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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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시트콤 보다 더 재밌는 요코 할머니의 일기장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빵빵 터지고, 그러게 사는 게 뭐라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책에 끌렸던 건 순전히 개성만점 일러스트가 그려진 핑크색 책 표지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 유명하다는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도 제목만 알았지 직접 보질 못 해서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어쨌든 저자가 일본의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하니.. 어쩌면? 표지 속 저 스케치들을 더 크게? 더 잘? 구경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 실망하고 말았다. 윽! 그림이 별로 없구나. 있어도 표지랑 똑같고, 표지에 없는 건 표지에 있는 것보다 내 취향이 아니고……. 이렇게 어긋난 기대를 하며 삐걱삐걱 읽기 시작한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 <사는게 뭐라고>는 다행스럽게도 그림 보다 글이 더 알차고 맛깔나서 어느새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일본 할머니의 열렬한 팬이 되고 말았다.

 

 

 

 

<사는 게 뭐라고>는 10~20 페이지 정도 분량의 짧은 글이 총 15개. 일기 형식으로 묶여있는 에세이 집인데,

솔직히 처음 한 두 꼭지만 읽었을 땐. 휴~ 내가 이 나이에, 진짜 노망난 것 같은 일본 할머니의 글을. 왜 읽고 앉아 있는 건지? 앞으로 딱 몇 페이지만 더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다른 재밌는 책을 골라 봐야지 했었다. 그런데 50페이지도 채 못 가서 나는 그만. '이 할머니 진짜 뭐지?' 궁금해 지고 말았다. 

 


바로 여기. 이 장면인데, 키가 몹시도 커서 함께 다니면 요코 할머니의 새로운(?) 남자 친구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는 여자 사람 토토코씨와 함께 설 음식을 만들다가 서로 다른 요리법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사코 씨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닌 듯해서 나는 요리에서 손을 뗐다.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지나치게 많지만 사사코 씨에게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지나치게 많다. 사람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45

 


후힛, 아무래도 좋은 일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 여기 또 한 명 있어요. 저요! 저요! 하며 스르륵. 마음이 열리더니, 그 뒤부턴 요코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든. 그저 큭큭 거리며 받아들이게 되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 할머니는 (이런 말씀 정말 죄송하지만) 진짜 골 때리는 구석이 많으셔서. 헉; 이런 거침없는 표현을? 괜찮을까? 시시때때로 사람 마음을 쫄리게 만드는데.

이를테면 이런..

암에 걸린 사람들이 부러웠다. 암은 덤 같은 것이다. -112쪽

폭력은 근사하다 - 201쪽

‘애 낳는 기계’라는 말을 듣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여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209쪽 

 


잘못 봤다가는 진짜 노망난 할머니의 헛소리로 오해할 수도 있는? 이런 말씀도 찬찬히 앞뒤 상황을 알고 나면 아~ 오해가 풀리고. 끄덕끄덕하게 되고, 마지막엔 속까지 시원해진다. 

 

  1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암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눈을 끔뻑거리며 친절하게 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는다. 당신들도 시간문제야.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몇 배나 더 차가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점점 없어져갔다.
  사람들이 없어지게끔 내가 변하는 것이다.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폐인이 되어 몇 십 년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내심 암에 걸린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면 몇 안 남은 다정한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겠지. 내 우울증은 평생 낫지 않는다. 지금도 앓고 있다.
  암은 덤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암 수술을 집도한 의사 양반, 내가 아무리 할머니라도 남은 살을 주름 잡아 겨드랑이 밑에다 모아놓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고. 이 나이에는 목욕탕 말고 남들 앞에서 옷을 벗을 일이 없다 해도 그렇지, 모양 따윈 무시한 채 겨드랑이 밑에 주름 덩이를 만들어도 괜찮은 건 아니다. 1년이 지나도록 낫지를 않아서 팔이랑 주름이 아직 아프단 말이야. 내가 젊고 예뻤다면 의사 양반도 조금 더, 아니 상당히 신경 써서 솜씨를 발휘했겠지? 솔직히 말해보시지. 나에게는 주름도 덤이 되어버렸다.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p 112

 

 

텔레비전을 틀었다.

왕따 때문에 아이가 또 목을 매달았다.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일은 전염된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연달아 다른 비행기들도 추락하는 경우가 있다.

불쌍하게도.

아아, 인간은 이제 끝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 간 첫날 남자 대장에게 얻어맞았다. 교실로 돌아오자 반 전체 남자아이들이 차례로 나를 또 때렸다.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다 때린 다음에 “진짜 안 우네”라고들 했다. 나는 태연했다. 괴롭힘당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대장은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을 때까지 짐받이를 붙들고 땀과 흙 범벅이 되어 함께 뛰어주었다.

대장은 선생님한테 툭하면 얻어맞았다. 어느 날 드디어 대장은 선생님과 복도에서 맞짱을 떴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싸운 끝에 대장이 이겼다.

다음 학기에 대장은 반장이 되었고, 선생님과 대장은 몹시 사이가 좋아졌다.

폭력은 근사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겠지.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p 201


어떻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폭력은 근사하다.'로 빠질 수가 있는지? ㅋㅋㅋ  요코 할머니 진짜 엉뚱하지 않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 낳는 기계’라는 말을 듣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여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네네, 맞아요, 남자는 단순한 종마랍니다, 기계보다 못하지요, 모쪼록 힘내세요, 하고 웃으면 될 일을.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p 209 



이런 이야기들 외에도 정말 배꼽 잡는 에피소드도 너무 많고, 요코 할머니가 괴짜라서 그런지 주변 친구분들도 어찌나 독특하신지.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사람은 '희귀한 남자 K' (겨울연가 DVD를 배낭에 짊어지고 와서는 요코 할머니와 겨울연가 전편을 두 번씩이나 같이 본다. 심지어 희귀한 남자 K는 요코 할머니의 아들과 절친 사이임),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절로 나는 골동품 가게 싱글벙글 씨도, 신체장애 1급인 아내를 살뜰하게 보살펴주던 페페오씨도 기억나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장면.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쓸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p 242

  

 

리뷰요약: 웬만한 시트콤 보다 재밌는 요코 할머니의 일기장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빵빵 터지고, 그러게 사는 게 뭐라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직 한참 어린 내가(ㅋㅋ)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할머니의 일상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피식피식 웃을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얼떨떨 하지만 요코 할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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