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절판


나는 우선 혼자 있을 곳을 찾아 욕실로 숨었다. 거울 소게 평균 이상의 미모인 내 얼굴이 의외로 진지하고 그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의 외모 중에서 튼실한 다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얼굴은 마음에 들었다. 동그랗고 반반한 얼굴은 보통의 스무 살로는 어림도 없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태의 복잡성, 관계의 복잡성, 해결할 수 없이 유보되는 문제들, 모호한 분노와 은폐되는 진실들, 그 위에서 출렁대는 유동적인 현실, 그 현실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나...... 이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슬프고 지성적인 나의 두 눈동자여......
나는 신파적인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들어올리고 밸리댄서처럼 잠시 몸을 흔들었다.-48쪽

승지가 고맙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를 짓자 눈 속에 반짝 초록빛이 담겼다. 미소 지은 얼굴이 상상 밖으로 예뻐 나는 깜짝 놀랐다. 기쁠 때면 두 눈 속에 초록빛이 담기는 것도 유전일까? 자주 웃게 해주고 싶은 의욕을 고취시키는 놀라운 미소였다.-69쪽

그 시절에 대한 혐오와 그리움이 똑같은 밀도로 육박해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좋은가 싫은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해결이 필요한 내 감정의 과제였다.-79쪽

"꿈은 상실되고 자신을 돈과 바꾸어 살아야 하니, 삶 자체가 하루하루 이렇게 소모적이기만 한 건가 싶죠. 참 다들 고독하고 가련해요."
"그렇지만,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가 충실해야 했어요. 적어도 가정이 있고 아이도 있는 남자는요. 삶에 복무하는 것이 하찮은 일은 아니잖아요."
"할 수 있으면 그랬겠죠. 자기를 해체하고 재정비해서 다른 사람인 양 다시 살아야 했어요. 하지만 헌영인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윤진 씨도 배신감을 버리세요. 가정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못 했던 거예요. 어렵겠지만, 누군가 정말로 할수가 없었던 것에 대해 이해해보세요."-103쪽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귀신들처럼 피어났다. 꽃으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자기의 세계를 열며 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꽃 하나가 필 때마다 세계가 하나씩 생긴다고. 사람도 그렇게 자기를 꽃피워야 한다고.-117쪽

중년 남자들이란, 누군가 오래 쓰고 내놓은 가구같이 수상쩍다. 명품이건 싸구려건 찜찜하긴 마찬가짇. 엄마의 애인도 그랬다. 엄마가높은 점수를 준 건, 이십 년 넘게 한 직장에 근무한 성실성 정도가 아닐까? 하긴 아무리 점수를 깎아도 몸가짐이 단정하고 눈빛이 남달리 반짝이는 것까지 기어이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속으로 아이고, 했다. 엄마가 먼저 와주길 바랬던 것이다.-118쪽

"우린 무언가를 할 때마다 실패도 하고 상처도 입고 후회도 하지.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 사는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이 무너지지. 하지만 중요한 건 다시 하는 거야."
아저씨는 정말 마음이 다 무너져본 사람 같았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 이혼을 했고 그 후로 아이도 잘 보지 못하게 되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그럴 때, 난 쉬운 일만 해. 심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하지. 쉬운 일도 규칙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힘이 생겨. 그리고 시간이 가면 그게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걱정 마, 곧 그렇게 될 거야."-122쪽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온 엄마는 어쩐지 더 나이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미용사가 부풀려 올린 드라이가 문제였다. 마치, 그래 난 나이 든 중년 여자고 다 포기했다, 어쩔래, 하는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123쪽

아저씨가 없다면 엄마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늘 혼자 밥을 먹고 외식이라곤 하지도 않고 영화도 보지 않겠지. 아무도 예뻐하는 눈으로 보아주지 않고 선물도 하지 않겠지... 초저녁이나 한낮에 잠이나 자며 늙어가는 건 너무 가엾다. -126쪽

"엄마, 사람들은 애를 왜 낳는 거야?"
이따위 세상에, 라는 말은 삼켰다. 엄마의 눈은 예전처럼 바르르 떨리지 않았다. 엄마는 나와 승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예사롭게 말했다.
"살아보려고 낳는 거야. 더 열심히, 더 사랑하면서, 도리를 다하며 끝까지 살아보려고...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래."
"자기들이 살아보겠다고 애를 낳는다고?"
비난하는 나를 엄마는 연민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꼭 그러 것만은 아니야. 때론 생명이 그 자체의 힘으로 준비 안 된 여자들을 덮치기도 하는 거야."
엄마는 원치 않는데도, 라는 말을 삼켰을 것이다.-156쪽

여긴 아주 가까운 친척집이야. 난 친척 아주머니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 놓고 지내."-157쪽

