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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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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공식 북 리뷰 시리즈 101-24-27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저, 2024 ★★★★?

크..간만에 보는 키에르케고르의 아포리즘(잠언집)! 실존주의의 아버지격인 그를 기억하며 이 글을 바친다!

(자세한 리뷰는 프로필 링크나 아래의 링크 참조 바람.
https://m.blog.naver.com/fatman78/223424499233)

2. 저자의 의도.
인문학 책이나 철학사의 한 부분에서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을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에게는 꽤나 진지하게 연구 대상으로 올랐던 인물이지만, 워낙 단명한 탓에 (향년 42세)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후대에 쇼펜하우어, 니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재조명받으면서 이후 하이데거 M. Heidegger 와 야스퍼스 karl Jaspers 로 대변되는 대륙권의 주류 절학에서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내는초석으로써 길이 남은 철학자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그의 인생 배경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813년 덴마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개신교적 분위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41년에 코펜하겐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별다른 직업없이 오로지 저술에만 몰두하며 이후 “이것이냐, 저것이냐”, “불안의 개념”,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대표되는 명저들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등진다. 당시의 그의 글은 기존 개신교의 모순들을 맹렬히 비판하ㅎ여 가명假名 을 쓰며 저술할 수 밖에 없었고, 이전의 그의 저서들은 주로 독일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헤겔 G.W.Hegel 을 비판하는 글들이 남아있다.

이번 신작,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는 위에 언급한 그의 대표적 저서들에서 모은 일종의 선집選集 이다. 다만 기획 단계에서 아포리즘으로 대표되는 형식미를 강조하여 그에 걸맞는 그의 명문장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평생 치열한 사고의 자락들을 담은 그것들을 야수적인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다.

* 세 줄 요약평.
1. 아포리즘이란 간결한 사상의 흐름이나 의미를 담은 일종의 잠언으로 이루어진 문학 장르임.
2.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뻘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 특유의 철학적 깊이로 유명함.
3. 이 책에서 그의 삶과 절망으로 대비되는 빛과 그림자의 철학을 맛볼 수 있음.

#우리에겐절망조차금지되어있다키르케고르아포리즘 #키르케고르 #서창미디어
#아포리즘 #철학
#책리뷰 #책추천 #도서리뷰 #도서추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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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신종 옮김 / 페이지2(page2)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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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공식 북 리뷰 시리즈 301-24-21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 Nietzsche 저, 2004(1892) ★★★★★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안읽는 니체의 그 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ㅋ 이 기회에 한번 읽어보심이 어떨런지? 오직 읽은 자와 못 읽은 자를 구분하는 이유를 아시게 될 거임! 인류의 영원 불멸한 고전!!

(자세한 리뷰는 프로필 링크나 아래의 링크를 참조바람.
https://m.blog.naver.com/fatman78/223405120065)

2. 저자의 의도.
(중략)
그러나 그러한 그의 비극적인 삶을 지탱해온 것은 어쩌면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힘, “정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삶에의 의지일 것이다. 일반적이지 못한 자기 삶을 끔찍이 저주하면서도, 그 일상적인 자유와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도, 가꾸지도 못하는 대다수 세상 사람들에게 저주에 가까울 독설과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기성 학자들은 이러한 세상과 대중들에게 거짓된 기만의 근원을 제공한다고 보고, 종교 또한 그 범주 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싸잡아 비난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t”라는 문구가 나온다.) 오로지 그러한 인간의 정신적, 근원적 근간은 소위 “힘으로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를 표방하며 거기에 예술의 그 무한한 힘을 살짝 얹어 찬양하기도 한다. 결국 시대의 흐름이 격동하고, 한 시대를 규정한 사상적 흐름이 끝나갈 무렵 니체는 이 저서로 지식인들 사이에 발견되고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신 시대의 지평을 연 선구자로 추앙받게 된다. - 우리는 실제로 그 이후의 평가된 니체를 보고있는 셈이다. -

