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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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시간동안 나는 찰스턴의 주민이었다. 나는 레오가 배달하는 신문을 읽고,  배터리를 산책하며 요트클럽에서 점심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지도에서 찾아 본 찰스턴은 미국 동부의 남쪽에 있는 해안가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보면서 수 차례 들었던 지명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곳, 나른한 공기와 뜨거운 햇볕과 속삭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은 한동안  이 소설 < 사우스 브로드 South Of Broad >에 빠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시간 축은 두 가지이다. 1969년과 1989년의 두 서사공간을 넘나들면서 상처받은 주인공 레오폴드와 친구들의 고교 시절과 어른이 된 후의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수 많은 찰스턴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대하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을 준다. 다양한 인간들이 얽히고 설켜서 자아내는 온갖 갈등과 사랑은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1969년의 레오는 우울한 소년이다. 어린 시절 찬란했던 형의 자살을 목격한 후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있었던 레오는 고교에 진학한 후 채 적응하기도 전에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다. 몰론 그 마약은 레오의 것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주인의 이름을 대면 안 될 것 같았던 레오는 입을 다물고 전과자가 되어 그 벌을 수행하게 된다. 비록 봉사활동 명령으로 만나게 된 캐논씨지만 레오는 성심으로 그를 대하고 살아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새벽 네시에 신문을 배달하고 과자를 굽고 바느질도 할 수 있는 레오, 그는 다정한 성품과 부모의 소신있는 교육으로 흑백 차별이 심하던 그 시절에 흑인과 고아와 친구가 되었고, 아픈 상처가 있는 아름다운 앞집 쌍둥이들과도 영원한 우정을 나눈다.
 1989년의 레오는 그의 날카롭고 위트있는 칼럼으로 찰스턴의 유명인사이다. 그의 멋진 친구들은 모두 찰스턴의 한 구성원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도 서로였다. 그들은 시바의 쌍둥이 트레버를 찾기위해서 긴 모험을 하기도 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때로는 헤쳐놓고 치료를 하기도 한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들은 가장 큰 상처도 가장 큰 위로도 서로에게 가능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 시간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상대의 단점조차도 뛰어넘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 관계,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친구를 사귀고 연인을 사귀고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것 역시 힘들고 아플 때 서로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서일지도 모르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믿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자 행복이라면 우리의 주인공 레오는 가장 큰 성공을 한 것이다. 그의 친구들의 연결고리는 레오였고 그들은 레오를 사랑했다. 그것보다 큰 성공이 어디 있을 것인가.
 레오와 그 친구들에게 빠져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내 주위를 둘러본다. 어딘지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레오처럼 풍부한 삶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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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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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뇨르 C에게 안야와 함께한 그 시간들은 어쩌면 가장 운 나쁜 해가 아니라 백조의 울음처럼 마지막 찬란한 햇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 여자가 세탁실로 들어오는 순간, 일흔이 넘은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그는 그녀의 치마가 짧다는 생각을 한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과격한 의견을 쏟아놓은 책을 쓰던 (그것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판되는) 세뇨르 C는 직업이 없다는 안야에게 타이피스트를 제안한다. 안야는 가끔 우라늄(uranium)을 소변기(urinal)로 타이핑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이라든지 추억같은 것은 만들어질 시간이 없었다. 안야는 세뇨르C의 눈을 통해서 앨런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앨런의 모습을 발견한다. 안야는 그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세뇨르C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의 '강력한 의견'들을 읽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성찰의 꿰뚫는 시각을 그녀는 갖게 되었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가벼운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세뇨르C는 안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만 그가 안야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바라볼 뿐,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한 페이지가 세부분 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세뇨르 C가 구술하고 안야가 타이핑하는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와 세뇨르 C의 시점과 안야의 시점이 한 페이지에 동시에 드러난다. 처음엔 한 페이지씩 읽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특히 세뇨르 C의 의견들은 그다지 부드럽지 않아서 다음 페이지에 이어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었고, 아래의 소설들도 역시 짧아서 아쉬웠다. 나중엔 에세이를 하나씩 읽고 세뇨르와 안야를 읽기도 하고, 흥미로우면 세뇨르의 이야기를 혹은 안야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에세이를 몰아서 읽기도 했다. 세뇨르의 '강력한 의견들'이 버거워질 무렵 '두 번째 일기'라는 제목으로 좀 더 부드럽고 일상적인 그의 생각들이 드러났다. 그것은 안야의 제안으로 쓰게 된 수필들이었다. 안야는 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기뻐했다.
  쿳시의 소설은 처음 접해 보았다. 신선한 시도와 발상이 흥미로웠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긴 이후에는 남아공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하기를 멈춘 그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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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 2009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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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불편한 진실과 편리한 거짓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하는 주제였다.

그 때 예로 든 것은 "만일 내가 입양아라면 부모가 그 이야기를 해줄 것을 바랄 것인가. 아닌가."  "만일 애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그것을 알고 싶을까, 그냥 모르는 채가 나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가장 많은 논란이 된 것은 "만약 내가 죽을 병에 걸려서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고 싶을까, 모르고 싶을까 "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싶다."에 한 표를 던졌다. 만약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고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 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박민규의 소설 <근처>는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주인공 호연은  고향 마을에 들어왔다. 부모의 불운으로 어린 시절 숙부의 집에 맡겨져서 자란 그에게 이 곳은 고향과 다름이 없다. 호연은 다가올 끝을 시작한 곳에서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직장 밖에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기대는 가족은 없다. 그야말로 홀홀단신인 호연. 그가 남기고 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다지 이승에 미련이 남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애써 피하는 것이 다만 여기에 남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닐 듯 싶다. 그럼 과연 무엇일까? 우리의 두려움의 색깔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언젠가는 가야할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모르므로 두려워하는 것일까?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남기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호연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마을에서 어릴 때의 친구들과 만난다. 그들과 함께 했던 타임캡슐을 열어보고 그 때를 추억하면서 이제서야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너무도 달라진 그 친구들과 새로운 만남에 살짝 설레기도 한다. 잊고 지냈던 따뜻한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호연은 미진한 숙제를 하듯이 마음을 정리하는 듯 싶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내가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작가의 나이가 나와 비슷한 연배여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디서 어떻게 내 인생을 정리할 것인가. 호연과 다르게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많은 나는 어쩌면 더 할 일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들 그런 말들을 했나보다. 가진 게 많을 수록 삶이 더욱 무겁다고들 말이다. 무엇부터 내려 놓아야 인생이 가벼워질까? 물질일까. 사람일까. 아니면 혹시 나의 마음 속의 욕심들일까? 박민규의 이 소설은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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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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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이지리아의 위치를 먼저 찾아 보았다.

