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기 딱 좋은 날 - 정끝별의 1월 ㅣ 시의적절 13
정끝별 지음 / 난다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의 시와 산문이 담겨있는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는 고요하게 읽기 좋은 시리즈다.

- 내게 밀려오는 것들이 벅찰 때, 내게서 떠나가는 것들이 아릴 때, 떠올려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제 소중한 걸 부려놓고는 홀연 거두어 제 습성에 맞는 곳으로 자리바꿈을 한, 나의 너와 너와 너를 풀어내 여기 두서없이 앉혀놓는다. 내게 잠시 머물렀다 이만 총총 사라지는 숱한 나의 너들의 목록이랄까. - 9

- 그래,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데...... 어차피 지나가고 지나가는 것일 뿐인데 그것도 성큼성큼...... 이렇게 되뇌로라면 몸속에 가득찼던, 날 선 분노나 갈애, 쪼잔한 근심들이, 싸- 하니 빠져나가곤 한다. 지나가는 것들에 의지해 나는 간혹 철이 들기도 하고, 끝인 듯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문득 가벼워지기도 한다. 물론 순간이다. 순간이 아니라면 나는 철이 너무 들어 무거워지다 못해 땅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 50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앙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111

2025. may.

#시쓰기딱좋은날 #정끝별의1월 #정끝별 #시의적절시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토지 20 - 5부 4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0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세대들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희망차지는 않다.
막바지에 이르러 기력을 다한 듯한 서희에 대한 서술이 고통스러운 세월이 흘러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막상 한 권을 남겨두고 나니 읽기가 더뎌진다.

- 그래 맞다, 맞어. 일본인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지. 정복, 정벌이라는 그 달콤한 말에 길들여져 왔으니까, 정말 일본인들은 모두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걸까?
천만에요. 다만 죽을 각오를 강요당하고 있을 뿐이지요. 죽음을 강요하는 그 열렬한 분자야말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할걸요? 국민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ㅜ멉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 한다면 국민은 살릴 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 91

- "굉장해요. 모든 게 다 넓어요. 굉장히 넓어요."
"그래 모두가 다 넓지. 생각이 아득해질 만큼 만주벌판은 넓어. 일본의 국토도 이렇게 넓고 섬이 아니었던들 좀 더 멀리 세상을 내다볼 수도 있으련만."
"그렇지만 일본은 이 넓은 대륙을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쇼지의 그 목소리는 일본인의 목소리였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러나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어째서요? 일본의 지배 밑에 있는데도."
"일본은 다만 왔다가 가는 사람이야. 이 땅의 임자는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 이 땅에서 태어난 민족이지. 그것은 쇼짱도 알아두어야 해." - 134

2025. jul.

#토지 #5부4권 #박경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ㅣ 창비시선 427
김사이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삭막한 서술들...
가난한 노동자의 쓸쓸한 시선.
건조하고 무덤덤하여 더욱 그렇다.

<거리에서>
문을 열고 나가니
안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안이다
끊임없이 문을 열었으나
언제나 안이다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내가 있다
내게서 나누어지는 물음들
나는 문이다
나를 열고 나가니
낭떠러지다
닿을 듯 말 듯 한 낭떠러지들
넋 나간 슬픔처럼 떠다닌다
나는 나를 잠그고
내가 싼 물음들을 주워 먹는다
(전문)

- 지독하게 살았으나
지독하게 죽어가겠구나 - 고시원, 아름다운 날들 중

-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 내 죄는 무엇일까 중

- 그늘의 딸로 태어나 그늘진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들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 저항의 방식 중

- 아이는 한발짝 한발짝 어른이 되어가지
색이 다르고 성이 다른 것을 차이라 말하고 차별하지 않는
고운 네가
내 죽음을 네 죽음처럼 보살피는 사랑이지
절망으로도 살아야 하는 이유이지 - 사랑 중

- 깊은 바닥 검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심장을 찌른다 폭발하는 내가 툭 튀어나와 익숙하게도 가장 약한 것을 물어뜯는다 시시때때로 폭주하는 나와 나와 나로 가득하다 도처에 사람이 위험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험하다 - 생각도 습관이 된다 중

- 더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늙는다는 것 늙었다는 것
몸도 마음도 다 내주고 아무것도 없는
삼류들에게 추억은 왕년의 젊음은
쓸쓸함을 더하는 독주
그저 독주를 들이켜며 시들어가는 현실은
도대체 예의가 없다 - 보고 싶구나 중

-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자본과 노동이냐고 심드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오늘의 자본과 노동이 지난날의 자본과 노동이 아닌 것은 맞지만, 자본과 노동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맞는다. 자본은 너무 화려하게 전면적이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고, 노동은 바닥으로 버려져 그림자가 되었다. - 해설 중

- 아직 할 말이 많은가보다
아직 반성할 기회가 있는 것이겠다
아직 길은 있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아직 산다 - 시인의 말 중

2024. dec.

#나는아무것도안하고있다고한다 #김사이 #창비시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두가 예쁜 비치 ㅣ 타이피스트 시인선 10
오영미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묘한 판타지 애니메이션 같은 시들.
엽편 소설처럼 여러 이야기들을 읽은 기분이다.

