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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ㅣ 현대지성 클래식 52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평점 :
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2 : 반항인,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저, 2023(1951)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O Fortuna, Velut luna 오, 운명의 여신이여, 그대 마치 달과 같아
statu variabils 변덕스럽기 그지없구나.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늘 차오르다가도, 다시 이지러지니,
vita detestabilis 저주받은 삶이여...!
nunc obdurat et tunc curat 억지로 버티게 해주면서도 또 한편 다정하게 달래나니
ludo mentis aciem 얄미운 인생, 나를 희롱하는가?
Egestatem ptestatem 엄청난 재산이며 강력한 권력도
dissolvit ut glaciem 운명앞에 얼음 녹듯 사라지네
Sors immanis et inanis, 운명, 그대여 모는 이도 없이
rota tu volubilis, 멋대로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여!
status malus, vana salus 언제나 악의에 가득 차, 호의는 찾아볼 수 없으니
semper dissolubilis 나 평안히 지낼 도리가 없구나!
obumbrata et velata 그늘에 숨은 채 베일에 가리운 채
michi quoque niteris 그대 나를 괴롭히네
nunc per ludum dorsum nudum 승부에서 진 나는 이제 헐벗은 등판을
fero tui sceleris 그대 모진 손아귀에 넘기도다
Sors salutis et virtutis 내 마음의 평안에서나 내 육신의 건강에서나
michi nunc contraria 운명, 그대는 나의 적!
est affectus et deffectus 넘치는 호의도, 부족한 결함도
semper in angaria 언제나 그대 뜻에 묶여있나니...
Hac in hora sine mora 바로 지금 주저하지 말고
cordum pulsum tangite 악기를 쥐고 떨리는 현을 뜯어 노래하라
Quod per sortem sterit fortem 운명, 그대는 강한 자를 무너뜨리나니
MECUM OMNES PLANGITE! 세상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위 가사는 칼 오르프 Carl Orff의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에서 나오는 유명한 <오, 운명의 여신이여 O fortuna>의 가사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얄궂은 운명의 굴레에 떨어져 비탄을 맞이하는 그리스 비극의 심정을 매우 잘 표현한 곡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자신의 비통한 운명에 대해 울부짖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 문득 질문 하나가 나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술은 원자를 쪼개고, 없던 것을 전자적 매체에 만들어내며, 자신을 모방하는 기계를 창조해내는 이 즈음에 이게 웬 고리타분한 운명 타령인가? 하고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의 또다른 질문으로 대체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과연 당신은 얼마만큼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사는가?
마치 영화 매트릭스 Matrix에서도 잠깐 건드렸던, 자유의지의 환영에 관한 담론을 꺼내려는건 아니다. 다만 내가 제기하는 것은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는 사실을 종종 느끼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무한한 의지와 이성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거나 그저 단지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초라한 민낯을 간직하는 폭로의 순간 말이다. 그렇다... 생각외로 우리의 삶은 신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믿을건 우리 밖에 없다고 느끼는 최후의 보루마져 저버리고, 때로는 비극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무겁고도 근원적인 질문 앞에 나는 이 책, 카뮤의 <반항인 L'Homme Revolte>을 펼쳐들었다.
2. 저자의 의도...
20세기 초반부터 등장한 숱한 문장가와 사상가들 중, 이 까뮈만큼 독보적인 사랑을 받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정말 잡초같이 커온 인생의 역정에서, 프랑스 문학계에 <이방인>이라는 거대한 - 그러나 정작 글은 소품과도 같다 - 작품 하나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프랑스 문학의 정점에 서게된다. 그리고 그 이후 잘 알려져있다시피 노벨상 수상과 뜬근없는 사고사까지... 격랑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당시 유럽 사회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 흐름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 한 순간에 사라진 그 강렬한 기억때문일까...지금까지도 이처럼 회자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아직도 그의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은 분명 남다른 지점이 존재할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적어도 그런 표면적인 자국에 불과한 그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는 작품으로 후대에 말하고 평가받는 것...그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사유와 까뮈의 감정이 지금 시점에서도 유효하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평생을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온 개인적인 한恨의 정서가 우리에게는 그나마 익숙한 그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거기다 그 한의 정서를 끝내 저항하는 숭고로 승화시킨다는 지점은, 어찌 보면 서구권의 감성보다 동양권의 감성에 더 와닿는 지점이 많아서일지 우리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작가이다.
