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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소재원 지음 / 마레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눈물 콧물 찍어내며 밤새 이 책을 읽었다. 아.. 정말 뭉클하고, 가슴 아프고, 따뜻하고, 화르르 증오에 불타올랐다 또 숙연해졌다. 이런 글을 써주는 젊은 작가가 있어 참 다행이고, 더 늦기 전에 이 좋은 책을 널리 널리 알려야겠다는 소박한 사명감이 벌컥 들어 아직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른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려 노트북을 켰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한센병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얼핏. 일제 강점기. 위안부. 한센병이라는 단어만 봐서는 읽을 맛이 싹 달아나 버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실 처음엔 그랬으니까...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생뚱맞게도 TV 예능 프로 <인간의 조건>때문이다. 평소 내 지론이 '웃다가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인 터라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주말 예능 프로들을 짬짬이 챙겨 보는 편인데 그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TV 다시보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인간의 조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마음껏 웃을 준비를 하고 지켜보던 화면 속엔 뜻하지 않게 서대문 형무소 모습이 비춰졌다. 일제 치하에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그 생생한 현장을 혼자 숨죽여 지켜보다가. 결정적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앳된 얼굴로 독도 지킴이, 위안부 문제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머리를 한대 쿵 맞는 기분이었다. 아.. 저 어린 친구들도 저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여튼 TV를 끄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혹한 역사의 산증인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제는 연세가 들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계시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메아리로 계속 울려 퍼지고 있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그 와중에 나는 고맙게도 이 소설을 만났다.
이 글을 쓴 작가 소재원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훈남이시다. 심지어 83년생;; 얼굴 못지않게 책날개에 프로필부터 어마어마한데, 26세에 첫 장편을 출간했고, 28세에 쓴 소설 『소원-희망의 날개를 찾아서』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으로 만들어지면서 2013년 청룡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소재원은 전작 <소원>에서도 ‘13세 미만 아동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운동’에 앞장서 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데 아니, 이런 멋진 분을 나는 왜 이제 알게 되었을까!
그가. 이번에는 위안부와 한센병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이 두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겁고 힘들어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까지 나는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는데.. 어랏, 아직 10쪽 20쪽 밖에 안 읽었는데 책장이 저절로 막 넘어갔다.
굉장히 올드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줄 예상했는데, 세련되고 의식 있는 10년차 사회부 기자 유소영과 법대를 나와 수년의 고시원 생활을 정리하고 사회부에 입사한 그녀의 남편 한기준이 한 꼭지씩 교차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유소영 기자는 일제의 강제징병으로 전쟁터로 내몰리고 다시 또 한센병으로 소록도로 쫓겨 온 서수철 할아버지를. 한기준 기자는 위안부로 끌려가 죽음보다 더한 형벌 같은 삶을 견뎌야 했던 오순덕 할머니를 각각 취재하게 되는데..
바로 이 서수철 할아버지와 오순덕 할머니는 서로에게 순정을 주겠노라 약속한 정인이셨다. 아흑. ㅠㅠ 페이지를 넘길수록 두 분의 아름다운 사랑에 목이 메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분통 터지는 역사적 사실에 분노하며, 함께 울고, 안타까워하고, 두 분이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벌써 책이 끝나버렸다.
진짜 잘 읽히고, 너무 재밌고, 엉엉 울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먹먹한 가운데서도 한없이 따뜻하고,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구나!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나도 무언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다 같이 이 책을 함께 읽자고 만나는 사람마다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청소년 권장 도서로도 뽑히면 좋겠고, 서울대 대출도서 1위로도 뽑히면 좋겠다. 10만 부 50만 부 100만 부 계속 계속 팔려서,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출간되면 좋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위안부 문제와, 한센병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사람을 팔고, 거짓말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약자를 짓밟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너무나 잘 살아가는 최근의 사건들과 너무 겹쳐져 일제강점기 잔혹했던 역사 속의 그날이 결코 먼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아.... 정말 이 책을 다 읽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져 버렸지만 이쯤 해서 각설하고,
특히 인상 깊었던 구절들로 리뷰를 마무리하려 한다.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냐가 그 땅을 지배하고 나라를 지배하게 돼. 우리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꾸준히 살아가기만 하면 돼. 일본이 망했을 때 이 땅에 일본의 역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 힘 한 번 쓰지 않고 일본 땅이 되는 거야. 하지만 이 땅은 단군의 땅이며 그 후손들의 땅이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나라의 이름과 성은 바뀌겠지만 여전히 단군의 후예인 우리가 살게 되는 거야. 역사의 정통성은 그래서 중요한 거야. 그리고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해봐. 너희들 중 이곳에 끌려오기 전 한 나라의 국모가 시해되고 황제가 폐위됐을 때 심각성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니? 없었지?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 어떤 생각을 했어? 누구든 잘만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그게 무서운 거야. 일본이 패전해서 물러간다 하더라도 일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땅을 빼앗기는 거야.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야. 끝에는 결국 어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야.
♣ 그날 - 소재원 :p 243
“독립군과 같이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니야. 여기에서 나는 또 다른 독립운동을 시작할 거야. 맞는 거 따위 두렵지 않아! 비록 반항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할 테지만 끝까지 버텨낼 거야. 버텨내는 게 우리가 이기는 거야. 그래서 꼭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공부를 할 거야. 서양 말과 글을 배울 거야. 전 세계의 글을 다 배워서 일본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자행했는지 알릴 거야. 분명 일본은 패망할 거야. 확실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공격하고 있어. 일본은 외톨이야. 수많은 나라들과 독립군이 일본을 패망시킬 테지만 그 뒤가 중요해.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일들을 알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 그날 - 소재원 :p 145 ~146
리뷰 요약 : 이 책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한센병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얼핏. 일제 강점기. 위안부. 한센병이라는 단어만 봐서는 읽을 맛이 싹 달아나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잘 읽히고, 너무 재미있어 엉엉 울면서 다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먹먹한 가운데서도 한없이 따뜻하고,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구나!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나도 무언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런 책을 써줘서 작가님께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