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옐로 ㅣ 문학동네 시인선 106
장이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뿌연 확률의 세계로만 존재” 한다는 시의 운명론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시인.

무척 좋았다.

여담이지만 2014년인가 2015년인가 백담사에서 신경림 선생님으리 뵌 적이 있다. 저 ‘준열한 꾸짖음’에 대해 내가 항의 비슷한 것을 해보았다. 선생님은 기억을 못 하신다고 하셨다. 당신께 원한을 품고 시인이 된 이들이 많다고 덧붙여 주셔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 120

하늘은 또
알타이어족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 없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
노란빛이 되어
내 방의 창문을 물들이고
나는 다시 뾰족하게 성을 내는 아이가 되겠지
벼락이거나, 장대비겠지 - 레몬옐로 중

노랑이가 거뭉이를 낳고 거뭉이가 얼룩이를 낳고 얼룩이가 연탄이와 검은 꼬리를 낳고
노랑이와 거뭉이와 얼룩이가 사라져간
고양이들의 황홀한 역사를
오후의 빛은 전부 기억하는 걸까 - 오후의 빛 중

단추를 잃어버린 것은 너만은 아닐거야.
우린 모두 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인생들.
밤은 자기 자신의 세계관 쪽으로 점점 부풀어가고
우리들 마음의 살에도 언젠가 비늘이 생기는 때가 오겠지. - 밤의 세계관 중

사람이라면 이렇게 외로울리 없다고
내 친구는 위서처럼 서러운 말을 했다 - 키메라, 유령 중

2018.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문집이다. 공감하려는 마음, 같이 슬퍼 하려는 마음이 제목 그 자체로 드러난다.
이 뜨거운 글을 쓰는 사람이 슬픔의 공부를 더 의미있게 하게끔 하는 사건은 분명 세월호일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매일 매일 생각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니...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다 이 예민한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평론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나. 꽤 오래전인것 같다.

문화와 소설, 시, 정치, 사회에 대한 글들이 묶여 있는 이 산문집은 무척 친근한 감성을 전달한다. 이심전심.
그러나 나는 저자보다 뜨겁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온전하게 공유하기 위한 공부라는 것을 더 진지하게 해야겠다. 외면하는 일이 없게...

이미 읽은 책들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공감이 더욱 쉬운 글이었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 28

아름답고 위대한 많은 것들이 덧없이 사라진다. 건물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라진다. 전통과 명성이 사라지고, 신념과 우정이 사라진다. 나이를 먹고 보니, 라고 건방을 떨 나이도 아닌데 나는 이 세상 많은 것들의 덧없음을 점점 더 자주 느낀다. 그리고 그 덧없음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그걸 눈치 챈 어떤 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멸은 인생 감정 공부의 마지막 단계지. 자네는 이참에 좀 더 성숙해질 모양이군” 그런가. 그렇다면 이 ‘성숙한 환멸’은 앞으로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 64

작가는 어째서 ‘post coitum’을 지우고 ‘animal triste’만 남겨놓았나. 우리가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저항하는 일이, 요즘의 내게는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 70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 173

2018. sep.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8-09-29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73페이지 인용문 참 좋으네요.

hellas 2018-09-29 20:26   좋아요 0 | URL
네 책읽는 일을 응원하는 힘나는 문장이에요:)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 오지은의 유럽 기차 여행기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능한 구석자리에 앉아서, 아름다운 것이 보고’(6) 싶은 것 치고는 꽤나 먼곳을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는 이야기.

여행 욕구를 글로 대체하는 편인데다, 마침 지난 번 에세이를 공감하며 읽었던(익숙한 새벽 세시)터라 얼른 골라들었다.

여행에 딱히 목적이 있을 필요가 있나. 사는 건 저쪽이나 이쪽이나... 어차피 지구인... 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이곳을 벗어나 다른 어딘가에서 정처없이 걷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류의 감동은 식은지 오래다 보니 비슷한 감성의 여행자가 들려주는 소소한 감상들이 오히려 좋다.
주거지 근처에서도 느낄 법한 사소한 감정들을 객지에서 느낄 때의 차이라면, 외롭다는 감정의 깊이 차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만 두꺼운 종이로 만든 책은 자꾸 스스로 덮힌다. 덮히려는 책과 협상을 거듭하며 읽었다.

