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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18세기 조선경제학자들의 부국론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항상 책을 읽고 나면 어딘지 서운했다.
잘 읽고 정말 좋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늘 책에게서 버려진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 시절 책을 일다가 마음에 닿는 구절이나, 느낌 따위를 노트에 끄적이곤 했다.
그러나, 게으른 성정 탓에 늘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곤 했다.
그러나, 이 책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잃어버린 나의 습관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만들었다.
빼곡이 들어 찬 보물같은 내용들은 나로 하여금 다시 노트를 펼치고 악필을 휘두르게 한다.
우리는 흔히 최고의 경제학자로 누구를 꼽는가?
인구론의 맬서스?,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
그러나, 정약용이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경제학자였다면?
이미 맬서스가 그의 인구론을 발표하기 600년도 전에 그 맹점을 비판한 학자가 유수원이라면?
서양의 이론에 매몰된 나머지 유명한 학자라면 이름과 성을 바꿔쓰는 사람을 떠올리고야 마는 우리의 실정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할까.
흔히 실학이나 북학이라고 불리우던 조선의 경제학은 크게 중종주의와 중상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토지 소유의 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을 든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중점을 둔 중농주의는 유형원 -> 이익 -> 정약용으로 계보를 만들고, 상공업 발전에서 국부를 창출하고 백성의 경제적 안정을 추구한 중상주의는 이지함 -> 유수원 ->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로 그 맥을 연결한다.
다들 국사 시간에 한번 이상은 들은 이름이다.
조선에는 성리학을 논하며 수염쓰다듬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아다면 오산이다.
1번 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인 김육은 경제학적 입장에서 보면 분배론자이다. 그는 백성의 생업 안정을 통해 국가 경제를 복원하려는 생각을 품고 새로운 조세 정책인 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한다. 18세기에 조선의 부흥은 바로 이런 양나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사회 경제적 활력을 되찾은 17세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훌륭한 경제 관료 한 사람과 좋은 정책 한 가지가 국가 경제와 백성의 삶을 백년 정도는 거뜬하게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가. " - 본문 53쪽
이 말은 우리 시데에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2번은 시장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한 관료 경제학자 채제공이다. 그는 시장과 자유 상인을 옹호하며 반독점론을 펴 산해통공을 이끌어 조선의 상업 발전의 물꼬를 트고 계획 도시인 수원 화상을 건설하여 나라에서 임금 노동자를 사용하는 예를 보였다.
3번은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빙허각 이씨가 있다. 가정과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에 대해 집안의 살림을 경영하는 여성이 최초로 저술한 경제 서적인 <규합총서>에서 가계 경영이 국가 경제의 뿌리임을 밝혔다.
4번은 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이다. 그는 조선 지리 경제학의 효시인 <택리지>에서 조선의 지리적 환경과 경제간의 상호 관련성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사회 양극화와 지역 불균형의 해법을 제시했다.
5번은 중상주의 학파의 두되인 박제가이다.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기존 조선 성리학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백성의 부유한 삶 뒤에 올바른 사회 윤리와 도덕이 설 수 있다고 하면서 중상주의 학파의 경제 이론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6번은 중농ㅈ의 경제학의 대부인 유형원이다. <반계수록>에서 그는 토지 개혁만이 부국강병의 지름길임을 주장하며 토지 공유제와 균전론을 주장하고 국가의 상공업 통제를 역설했다. 이의 사상은 이익과 장약용을 거쳐 갑오 농민 혁명에 영향을 주면서 아래로부터의 토지 개혁과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
7번은 중상주의 힉파의 개척자 유수원이다. 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우서>에서 신분제 철폐의 사회 개혁이 전제되어야 경제 발전이 가능함을 역설하였다. 이 책 <우서>는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시민과 자유로운 직업 선택과 전문화를 전제로 탄생한 근대 자본주의 원리를 가장 잘 포착한 혁명적 서적으로 평가 받는다. - 본문 174쪽
당시가 18세기 조선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사상은 가히 파격적이라할 수 있다. 빈곤의 원인을 자연과 인구가 아닌 경제 시스템과 노동의욕에서 찾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이다.
8번은 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거목인 이익이다. 18세기 경제학의 백과 사전이라할 수 있는 <성호사설>에서 그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를 꿈꿨다.
9번은 양반사대부 출신의 대상인 이지함이다. 상선과 뱃길을 이용한 상업방식과 공장제 수공업이라는 경영방식을 조선에 최초로 도입한 그는 상곡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한다는 본말 상보론과 국부를 축적하기 위해 나라가 실천해야할 세 가지 정책인 삼대부고론을 주장하였다.
10번은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주도자인 연암 박지원이다. <열하일기>에서 이용후생의 방법과 사회 경제 개혁의 구상을 밝힌 그는 손자인 박규수를 통해 김옥균, 홍여식에 이르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와 국운을 좌우할 거대 사상을 탄생시켰다.
11번은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의 완성자 서유구이다. <임원십육지>라고도 불리는 <임원경제지>는 단순한 농서가 아니라 농사와 의식주등 일상의 경제 생활에 꼭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완성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편찬된 그의 역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도덕, 윤리보다도 물질 생활이 우선이며 농업 기술 개선과 둔전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12번은 중농주의 경제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을 들 수 있다.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리를 주장하고 여전론을 주창한 그는 토지의 주인은 농민과 국가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토지개혁 사상은 갑오농민군에게 계승되었다.
13번은 박지원의 손자로 근대개화파와 경제학의 창시자인 박규수이다.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구 열강과 개국 통상할 때만 자주적인 부국 강병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한 그는 민본 중심 부국론을 주장하고, 토지의 균분과 농민과 병사의 일치가 조선을 강하게 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상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무지를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뛰어난 석학과 선구자가 있어서 세계를 이끌었다.
만일 정조의 사후에 세도가 외척들의 전횡이 없었다면,
실학자들과 북학파의 개혁이 그대로 발전하였다면,
조선이 일본보다 먼저 개항하고 외국과의 통상에 앞장섰다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인가.
지금은 또 그러한 때가 아닌가.
백년뒤에 지금의 우리를 평가할 때.
만일 그 때 우리가 이랬더라면 ......
이런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냉정히 살펴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