그러했던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매우 야심찬 작품이다. 얼핏 읽어보면 이것이 철학적 저서인지, 문학작품인지 헷갈릴 묘한 문체로 다가오며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야기에 당황하기도 한다. 사실 니체는 이 작품을 그의 평소의 생각들을 집대성하여 일종의 “성경 Bible”의 형식을 차용한 잠언箴言 집에 가까운 저서로 썼다고 판단된다. 한번에 읽어서는 절대로 파악이 쉽지 않은 수많은 수사와 은유,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철학적 담론들은 이 책에서 본디 기획된 의도대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독될 여지도 다분하며, 이것을 방지하고자 주석을 달기 시작한다면 추측컨데 이 책의 분량을 넘어서는 주석이 나올수도 있을 정도로 보인다. 따라서 후일에 보다못한 본인이 직접 “선악의 저편 Jenseits von Gut und Bose”을 따로 출간하여 이해를 돕는 책을 따로 낼 정도이니 그 방대함은 견고한 성벽과도 같다. - 유명세만 듣고 덤볐다가는 그 사유의 미로에 갖혀 오도가도 못하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

따라서 몇몇 해설서나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읽어야 하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며 유혹하는 에베레스트의 설상雪上 의 정상처럼 우리에게 우뚝 서있는 인류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세 줄 요약평.
1. 니체의 비극적 삶은 짜라투스트라라는 초인적 이상향을 그려내기에 충분했다.
2. 생에의 의지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의지는 결국 삶의 변증법으로 남겨진다.
3. 인류의 영원 불멸한 고전으로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그 정신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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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2북스 #철학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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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현대지성 클래식 52
알베르 카뮈 지음, 유기환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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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62 : 반항인,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저, 2023(1951)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O Fortuna, Velut luna               오, 운명의 여신이여, 그대 마치 달과 같아
statu variabils                        변덕스럽기 그지없구나.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늘 차오르다가도, 다시 이지러지니,
vita detestabilis                      저주받은 삶이여...!
nunc obdurat et tunc curat    억지로 버티게 해주면서도 또 한편 다정하게 달래나니

ludo mentis aciem                   얄미운 인생, 나를 희롱하는가?
Egestatem ptestatem                엄청난 재산이며 강력한 권력도
dissolvit ut glaciem                  운명앞에 얼음 녹듯 사라지네

Sors immanis et inanis,             운명, 그대여 모는 이도 없이
rota tu volubilis,                     멋대로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여!
status malus, vana salus           언제나 악의에 가득 차, 호의는 찾아볼 수 없으니
semper dissolubilis                   나 평안히 지낼 도리가 없구나!

obumbrata et velata                 그늘에 숨은 채 베일에 가리운 채
michi quoque niteris                  그대 나를 괴롭히네
nunc per ludum dorsum nudum      승부에서 진 나는 이제 헐벗은 등판을
fero tui sceleris                       그대 모진 손아귀에 넘기도다

Sors salutis et virtutis              내 마음의 평안에서나 내 육신의 건강에서나
michi nunc contraria               운명, 그대는 나의 적!
est affectus et deffectus           넘치는 호의도, 부족한 결함도
semper in angaria                   언제나 그대 뜻에 묶여있나니...

Hac in hora sine mora              바로 지금 주저하지 말고
cordum pulsum tangite              악기를 쥐고 떨리는 현을 뜯어 노래하라
Quod per sortem sterit fortem      운명, 그대는 강한 자를 무너뜨리나니
MECUM OMNES PLANGITE!       세상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위 가사는 칼 오르프 Carl Orff의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에서 나오는 유명한 <오, 운명의 여신이여 O fortuna>의 가사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얄궂은 운명의 굴레에 떨어져 비탄을 맞이하는 그리스 비극의 심정을 매우 잘 표현한 곡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자신의 비통한 운명에 대해 울부짖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 문득 질문 하나가 나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술은 원자를 쪼개고, 없던 것을 전자적 매체에 만들어내며, 자신을 모방하는 기계를 창조해내는 이 즈음에 이게 웬 고리타분한 운명 타령인가? 하고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의 또다른 질문으로 대체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과연 당신은 얼마만큼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사는가?