이 책 <반항인>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이방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다. 실제로도 <이방인>으로 얻은 그의 명성을 이 작품 <반항인>으로 깎아먹은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작품으로서의 침체기로 들어갔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정작 까뮈 본인은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의 역작"으로 공공연히 밝혔으며, 그의 사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일면 타당하다. 나는 <이방인>이 프랑스 부조리 문학 그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 <반항인>은 매우 지적이고 끊임없이 되내이는 문체의 에세이여서 - 만일 까뮈가 고등학위가 있었다면 필시 학술서적으로 내고 싶었다고 보이는 - 받은 평가로 생각한다. 게다가 이 책의 출판을 전후하여 사르트르 J. P. Sartre와의 격론과 결별로 이어지는 기존 지성계와의 불화속에서 진정으로 이 책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방인>-<반항인>의 수미쌍관적 관계라고 보인다. 즉, 이 책 <반항인>은 이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며, 반드시 <이방인>과의 연작선 상에서 평가해야 비로소 까뮈의 원 의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대로 따라가는 <이방인>의 논리적 구조를, <반항인>에서 "모범"으로 삼는 시지프스 신화의 긍정적 부조리로 뒷받침하는 구조처럼 말이다. 다행이도 과거에 <이방인>을 읽은 그 느낌으로 보다 더 선명히 까뮈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필히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이방인>을 읽어야함을 추천한다.
3. 인상적인 부분...
일단 이 책의 대부분은 "반항"의 명제에서 출발해서, 그 당위성으로 끝맺는 구조이다. 1장의 "반항인"이라는 일종의 선언으로 출발하여, 철학적(형이상학적), 역사적 반항을 기술하고, 예술에서의 반항 사상과 마지막 장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정오의 사상"이라는 장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찬찬히 내용들을 읽어보면 매우 건조한 문체에 가까우며, 일종의 학술서에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방인>을 기대했던 당대의 독자들이나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외면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글을 읽어 내려가면, 까뮈의 생각에 좀더 다가갈 수 있는 문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반항이란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 자이다."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반항의 철학을 명시하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까뮈는 이러한 일종의 선언적 명제들로 출발하여 인류 보편적인 의지로 자신의 철학(반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사례들과 철학적 인물들을 끄집어 내어 우리를 현혹시킨다. 사드, 도스토예프스키, 랭보와 같은 문학가들과 니체, 스티르너, 리베르탱 등의 사상가들까지 정말 다양하게 사례를 들며 그가 결코 지적으로 주류들에 비해 뒤쳐짐이 아님을 과시하듯 장황한 문장들이 반복된다.(이는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프랑스 실존 주의자들과의 불화와 대립을 의식해서라고 짐작된다.) 다소 분량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일반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가는 대목이지만, 찬찬히 시간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착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으로 까뮈의 입장보다 사상가로서의 까뮈의 주장들을 검토해보려면 이 책을 봐야한다고 나는 단연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까뮈가 가장 비판을 받았던 지점인, 마르크스 주의와의 관계를 이 책의 묘미로 소개하고 싶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 부분으로 인해 이후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주류 사상가들과의 결별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분위기는 매우 미묘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2차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기존 체제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급격히 세를 불리는 "마르크스 주의"는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큰 화두였다. 게다가 그 정점에 서있는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전승국의 위치에 오르고, 코뮌을 중심으로 소위 "제 2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분위기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정작 소비에트 연방내에서의 "스탈린 독재 체제" 또한 확고해지기 시작하며, 이 흐름을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희비가 엇갈린다.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또다른 독재 체제의 등장으로 격하하며, 그 양상에서 드러난 폭력성에 대해 강렬히 비판을 가하기 바빴다. 