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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데이
김병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1월
평점 :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 독재 그리고 뉴라이트의 일제시대가 한반도의 근대화 기여했다는 입장에 이르고 보면 이 책의 저자가 과거시대 한국과 일본의 앙금인 증오를 지우자고 하는 논리엔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지리산 항일의병이었던 주인공 한대식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에 나온 불임 부부에게 들이닥친 도둑 신랑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일제시대를 미화할 수 없는 논리가 가장 인상적으로 내겐 다가온다. 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조한욱지음 위즈덤하우스펴냄)에도 이와 유사한 강도론으로 일제의 근대화 기여론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도둑을 통해 아들을 얻었던, 집이 새단장되고 좋게 되어도 그것을 좋게 평가할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선 가슴이 턱 막히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고 개그맨의 개그를 고발하는 정치인의 행태처럼 헛웃음이 절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르망디 상륙잔전에서 연합군에 잡힌 독일군 포로중 네명의 조선인 사진이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하는 디 데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중 아마도 일본인 포로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을 더하여 그들의 대립도 그리지만 화해를 이야기 할 것이란 복선을 진하게 깔고 있다.
강제규감독이 제작하여 12월 개봉예정인 장동근, 오기다리조, 판빙빙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는 마이 웨이의 원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소설로 초기엔 타임워너의 투자를 끌어내 화제를 모았지만 무산되었고 감독의 각색으로 원작과 달라졌다는 프롤로그를 보니 영화와 원작의 차이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해진다.(아버지의 길도 드라마든 영화로든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디데이와 동일한 소재에서 출발하나 탈북노인의 증언에서 실화와 픽션으로 그려진 아버지의 길(2권, 이재익지음, 황소북스)을 읽은 기억과 대조하여 공통점과 다른 점을 가려가며 읽는 재미도 남달랐다. 그 감동의 무게는 달리기와 화해에 초점을 둔 디데이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한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둔 아버지의 길이 너무나 다른 작품이긴 하되 기본적인 구도와 구성은 엇비슷하다. 아버지의 길이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적 사실에 더 충실한 것일테고 디 데이는 한대식과 요이치란 두 젊은이에 너무 초점을 맞춘 것이라 현실성은 다소 떨어져 보인다. 더구나 이야기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대식과 요이치의 회고적인 기록으로 소설이 전개되어 더 더욱~
독립운동을 하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둔 아버지, 불령선인이란 낙인이 찍힌 대식의 가족이 일본의 작위를 받는 후지와라 요이치의 집에 함께 살게 된다.
둘은 동갑내기지만 첫 조우에서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이란 건널 수 없는 감정의 골,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하는 경쟁상대이기도 하니 둘은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된다.
일본 남작인 아버지가 불령선인의 가족을 돌본다는 것과 독립군의 후손이 일제 고위층의 후원아래 살아가게 되는 것이 현실성 있게 다가 오진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며 아들은 천황을 신으로 추앙하고 학업보다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아버지의 독일유학 권유도 거부한채로 자진입대하게 되는 인물이다. 뼈속 깊은 일본인, 반면 대식은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지역 선발전에서 요이치를 제치고 우승하나 교장의 음모로 면직된 코치에 대한 처우에 항의하다 영어의 몸이 되고 교장의 회유로 자진입대를 하게 되고 그들은 노몬한 전투, 굴라크 등에서 상상이상의 고난을 겪는다.
도저히 현실에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대식과 요이치의 인생을 뒤흔들게 된다. 탈출하여 일본군에 복귀하고자 하는 요이치의 집념,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요이치의 집에서 나오는 것 등)지고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고 싶은 대식의 집념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목적은 달라도 길은 하나, 결국은 둘은 힘을 합치게 되나 매번 하루 전 그들의 운명을 뒤흔들어 버리는 사건의 발생으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안타까움에 애간장이 절로 탄다.
노르망디의 조선인 포로 4인에 대한 기록은 정녕 사진만 남았을까? 역사의 파고가 일개인의 삶에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 남아 해야만 하는 뭔가가 있는 사람의 집념의 힘이 실로 놀랍다는 것을 보게 된다.
포로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일본군, 덴노 헤이카 만자이를 외치며 죽음 선택하던 일본군과 욱일기를 짓밟으면서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일본군, 자신이 선택한 전쟁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그들 모두가 피해자임엔 분명하나 화해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지만 삶을 위해서 원수의 손도 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한대식과 요이치가 존재했을 것이다. 대식의 바톤터치를 받아 대식의 삶을 살면서 대식의 꿈을 이루어지는 요이치는 현실세계엔 존재할 수가 없다. 왜 작가는 그렇게 끝을 맺을 생각을 했을까? 사학을 전공한 아내가 묻는다. 이 책 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읽었어~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영화 홍보물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다고 지적한 뉴스가 나왔다. 일본과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긴 해야겠지만 그 당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면 그들의 죄악이 더 극명하게 그려져야 한다. 저자가 에필로그에 영화를 통해 일본내에서 사회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는데, 헛된 기대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과가 들불처럼 열도를 뒤덮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건너온 일제시대, 내가 거기에, 한대식의 삶을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일제시대의 영향이 그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늘까지도 미치고 있으므로 그들이 사과를 하든 아니하든 관계없이 일제의 죄악상은 잊지말아야 한다. 일제의 한반도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집에 날강도가 들어서 쫓겨나고 후일 공권력 혹은 이웃의 힘으로 되찾은 집이 이전보다 좋아졌다고 날강도님 감사합니다를 그들이 주장할 것인가 한번쯤은 묻고 싶다.
대등한 입장에서 1만미터 달리기 경쟁자였다가 군에 입대하여 서로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손을 잡고 고난을 이겨낸 휴먼 드라라면 그들의 우정이 눈물겹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한 이상,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바톤터치 이상의 역사적 사실에 먼저 눈길을 주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