마치 영화 매트릭스 Matrix에서도 잠깐 건드렸던, 자유의지의 환영에 관한 담론을 꺼내려는건 아니다. 다만 내가 제기하는 것은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는 사실을 종종 느끼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무한한 의지와 이성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거나 그저 단지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초라한 민낯을 간직하는 폭로의 순간 말이다. 그렇다... 생각외로 우리의 삶은 신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믿을건 우리 밖에 없다고 느끼는 최후의 보루마져 저버리고, 때로는 비극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무겁고도 근원적인 질문 앞에 나는 이 책, 카뮤의 <반항인 L'Homme Revolte>을 펼쳐들었다.

2. 저자의 의도...


20세기 초반부터 등장한 숱한 문장가와 사상가들 중, 이 까뮈만큼 독보적인 사랑을 받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정말 잡초같이 커온 인생의 역정에서, 프랑스 문학계에 <이방인>이라는 거대한 - 그러나 정작 글은 소품과도 같다 -  작품 하나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프랑스 문학의 정점에 서게된다. 그리고 그 이후 잘 알려져있다시피 노벨상 수상과 뜬근없는 사고사까지... 격랑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당시 유럽 사회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 흐름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 한 순간에 사라진 그 강렬한 기억때문일까...지금까지도 이처럼 회자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아직도 그의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은 분명 남다른 지점이 존재할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적어도 그런 표면적인 자국에 불과한 그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는 작품으로 후대에 말하고 평가받는 것...그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사유와 까뮈의 감정이 지금 시점에서도 유효하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평생을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온 개인적인 한恨의 정서가 우리에게는 그나마 익숙한 그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거기다 그 한의 정서를 끝내 저항하는 숭고로 승화시킨다는 지점은, 어찌 보면 서구권의 감성보다 동양권의 감성에 더 와닿는 지점이 많아서일지 우리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작가이다.

이 책 <반항인>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이방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다. 실제로도 <이방인>으로 얻은 그의 명성을 이 작품 <반항인>으로 깎아먹은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작품으로서의 침체기로 들어갔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정작 까뮈 본인은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의 역작"으로 공공연히 밝혔으며, 그의 사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일면 타당하다. 나는 <이방인>이 프랑스 부조리 문학 그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 <반항인>은 매우 지적이고 끊임없이 되내이는 문체의 에세이여서 - 만일 까뮈가 고등학위가 있었다면 필시 학술서적으로 내고 싶었다고 보이는 - 받은 평가로 생각한다. 게다가 이 책의 출판을 전후하여 사르트르 J. P. Sartre와의 격론과 결별로 이어지는 기존 지성계와의 불화속에서 진정으로 이 책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방인>-<반항인>의 수미쌍관적 관계라고 보인다. 즉, 이 책 <반항인>은 이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며, 반드시 <이방인>과의 연작선 상에서 평가해야 비로소 까뮈의 원 의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대로 따라가는 <이방인>의 논리적 구조를, <반항인>에서 "모범"으로 삼는 시지프스 신화의 긍정적 부조리로 뒷받침하는 구조처럼 말이다. 다행이도 과거에 <이방인>을 읽은 그 느낌으로 보다 더 선명히 까뮈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필히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이방인>을 읽어야함을 추천한다.

3. 인상적인 부분...