이 살벌한 현실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고? 나도 아빠와 한편이었어. 인간인 이상,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게 있어. 그래서 싸우는 거지. 난 모두에게 저마다의 잠과 저마다의 싸움이 있다고생각해. 그 잠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즐기면, 영영 꿈에서 깨어날 수 없어."
나도 언젠가 운명의 물레 바늘 같은 것에 찔려 잠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실감 없이, 마치 괴로운 꿈을 계속 꾸는 잠 속인 것만 같으니까. 성벽을 감는 넝쿨들만 마구 뻗쳐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나를 구하기 위해, 언젠가는 칼을 뽑아들고 넝쿨에친친 감긴 왕국으로 한발 한발 들어가야겠지. 몇 번이고 쓰러져 죽고, 또다시 발밑에 쌓인 나 자신의 해골들을 차내며 들어가겠지. 나는 나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162쪽

"걱정마. 다른 의미는 없어. 선배가 이 시계를 맡아주면, 나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거 같아.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의 후원을 받는 작은 별같이 힘껏 반짝일 수 있을 거 같아."-180쪽

"아, 누가 돈만 좀 벌어다주면 딱 좋겠는데......"
하지만 엄마는, 항생제를 투여하듯 즉시 자기비판에 들어갔다.
"빌어먹을 망국적인 의존 기대증이 아직도 고쳐지질 않는군."
그리고 주문을 외우듯 자주, 자립, 자애, 자위, 라고 중얼댔다.-185쪽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잘못을 해도 좋아.....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내가 아저씨를 사랑한다는 거을 알았어."
나는 조금 놀랐다. 타인에게 그런 마음음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상처가 많이 생긴단다.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주어도 마음이 아프고 헤어질 때 한번 더 돌아보지 않고 총총 가버려도 상처를 받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상처가 되고 언젠가는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도 상처가돼. 인간인 모든 게 선물인 동시에 상처가 된단다. 우리가 인간이어서 하는 잘못과 불가항력을 승낙하기로 한 거야."-204쪽

우울이 계속될 때면 일부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문판으로 읽었다. 영문판으로 읽으면 훨씬 더 이상하고 재미있어진다. 이상한 나라로 미끄러져 들어간 앨리스는 삼거리에서 토끼를 만나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하니?"
토끼가 대답한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어디든 상관없어."
"이쪽으로 가면 미친 사람들이 살아."
"그럼 저쪽으로 가야겠네."
"저쪽으로 가도 미친 사람들이 살아."
"그럼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야. 어디든 미친 사람들이 살거든."-211쪽

"산이 푹신푹신해 보여."
승지의 윗입술 위에 우유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하늘 위에서 저 산으로 떨어지면 내 몸이 탱탱볼처럼 토옹,토옹 튀어오를 것 같아."
내 몸도 토옹토옹 튀어오르는 것같이 갅러워 웃음이 나왔다. 승지도 킥킥대고 웃었다. 웃음이 뒤섞이며 커지자, 둘이 손을 잡고 산 위로 통통 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웃음 끝에 눈물이 맺혔다. 공중그네를 타는 서커스 소녀처럼 소을 바꾸며 이곳과 저곳을 오가지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때론 고리를 놓치고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저산은 우리를 푹신푹신하게 받아줄 것이다. 강과 바다와 이 세상 모든 바닥 위로 나는 탱탱볼처럼 토옹토옹토옹 튀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225쪽

"비밀을 하나 말해줄게."
승지가 은미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 말이야.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일기를 써."
일기를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나를 보면 내가 지금 어떤 꼴인지,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훨씬 분명해져."
음...... 승지는 여러모로 나를 놀래키는 아이였다.
"그리고 웬만한 일도 그리 아프지 않아. 통통볼처럼 말이야."
아, 통통볼처럼...... 나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에 감동해 바보처럼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226쪽

"네가 보기엔 누가 타락한 사람이니?"
"친척 아줌마."
승지는 엄마를 그렇게 불렀다.
"우리 엄마가?"
"좀 타락했어."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애인이 있다는 것 때문일까?
"넌 타락이 뭐라고 생각하니?"
"타락이란,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사는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중학교 이학년생이 인생을 이렇게 종합적으로 거론하다니...-229쪽

"그런데 아빠는 타락했어, 안 했어?"
"아빤 자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존경스러워. 범죄자도 되지 않았고, 최대한 평범한 척하며 살아. 감정 기복도 별로 없고 우울해하지도 않는다구. 대단하지."
-230쪽

"모든 것에 가격이 붙어 있는 이 세계에 속지 마. 때가 되면 네가 가격의 질서에서 버서나 살게 되기를 바란다."-233쪽

"엄마는 나를이해시키지 않아도 돼. 엄만 내게 그럴 의무 같은거 없어. 난 엄마가 행복하면 다 이해할 수 있어." 진심을 다해 말하느라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나도 그래. 호은아, 나에게 상처ㅡㄹ 준다 해도, 네가 행복하면 난 너를 이해할 거야."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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