가상의 인물과 설정이 가미된 시의 형식이 이전에는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이 시집은 이상하리만큼 흥미롭게 읽었다.
소재나 시어들이 친밀해서 일까.

마녀 같은(positive)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
세상의 모든 것이 권태롭고 가소로운 정신 나간(positive) 화자가 펼치는 원맨쇼 같기도 하다.

너무도 마음에 들어버린 시집. 강추한다.

- 아무 데도 가지 마, 곁에 있어
그리고 견뎌
이런 우리를 끝끝내 견디란 말이야 - 시인의 말

- 06:17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나네요 저는 이 시절을 살아 보지도, 겪어 보지도 못했는데...... 근데 댓글 상태 왜 이럼? 님 뭐 시인...... 그런 거임? - [playlist] 세일러복과 문학소녀 중

- 그 자리에서 뒈져 버려라, 중얼거리고 싶은데 이미 뒈져 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군요. 이딴 소리를 지껄여 나를 구역질 나게 하지 마십시오. -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중

- 어째서 제 시 이야기로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거죠? 제 시에 대해서는 솔직히 하고 싶은 말도 없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는데...... 이제 그만하세요. 제 시는 후후, 불면 구멍이 뚫리는 솜사탕처럼 달짝지근한 감상을 받을 주제가 못 되고, 무엇보다 이런 대화, 사실은 자기 손톱에 낀 때만큼의 관심도 없는 서로의 작품을 향해 의미 없는 칭찬을 핑퐁처럼 주고받는 그치들의 대화와 다를 바 없잖아요. 저는 그런 거 무지무지 싫어한단 말이에요. 정말이지......
(...)
나는 중얼거렸다. 하릴없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 여보세요? 어머, 어떡해. 전화 끊으셨나 봐. 아니면 나를 영영 차단하신 건가? - 이 이야기는 명백히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모두 가공된 것입니다 중

2025. sep.

#모두가예쁜비치 #오영미 #타이피스트시인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띠지에 '시적이며 강렬한 로드 소설이자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가족 서사의 탄생'이라고 적혀있다.

​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

시적인데 지루하기도 하고 강렬한 로드 서사지만 갑갑하고 충돌만이 예상되는 이야기이고

뇌리에 떠나지 않을 가족이긴 한데 비문명과 심리적인 폐쇄성, 개선의 여지없는 현실에 좌절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전미도서상도 수상하고 온갖 매체에서 추천한 책이지만

지극히 미국적 서사이기도 해서 크게 와닿지 않았다.

흑인들의 핍박과 한의 역사들을 환상적인 요소로 덧붙여 풀어나갔지만 그 지점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

초반부터 너무 성숙해져버린 소년 조조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던 탓에

조조의 부모 레오니와 마이클만 등장하면 답답한 심정이 된다.

모성의 결핍이 오직 레오니 탓만은 아닐지라도, 이 캐릭터의 모든 변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마이클 보다도 레오니를 더 미워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 부모에게서 동생 케일라를 지켜줘야 하는 조조의 심리적 중압감 때문일까...

​

그리고 대를 이어 등장하는 미시시피 주립 교도소 파치먼이라는 공간이 주는 심리적 거부감이 이야기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

영혼으로 등장하는 기븐과 리치의 존재도... 원인.

​

새삼 느끼지만... 마약과 총기가 미국을 망쳤구나 싶다. 이 이야기가 그 지점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상만 남았네.



​

- 케일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레오니가 케일라에게 저걸 먹이지 않으면 좋겠다. 레오니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아빠가 아니다. 그녀는 살면서 그 무엇도 낫게 해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었건만, 본인은 그걸 몰랐다. - 157

​

-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나는 그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다. 나는 쇠고랑이 살갗을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죽에 살점이 버터처럼 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기가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내 속을 움푹 파내 조롱박처럼 텅 비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 다른 부분 역시 움푹 파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필사적으로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을 수 있다는 것을. - 260

​

- "넌 내 아기잖니." 엄마가 숨을 몰아쉬었다. 쇠살대가 부서지며 녹슨 침묵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장막을 걷어서 네가 이 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네가 장막을 좀 걷어다오." - 304

​

- 난 지금은 엄마가 될 수 없어. 난 딸이 될 수 없어. 난 기억할 수 없어. 난 볼 수 없어. 난 숨 쉴 수 없어. 그리고 마이클은 그 말들을 들었다. 같이 천천히 일어나 나를 안아 들고 차로 데려 가줬으니까. 그는 나를 조수석에 앉히고 문을 닫고 운전대 앞에 앉았다. 차에 타니 세상은 한층 가벼워졌다. 이 둥근 유리창 안의 나와 마이클로, 저 가증스러운 환한 빛과 주춤거리며 도랑으로 사라지는 개들과 유순한 소들과 빽빽한 나무들로, 내가 뱉은 말들과 엄마의 회색 종이 같던 얼굴과 내게 따귀를 맞은 조조와 미카엘라의 얼굴과 움츠러들던 아빠로, 그리고 두 번이나 떠난 기븐의 기억들로 쪼그라들었다. 우리의 세상은 수족관이었다. - 385



2025. aug.

​

#묻히지못한자들의노래 #제스민워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