일단 이 책의 대부분은 "반항"의 명제에서 출발해서, 그 당위성으로 끝맺는 구조이다. 1장의 "반항인"이라는 일종의 선언으로 출발하여, 철학적(형이상학적), 역사적 반항을 기술하고, 예술에서의 반항 사상과 마지막 장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정오의 사상"이라는 장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찬찬히 내용들을 읽어보면 매우 건조한 문체에 가까우며, 일종의 학술서에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방인>을 기대했던 당대의 독자들이나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외면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글을 읽어 내려가면, 까뮈의 생각에 좀더 다가갈 수 있는 문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반항이란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 자이다."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반항의 철학을 명시하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까뮈는 이러한 일종의 선언적 명제들로 출발하여 인류 보편적인 의지로 자신의 철학(반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사례들과 철학적 인물들을 끄집어 내어 우리를 현혹시킨다. 사드, 도스토예프스키, 랭보와 같은 문학가들과 니체, 스티르너, 리베르탱 등의 사상가들까지 정말 다양하게 사례를 들며 그가 결코 지적으로 주류들에 비해 뒤쳐짐이 아님을 과시하듯 장황한 문장들이 반복된다.(이는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프랑스 실존 주의자들과의 불화와 대립을 의식해서라고 짐작된다.) 다소 분량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일반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가는 대목이지만, 찬찬히 시간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착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으로 까뮈의 입장보다 사상가로서의 까뮈의 주장들을 검토해보려면 이 책을 봐야한다고 나는 단연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까뮈가 가장 비판을 받았던 지점인, 마르크스 주의와의 관계를 이 책의 묘미로 소개하고 싶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 부분으로 인해 이후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주류 사상가들과의 결별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분위기는 매우 미묘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2차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기존 체제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급격히 세를 불리는 "마르크스 주의"는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큰 화두였다. 게다가 그 정점에 서있는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전승국의 위치에 오르고, 코뮌을 중심으로 소위 "제 2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분위기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정작 소비에트 연방내에서의 "스탈린 독재 체제" 또한 확고해지기 시작하며, 이 흐름을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희비가 엇갈린다.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또다른 독재 체제의 등장으로 격하하며, 그 양상에서 드러난 폭력성에 대해 강렬히 비판을 가하기 바빴다. 반대로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 이념적 정당성을 논증하고 그 과정속에서 발생한 폭력을 "혁명 과정의 불가피함"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념 자체의 순수성을 폄하하는 비판을 되려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까뮈는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양쪽에 반항하는 신념을 그대로 밀고 나가며, 양측으로부터의 비난을 모두 받게 된다. 얼핏보면 요즘의 "극증주의"나 극단적 중도파로 오인될 여지도 있지만, 실제 당시의 까뮈의 주장이나 이 책에서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까뮈의 생각은 좀 다른듯 하다. 양쪽 다 서로의 이념 논쟁에서 잊고 있던, 바로 "인민"들에 대한 애정과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함을 일깨우기 위해 양측을 동시에 부정했던 것 아닐까.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와중에 어느 극단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중도"를 항상 염두에 두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 이 대목에서 동양 철학적인 부분이 매우 의심된다. - 따라서 이후의 모든 과정들은 마치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묵묵히 그 부조리를 견디어가며 나아가듯이, 까뮈 또한 스스로 그 인내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나아간다. 이정도의 신념이면 문학가가 아닌 사상가로 보아야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4. 아쉬운 부분...

까뮈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사상적 배경은 바로 "죽음을 직시"하고 나서 다른 것들을 부차적으로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반드시 등장하며, 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품 속에서 반응하는 가가 그의 주된 서사 중 하나이다. 이는 달리 말해, 철학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실존을 이끌어내는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자장 안에 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말이다. - 물론 20세기 들어서 철학자치고 일정 부분 하이데거에게 빚을 지지 않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말이다. -

그러나 이는 하이데거의 방법론의 한계가 오면, 까뮈 또한 그 파국 아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별개로 그의 적극적인 "나치"주의 행각들에 대한 전후의 맹렬한 비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상적 기반마져 "나치의 영혼"이라는 불명예로 거론되던 당시에는 이는 큰 오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까뮈는 방법론은 택하되, 그와는 결을 달리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다름아닌 그 "죽음의 직시"라는 방법론이 큰 공격을 받는 가운데, 자칫 까뮈도 매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잘 알듯이, 까뮈는 문학에서의 작품으로서 이 오류를 극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상서로서 무언가를 위와 같이 주장했다면, 그 비난의 쓰나미를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과 같이 문학 작품으로서 "메타포"적인 글을 통해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반항인>은 상대적으로 그 결점이 크게 드러나는 불운의 작품이다. 게다가 주류로부터도 지적으로 완성도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니, 그의 사상의 유니크함이 오로지 담긴 이 책은 현재까지 애매한 상태로 남았으리라. 그렇지만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독자들이라면 다른 작품들을 보고 난 이후에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5. 나오며...