어딜까?

아프리카 대륙의 중서부의 토고와 카메룬, 니제르 사이의 나라. 그 옆의 베냉이라는 나라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토고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내전을 치른 라이베리아와 소년병들의 아픈 나라 시에라리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리틀비가 자신과 언니 카인드니스를 잃은 곳, 앤드류가 이미 아내를 잃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린 곳, 새라가 앤드류를 잃고 손가락을 잃은 그 바닷가는 어딜까? 지도상으로 보면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의 남쪽 방향으로 거대한 바다가 있다. 아마도 저기 어딘가이겠지?

참혹하게 살해당한 언니에게 작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이제는 정말 찰리와 새라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소설은 리틀비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여왕의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그 곳 이민자 수용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말을 잘 하거나 예뻐야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리틀비는 잡지와 신문으로 여왕의 말을 공부한다. 그리고 그 영어는 아무런 서류조차 없이 느닷없이 수용소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불법으로 수용소에서 나온 리틀비는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다. 그녀는 2년 전 고향의 한 바닷가에서 만난 앤드류에게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새라는 앤드류의 우울증이 나아지기를 기대한 것 같지는 않다. 새라가 준 상처와 2년 전 아프리카의 바다에서 얻게 된 죄책감은 앤드류의 우울증을 깊어지게만 했다. 텅 비어 버린 눈으로 울어버리는 앤드류에게 새라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이 그 바닷가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리틀비는 그녀의 언니처럼 죽었을 것이다. 새라의 손가락으로 리틀비는 목숨을 구했지만, 언니의 참혹한 죽음의 소리를 몽땅 들은 리틀비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깊이였다. 만약 그들이 그 바닷가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새라와 앤드류는 조금 더 다른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거기에서 한 약속처럼 좀더 성실하게 다정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처럼 그 날 그 곳에서 조우했고 그 상처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들은 만난다. 새라는 리틀비를 아끼게 되지만 운명은 그들의 행복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앤드류가 남긴 작업은 리틀비를 구하고, 배트맨이 되어버린 아들 찰리를 구하고, 너무 늦었지만 앤드류를 구하고, 그리고 새라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새라의 손가락은 영원히 가려울 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한 잔의 차를 따르다가, 혹은 찰리의 아름다운 웃음을 보다가 또는 리치몬드 파크의 오후의 햇살 속에서 리틀비가 떠오를 때 잘려버린 그녀의 손가락은 가려울 것이다. 그걸 환상지통이라고 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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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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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전작 <침대와 책>을 먼저 읽었다. 처음 <침대와 책>이라는 책을 알게되었을 때 몹시 관심이 갔었다. 전직 방송국 피디였다는 저자는 폭 넓은 독서의 체험을 감성적인 언어로 구사하여 웬만큼 책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다들 그의 글을 읽고 싶어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 하나가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는가 하는 호기심과 나와 같은 책을 읽고도 그는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책과 관계된 책을 즐겨읽는다. 책을 읽다보면 또 다른 책으로의 길을 안내받기도 하고, 급히 읽고 지나치느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작은 들꽃들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기도 한다. 그만큼 저자의 글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이 책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와 <침대와 책> 말고도 또 한 권의 책이 책장에 꽂혀있다.

 <침대와 책>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시 한 번 저자의 방대한 독서 세계에 감탄을 하면서 이 책<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읽었다. 새 밀레니엄에 들어서부터 가장 핫(hot)한 도시라는 평을 듣고 누구나 한 번쯤은 파리나 뉴욕 못지 않게 가 보고 싶어하는 도시 런던의 명소 곳곳에 살아 숨쉬는 많은 작가와 주인공들이 그의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찰스 디킨스와 제인 오스틴 그리고 아이작 뉴턴과 키츠, 셸리를 추억하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넬슨의 엠마 해밀터에 대한 사랑을 전해주었다. 대영 박물관의 그리스 신전의 벽을 보면서 어쩌면 저자는 프랑스에 있다는 외규장각 도서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자연사 박물관, 런던탑 그 외의 많은 곳에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저자는 단지 런던이 아니라 런던의 곳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세계 전부를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그는 파리를 생각했고, 남아메리카를 헤매는 윌리스를 기억해냈으며, 피지의 인도 카레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의 책 읽기와 생각하기에서 올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의 책 읽기는 나처럼 치우친 것이 아닌 듯했다. 예술, 철학, 문학과 과학에 걸친 방대한 지식과 사색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 나의 일천한 지식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단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나의 작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쉬웠다. 런던의 안개와 런던의 사람들도 좋지만, 나는 런던에서의 저자의 모습을 조금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 높은 건물을 두리번 거리며 살짝 당황하기도 하고, 런던탑에서 앤 불린을 추억하며 깊이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를 조금은 듣고 싶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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