자본주의의 친절에는 외려 진심이 있다. 네가 여기서 돈을 쓰고 가는 한 나는 네게 잠시 사랑을 줄 거야. 아무렴, 나는 그 사랑을 남김없이 받아갈 것이다. - 26

나중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지금이 있다. 어찌되었든 떠날 수 있는 지금. - 47

창문 너머 설산을 보며 가방을 쌌다. 콧물이 나온다. 진경산수화 아랫집에도 집먼지 진드기가 산다. 마음이 놓인다. - 51

찡그린 눈으로 창밖을 보며 세상의 절경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 화면으로 보는 것이 최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55

역은 소문대로 아름다웠고 파도 소리는 애잔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허무하고 외로웠다. - 142

2018.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데라토 칸타빌레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자신의 강렬한 경험이 기반이 되었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

뒤라스는 경험에 빚졌다면, 모호한 서술법은 자기방어를 위한 방법일까.

넘을 수 없는 선 위의 위태로운 중산층 여성은 요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시대적 상황이라는 한계에 한 겹 더 감추어져 있으니.
그런 측면에서 대담한 글쓰기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모호성 덕에 캐릭터의 힘을 느끼기는 어렵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사랑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라도 있었더라면 조금 더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게 된 침묵(60)에 대해 말하면서 침묵하는 화법은 갑갑하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고, 그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하고 쇼뱅이 말했다. “점점 더 늦어지고 있어요.”
“오늘 저처럼 이렇게 터무니 없이 늦게 되면, 조금 더 늦거나 덜 늦거나 결과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는 법이죠.” -91

조금 더 설명하거나 덜 설명하거나 결과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뜻일까.

2018.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0km를 걷는다는 행위를 전제로 아이들이 성장한다.
물론 정체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한가.
‘새삼스럽지만 희안한’ 밤을 걷는 행사는 일종의 극기이고 피크닉이라고 부르기엔 버거운 행위지만, 청춘들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위험요소가 비교적 적은 어둠이라는 점에서는 성장소설의 영리한 장치가 된다.
주인공인 두 캐릭터가 특히나 성장하는 반면, 조력하는 캐릭터들은 왜인지 이미 무럭무럭 자라남이 완료된 상태인 점, 갈등 해소를 위한 ‘요정’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은 작위적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 청춘들의 갈등은 아직까지는 무해하다.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같은 좌절이 ‘아직’은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순간, 그들이 간직한 순수함과 무구함이 개의 사체를 바라보는 순간 젊음의 오만으로 반전되었다. 이 사소한 장면에서 든 거부감은 아무래도 내가 더 이상은 ‘청춘이 아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온다 리쿠가 그리려 했던 ‘관통’은 충분히 이해했으나 나에겐 이미 오래 전 건너온 시절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지나치면 다시 없을 순간들에 대한 예찬은 살다보니 희끄무레하게 바래진 사소한 기억일 뿐이다.
이제 내가 걷는 생은 익숙한 것들의 반복일 것이고, 지나쳤다 생각했으나 어쨌든 여기서 저기, 저기서 여기인 시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감상과는 별개로
청춘들이 통과할 어둠 속에서 그들이 진심으로 상처입지 않기를 기원한다.
온다 리쿠가 바라는 점도 그것이었을 것 같다.

보행제가 끝나버리면 이제 이 코스를 달리는 일도 없겠구나.
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 19

한참 바람을 맞으며 해안의 길을 걷고 있자니,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무방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하고 있는 몸이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듯하여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다. 건물 속에 들어가고 싶다. 어딘가 몸을 숨기고 싶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다. 그런 충동이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솟구쳐 올라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이런 기분을 말하는 것이겠지. - 90

정말로, 정말로, 사소한 내기였다. 내기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작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니시와키 도오루에게 말을 걸어, 대답을 듣는 것.
겨우 이것이, 이 단체 보행 동안에 자신과 한 내기였다.
얼마나 시시한 내기인지. 그러나 이 간단한 것이 3학년이 된 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겼다. 나는 이겼다. - 204

2018. se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