다시 우리, 까뮈라는 인물에 관해 돌아가보자. 프랑스 문학의 대작가로 칭송받지만, 정작 그의 사상적 측면이나 인물적 숭배는 오늘날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의 태생이나 활동배경, 그리고 사망 직전의 행적에서 끊임없이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허나 흥미로운 것은 그 무수한 "반항" 속에서도 그리스적 "중용"을 내세웠다는 아이러니함마져 부조리가 아닌가! 일생을 신념대로 살다간 풍운아답게 그의 작품도 덩그러니 우리에게 남아있다. 누군가 말한다. 고전이란 "시간의 끊임없는 공격을 견뎌낸 생존자"라고...

오늘도 전 세계 어디에선가는 까뮈의 작품이 읽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에 동조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가 작품에서 불태운 서사들은 우리에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삶의 부조리때문일 것이다. 비극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순간 우리의 삶에서도 숱하게 일어나며, 다만 이를 어떻게 조명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서사는 책이 될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사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인 까뮈의 본연을 드러낸 이 작품은 그럼으로써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반항인 #까뮈 #현대지성 #철학 #프랑스문학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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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9 :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위저쥔 저, 2023


출판사 사전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협찬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당신은 "밀크티 동맹(Milk-tea Alliance)"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신의 외신 뉴스나 신문의 국제 정치 분야 기사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조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2020년대에 홍콩, 대만, 태국의 시위대에서 등장한 신종 슬로건으로서, "반反 독재, 반중시위의 국가간 연대를 외치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성공시키며,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거창한 자국(중국)의 긍지마져 과시하던 중국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내몰렸냐는 의문마져 드는 용어이다. 물론 점점 팽창하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려는 기존 서구권의 의도된 프레임으로 의심해볼 수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높아지는 "반중정서"에는 "어글리 차이나(Ugly China)"의 실질적인 혐오감 또한 존재함은 명백한 그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단지 수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과 마주하는 일상에서 받은 대중들의 인식들, 그리고 중국의 해외 진출 지역에서 마치 "점령군"을 방불케하는 그들의 행태 또한 여러 기사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즉, 중국 인민들의 일상 태도나 인식이 타 국가나 공동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이면을 주목해서 보고 싶다. 나와 공감하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의 근현대사"에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처절하게 질곡의 역사로 점철된 그들의 의식속에(또는 무의식속에) 상실로 인한 거대한 "정신적 결핍"을 유발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리잡은 것은 "물질 만능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전후의 일본 재건 시대의 극심한 패배주의나 6.25 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보여준 극단적 생존 지상주의의 발현처럼 그들 또한 사회 전체가 거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그들의 현재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징후가 위에서 밝힌데로 곳곳에서 감지된다는 진단에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들보다 더욱 더 철저히 시장 경제적 기조와 행보를 보인다고도 탄복할 정도이며, 이러한 경제적 극단화는 필연적으로 커다른 사회적 갈증을 낳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시점에 이 갈증에 대한 반성과 경고의 화답으로 지금 살피고자 하는 이 책이 나온 배경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모두가 질주하듯이 달려오며 점점 가속화되어 멈출 수 없는 극단적인 현실속에서, 잠시 한 발짝 떨어져 시대를 관망하며, 인간의 삶에 대해 자조하는 이 철학자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 누군가는 포착한 것이라 짐작이 된다.

2. 저자의 의도...

