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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ㅣ 펭귄클래식 36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좋아하던 책들이 몇 권 있다.
그 책들의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들으면 그 시절 내가 그 책을 읽던 방의 냄새와 방바닥의 따스한 온기가 떠오른다.
부엌에서는 찌개 끓는 소리가 들리고, 말라깽이에다가 울보였던 동생은 낮잠을 자곤 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지 못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그 시절.
책을 통해서 들어간 세계는 어찌나 나를 흥분시켰던지 모른다.
이 책 <로빈슨 크루소>가 그 대표적인 책이다.
항해를 하던 중 난파를 당한 로빈슨이 한 섬에 도착하여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린 나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흥분을 만끽하게 하였다.
무인도라는 아득한 공간에 대한 부러움과 그리고 스스로 물건과 음식들을 만들어가는 로빈슨의 삶에 대한 연민이 어쩐지 어린 나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서 지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촉매가 되곤한다.
항상 내게는 그리움의 소재가 된 <로빈슨 크루소>를 완역본으로 읽어보고픈 소망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은 어린이용이어서 아무래도 그 내용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이번에 읽게된 펭귄의 <로빈슨 크루소>는 서문과 판본에 대한 해설, 그리고 본문, 작가 연보, 주해를 포함하여 총 435쪽에 이르렀다.
결코 짧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한 로빈슨의 삶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정보들은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서문에서는 시대적 배경과 작가 디포의 삶을 통해서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간의 사상과 행위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여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어린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던 여러가지를 알게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당시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저 로빈슨이 스스로 '절망의 섬'으로 부른 섬에 당도하기 전의 그의 삶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되어서 그가 섬에서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게되었다.
그는 여러번 위험한 항해를 하고 해적에게 납치되어서 노예의 삶을 산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해적에게서 탈출할 때 자기를 도와준 노예 소년 수리를 자신을 구해준 포루투갈 선장에게 팔아넘긴다. 게다가 그가 난파하게 된 마지막 항해의 목적은 아프리카 해안에 당도하여 노예를 사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섬에 찾아 오게 된 프라이데이를 스스럼없이 노예롤 삼는다. 그와 그 시대인들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라지 않는가.
또한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따른 것이지만, 너무나 종교적인 색채들(가톨릭 교도, 기독교도, 이교도들)이 짙어서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구별할 때 종교를 이용했다.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데 프라이데이의 의사를 묻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프라이데이를 인간답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니까 그는 프라이데이를 개종시켜 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 섬의 왕이라 칭하는 봉건적인 사고들을 보여주고, 탈출한 후에는 자기(?)의 섬에 여자를 사서 보내기까지 한다.
어릴 때는 깨닫지 못했던 못마땅한 점들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여전히 로빈슨이 섬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로웠다. 더 길고 더 자세하게 나는 로빈슨이 집을 짓고 빵을 굽고 염소젖을 짜는 일들을 구경했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는 일기를 썼고, 날짜를 헤아려 신을 찬미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버려진 삶에서도 신의 뜻을 찾으며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상황.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면서도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