반대로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 이념적 정당성을 논증하고 그 과정속에서 발생한 폭력을 "혁명 과정의 불가피함"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념 자체의 순수성을 폄하하는 비판을 되려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까뮈는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양쪽에 반항하는 신념을 그대로 밀고 나가며, 양측으로부터의 비난을 모두 받게 된다. 얼핏보면 요즘의 "극증주의"나 극단적 중도파로 오인될 여지도 있지만, 실제 당시의 까뮈의 주장이나 이 책에서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까뮈의 생각은 좀 다른듯 하다. 양쪽 다 서로의 이념 논쟁에서 잊고 있던, 바로 "인민"들에 대한 애정과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함을 일깨우기 위해 양측을 동시에 부정했던 것 아닐까.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와중에 어느 극단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중도"를 항상 염두에 두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 이 대목에서 동양 철학적인 부분이 매우 의심된다. - 따라서 이후의 모든 과정들은 마치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묵묵히 그 부조리를 견디어가며 나아가듯이, 까뮈 또한 스스로 그 인내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나아간다. 이정도의 신념이면 문학가가 아닌 사상가로 보아야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 아쉬운 부분...
까뮈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사상적 배경은 바로 "죽음을 직시"하고 나서 다른 것들을 부차적으로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반드시 등장하며, 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품 속에서 반응하는 가가 그의 주된 서사 중 하나이다. 이는 달리 말해, 철학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실존을 이끌어내는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자장 안에 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말이다. - 물론 20세기 들어서 철학자치고 일정 부분 하이데거에게 빚을 지지 않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말이다. -
그러나 이는 하이데거의 방법론의 한계가 오면, 까뮈 또한 그 파국 아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별개로 그의 적극적인 "나치"주의 행각들에 대한 전후의 맹렬한 비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상적 기반마져 "나치의 영혼"이라는 불명예로 거론되던 당시에는 이는 큰 오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까뮈는 방법론은 택하되, 그와는 결을 달리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다름아닌 그 "죽음의 직시"라는 방법론이 큰 공격을 받는 가운데, 자칫 까뮈도 매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잘 알듯이, 까뮈는 문학에서의 작품으로서 이 오류를 극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상서로서 무언가를 위와 같이 주장했다면, 그 비난의 쓰나미를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과 같이 문학 작품으로서 "메타포"적인 글을 통해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반항인>은 상대적으로 그 결점이 크게 드러나는 불운의 작품이다. 게다가 주류로부터도 지적으로 완성도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니, 그의 사상의 유니크함이 오로지 담긴 이 책은 현재까지 애매한 상태로 남았으리라. 그렇지만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독자들이라면 다른 작품들을 보고 난 이후에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5. 나오며...
다시 우리, 까뮈라는 인물에 관해 돌아가보자. 프랑스 문학의 대작가로 칭송받지만, 정작 그의 사상적 측면이나 인물적 숭배는 오늘날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의 태생이나 활동배경, 그리고 사망 직전의 행적에서 끊임없이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허나 흥미로운 것은 그 무수한 "반항" 속에서도 그리스적 "중용"을 내세웠다는 아이러니함마져 부조리가 아닌가! 일생을 신념대로 살다간 풍운아답게 그의 작품도 덩그러니 우리에게 남아있다. 누군가 말한다. 고전이란 "시간의 끊임없는 공격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오늘도 전 세계 어디에선가는 까뮈의 작품이 읽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에 동조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가 작품에서 불태운 서사들은 우리에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삶의 부조리때문일 것이다. 비극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순간 우리의 삶에서도 숱하게 일어나며, 다만 이를 어떻게 조명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서사는 책이 될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사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인 까뮈의 본연을 드러낸 이 작품은 그럼으로써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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