본작의 저자, 위저쥔은 현現 푸단대 철학 교수로서 이 책의 기원이 된 팟캐스트 "철학 강의"로 유명세를 탄 인문학자이다. 당시 700만 조회수를 넘나들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고, 서구 사회의 "TED 강연"에 비견되는 대중강연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특이한 지점은 중국 태생의 철학자라면 으레 동양철학을 전공했으리라는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서구 관념론의 본고장인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력이다. 게다가 모교에서도 서양 철학을 강의하며 학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동양 철학의 본고장에서 서양 중심의 학풍을 가진 이방인에 가까운 행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선입견에도 상관없이, 푸단대에서도 대중적인 강의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일종의 "경계"에 선 학자라 볼 수 있겠다. 일련의 알려진 강의나 저서를 보면 서구 물질주의 문명의 비판론에 주관심사를 둔 것으로 보이고, 이 저서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서문에서 저자 본인은 자신의 견해는 최대한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팟캐스트의 목록과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이는 사실과 다르게 보인다. 47인의 철학자를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하면서 소개하되, 각 장의 대주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재 무질서에 가까운 중국 대중들을 "계몽"시킬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각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생각은 "현 세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게, 삶의 지향점과 의미를 철학으로 일깨워 주기 위함"이라고 명백히 읽혀진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려 했던 점은 선정한 주제들의 "경계"였다. 이미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국은 엄연히 "검열"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모두가 경제적인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쉬우나, 중국은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를 지향한다. 따라서 아무리 학문의 자유를 명목상 보장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체제 이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과연 그와 같은 한계를 극복할만한 지점이 존재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읽는 내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선입견을 보란듯이 비웃듯, 그 경계에 선듯한 주제가 상당수 목격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로버트 노직, 권력의 통제와 감시 작동 원리를 맹렬히 비판한 미셸 푸코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원론적인 소개와 적절한 수준에서 이들을 해제하고 있지만, 더 자유롭게 이들의 논거들을 활용하면 현 중국 정치 체계를 비판할 수 있는 대목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사유의 위험성을 중국 당국이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며, 이는 분명 주목할만한 대목이다.(반대로 이 정도의 지적 사유의 확장으로 인한 체제 비판은 충분히 자신들의 사장적 기반으로 방어 가능하다는 자심감의 발로로 볼수도 있겠다.)

또한 저자의 나머지 주제들은 현 물질문명 내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주제들 내지는 비판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이는 첫째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이후 폭주하는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측면이 다분히 존재한다. 이는 소주제로 제시하는 질문들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당신은 왜 일하는 시람이 되고자 하는가?"와 같은 문장들에서 그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로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의심케하는 시사점을 들고 싶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비판"을 의도적으로 수용하고 드러냄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이 의도의 한계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자신들의 과거 결정 또한 모순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결점 또한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각 인물에 대한 분석과 평이 매우 대중 친화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교조적인" 학자의 글도 아니고, 더욱이 맹렬한 문장들을 줄곧 선보이는 사회주의 특유의 문장과 표현들은 이 책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매우 친절한 구성과 문체, 심지어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독자들을 배려한 세심한 "대머리 지수"까지... 아주 잘 구성된 서구 사회의 대중 교양서적의 그것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잘 구사하고 있다.(저자의 이름을 가리면, 과연 이 책이 미국, 유럽에서 출간된 책이라고 보일 정도이다.) 이는 짐작컨데 현재 중국 인민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한 측면이 있지 않은가 판단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발표와 관계없이 아직도 중국 인민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역간 격차 또한 상당하다. 따라서 저자는 먼저 팟캐스트의 형식을 빌려 시작을 하였고, 이 책은 그 결과로 나온 책이므로 역시 그 의도의 자장 안에 존재한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라는 결과물이 질적으로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오히려 아주 잘 쓰여진 대중 교양서적으로 그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리라 보인다.

4. 아쉬운 부분...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철저히 대중을 상대로 기획된 팟캐스트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제의 선정과 인물의 소개 및 구성도 이 목적하에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쉬움 또한 존재한다.

