였다면 어떨까 싶다. 이에 반해 신흥세력인 부르주아들은 이미 자신들의 이익에 눈에 멀어 그들 자신이 귀족화되고 있었다. 웃기는 이야기 같이 들리지 않을까 하나, 귀족들은 부르주와 자신들을 분리하고, 부르주아는 자신들과 농민을 분리했다. 가장 먼저 앞서서 총칼에 맞은 농민과 도시빈민들의 고통과 희생은 무엇이 되었는가?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은 과거의 문서로부터 하나씩 열거하여 그 과정을 정리한다. 그는 프랑스혁명 이후 사람이어도 그의 관점은 마치 프랑스혁명 이전과 그 순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프랑스혁명을 말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그 이전과 그 순간, 그 이후라도 결국 같다는 점이다. 지독한 문맹이던 시절, 요새는 지독한 문맹 대신 지독한 문명으로 오히려 인간들은 세뇌시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나, 인간에게 과연 역사적 진보는 존재해도 정신적 진보는 없는 것인가?

 

본문에 나온 토크빌의 문구는 나에게 상당한 경악을 던져주었다. “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열정이 끊임없이 소멸과 부활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숙하고 정제되지 못한 열정이 앞으로 겪게 될 운명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열정은 그만큼 시들거나 질식되어 버리기 쉬우며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시기 동안에 평등에 대한 열정은 항상 원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우리의 가장 고귀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자유에 대한 열정은 계속 그 모습을 달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태의 추이에 따라 감소되거나 확대되었으며 강화되거나 약화되었다. 반면에 평등에 대한 열정은 줄곧 그 모습이 일정했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완고하고 맹목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려 하였으며, 평등에 대한 열정을 조장해주거나 고무해주는 정부라면 어느 것에나 그 정부가 전제주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습성과 관념 및 법률들을 제공해주게 되었다.”

 

재미난 일화인지 모르나, 이렇게도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프랑스국민들은 이런 심정으로 프랑스혁명을 일으키고도 후에 나폴레옹과 같이 유럽 전역을 군화발로 밟아버린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가끔 촛불행사나 또는 각종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자유와 평등이란 슬로건, 즉 민주주의 기본권에 대한 참여와 권리를 향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이것이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혁명을 보다시피 그것을 만들어낸 주체는 누구인가?

 

앙시엥레짐(구체제)라는 것들에 대한 처분에서 다른 모습은 새로운 구체제가 들어온다고 해도, 계속 조금씩 개선되고 발전(그것은 프랑스나 유럽사회와 같이,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부분이 늘어가면서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그 사회구조와 모순에서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배경이다. <구체제와 프랑스혁명>를 읽어보는 것은 단순히 프랑스혁명만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습까지도 읽을 수 있다는 하나의 사실이란 점을 망각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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