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세뇨르 C에게 안야와 함께한 그 시간들은 어쩌면 가장 운 나쁜 해가 아니라 백조의 울음처럼 마지막 찬란한 햇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 여자가 세탁실로 들어오는 순간, 일흔이 넘은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그는 그녀의 치마가 짧다는 생각을 한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과격한 의견을 쏟아놓은 책을 쓰던 (그것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판되는) 세뇨르 C는 직업이 없다는 안야에게 타이피스트를 제안한다. 안야는 가끔 우라늄(uranium)을 소변기(urinal)로 타이핑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이라든지 추억같은 것은 만들어질 시간이 없었다. 안야는 세뇨르C의 눈을 통해서 앨런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앨런의 모습을 발견한다. 안야는 그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세뇨르C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의 '강력한 의견'들을 읽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성찰의 꿰뚫는 시각을 그녀는 갖게 되었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가벼운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세뇨르C는 안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만 그가 안야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바라볼 뿐,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한 페이지가 세부분 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세뇨르 C가 구술하고 안야가 타이핑하는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와 세뇨르 C의 시점과 안야의 시점이 한 페이지에 동시에 드러난다. 처음엔 한 페이지씩 읽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특히 세뇨르 C의 의견들은 그다지 부드럽지 않아서 다음 페이지에 이어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었고, 아래의 소설들도 역시 짧아서 아쉬웠다. 나중엔 에세이를 하나씩 읽고 세뇨르와 안야를 읽기도 하고, 흥미로우면 세뇨르의 이야기를 혹은 안야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에세이를 몰아서 읽기도 했다. 세뇨르의 '강력한 의견들'이 버거워질 무렵 '두 번째 일기'라는 제목으로 좀 더 부드럽고 일상적인 그의 생각들이 드러났다. 그것은 안야의 제안으로 쓰게 된 수필들이었다. 안야는 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기뻐했다.
  쿳시의 소설은 처음 접해 보았다. 신선한 시도와 발상이 흥미로웠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긴 이후에는 남아공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하기를 멈춘 그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