먼저 각 사상들의 치열한 전개와 확장성은 이 책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현재 중국의 정치 검열로 인한 상황으로 보일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소개한 정치 철학들 가운데 몇몇은 그 논의가 다다른 지점이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반드시 존재하고, 이는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 체제 또한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 로크의 천부인권론을 들어보자. 이 이론의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할 수 없는 권리(자유)를 부여받았다"이다. 현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기준대로 "헌법"상에 이 정신을 다양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거 "천안문 사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티벳에 대한 일방적인 흡수 정책과 신장,위구르 지역의 소수민족 탄압은 무엇이라 말해야될지 모르겠다. 심지어 로크는 그와 같은 상황하에서 인인은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지 않는가. 현재 중국 공산당이 가장 금기시하는 인민 봉기나 분리 독립은 이미 로크가 충분히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게다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또한 어떠한가. 권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시와 통제의 내면화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또한 현제 중국이 시행하고 있는 인터넷의 무제한 검열, 자유로운 사용의 제약 및 이를 위한 기술적으로 구현한 "파놉티콘"적 요소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상당히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중국 MZ세대들의 행태는 푸코의 지적이 유효함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저자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간에 "스스로를 검열"하고, 다소 말랑말랑한 수위로만 다룬다고 말할 여지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저자와 관계없이 이 책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편향성"을 들고 싶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중국의 현 정치 상황과 관련된 기사들(특히 홍콩 "우산시위")을 보면 생각과 달리 중국 인민들이 사상적으로 잘 단련되어 있음에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연이은 시진핑의 예외적인 장기 집권과 COVID 19 펜데믹에서 드러난 중국 공산당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꽤나 견고한 지지율을 과시하고 있다. 이를 전제로 짐작해보면,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방 세계의 "데카당스"를 드러내고 자국 우월주의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로 오독될 여지가 존재하지 않을까.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나 구 공산권 체제들이 그래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계가 처음부터 명백히 주어진 책이고, 저자의 의도대로만 읽혀지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일종의 "안전장치"가 보인다는 점은 나만의 지나친 해석이 아니길 바란다. 물론 이와 같은 몇몇의 지점들을 제외하고 보면, 이 책은 그 궁극적인 목적에 매우 충실한 텍스트임은 적시하고 싶다.

5. 나오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현재의 문제를 들여다보자. 전세계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이미 "고속성장"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경제 체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소위 거시 경제론에서 흔히 거른되는 "중진국의 함정" - 전체적 경제 성장률 저하 및 토입요소 대비 고용률 감소 - 을 비롯하여 급격한 노령화와 인구 감소 추이와 같은 구조적 한계 또한 관측되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가속화되고, 중산층의 위기로 읽혀지는 각종 징후들이 경제 기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실 속에 놓인 대중들의 정서적 결핍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증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폭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날로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 시점의 중국 인민들에게 "중용"의 미덕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의도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쇠락기에 에피쿠로스가 들고 나온 "쾌락론"과 같다고 할까. 삶에 있어 "행복"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고, "쾌락"의 그 지향점과 과도한 위험성을 세밀하게 분류하며, 인위적으로 주어진 쾌락의 정서가 독이 된다는 그 당시의 주장 말이다. 비단 이와 같은 지적은 그들뿐 아니라, 표류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대중들에게도 시사하는 지점이 크다고도 보인다. 더욱이 기존 텍스트에 거부감마져 보이는 현 세대의 대중들에게 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서는 입문서로서 이 책은 더욱 적절하다. 시대의 갈증이 지배하는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철학책이 나와 위로를 해준다면 고마운 시도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중용의 미덕을 충분히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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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 - 재택근무의 한계부터 교실의 재발견까지 디지털이 만들지 못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다
데이비드 색스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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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55 : 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 데이비드 색스 저, 2023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오늘은 청량한, 그러나 한 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오후의 나른한 하늘을 나는 마주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한 잔의 샴페인을 따른다. 시원한 청량감을  담은, 폭발하듯 날라가는 코르크 마개의 날림으로 시작하여, 투명한 잔 속에 비치는 무수한 작은 기포들, 넘치는 거품으로 그 포말의 역동과 향긋하고도 달달한 과실향아 내 코를 자극한다. 푸른 하늘의 코발트 냉감과 한낮을 지나친 오후의 샴페인이 어우러지고, 한 모금의 순간은 "한 낮의 샴페인이 나를 일으킨다..."는 나폴레옹의 예찬론을 떠올리게 하며 피식 웃음을 머금게하고, 그렇게 느긋한 초여름의 오후는 흘러만 가고 있었다. 무심코, 이런 것들이야말로 삶의 한 순간 내가 느끼고 행복이란 거창한 단어를 기꺼이 부여해도 될만큼 충분히 납득이 된다고 되뇌이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문득 거리에는 늘 그렇듯이 연인들이 지나가고, 늘 나의 작은 우주인 이 작은 골목 구석에서 캠핑 의자에 앉아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표정도, 나의 한순간의 여유가 투사된듯한 부러워하는 눈길도 순간적으로 느껴지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이 모든 순간들이 내 기억속 한켠에 자리잡아 오늘의 나를 느끼게 하고, 또다시 찾아올 내일을 위한 순간임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두에게 공감이 될 풍경이 아니겠는가...

지난 3년간의 지긋지긋한 펜데믹은 정말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갔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바꾸었다. 이제 슬그머니 "엔데믹"을 선언하고자 하는 이 시점에서 그동안의 많은 변화와 성찰들에 대해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렇게 우리는 또다른 우리의 삶을, 마치 그동안의 일들이 없었던 것인양, 그렇게 이어가고 있다.

2. 저자의 의도...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게된 계기인 이 책은 데이비드 색스(다소 민망한 어감의 이름이라고 본인도 유머러스하게 언급하고 있는)의 또다른 신간 때문이다. 이미 우리에게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알린 캐나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TED 강연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 작가이다. 앞서 언급한 책을 포함하여 일련의 저서들 제목에서부터 명확히 자신의 지향점을 숨기지 않고 일관되게 말해온 주제는 소위 "아날로그"로 대변되는 인간 중심의 가치 체계가 이미 펼쳐진 "디지털"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그 고유의 유효성이다. 이번 신작에서는 특별히 "펜데믹"이라는 불가항력적 사태로 인해 강제적으로 (때론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전면적" 디지털 전환의 경험과 그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을 돌아보고, 이로써 우리에게 인간 가치 중심의 기술이 아직도 유효하며 이는 대체불가적이고 나아가 영속적일 것이라는 믿음으로까지 우리를 이끄는 예찬의 형식을 띄고있다. 

3. 인상적인 부분...

이 책의 형식상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거창하게 추상적 담론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매우 "실증적인" 공감가능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번 펜데믹 상황에서 모두가 겪음직한 일상의 문제들을 "일주일"이라는 시간적, 사회적 활동에 빗대어 분야별로 짚어나가고 있다. 회사, 학교, 쇼핑, 도시생활, 문화생활, 대화, 휴식의 7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각 요일별로 상징되는 인간 행위 양식들을 체험적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다. 이는 저자의 주된 동기인 "아날로그"적 실제 삶을 보다 독자가 더 친근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재미를 주는 접근으로 보인다.

또한 위 구성으로 논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여러 학자들, 전문가들과 나눈 대화나 고찰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인지감성,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등 철학적 담론에서 기술적 담론을 거쳐, 종교적 담론까지 폭넓게 건드려보고 있다. (물론 심도깊은 논의는 차치하고, 그 논거의 준거점이 되는 지점들만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가 그동안 "모호"하게만 느꼈던, 그러나 분명히 인지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의 논의장으로 올리기 위해 대중들을 설득하는 장으로써 이번 저서를 기획한 것이 엿보인다. ("디지털 러다이트"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의도를 관철시키고 싶은 저자의 소망도 같이...)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벗어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그 의도의 이면을 경계하며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디지털화 된 세상을 누가 꿈꾸는 것인가? 또한 그럼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라는 원초적인 문제들에 다름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다수의 독자가 동의할법한 "폭거적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이 그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소위 FANG(Facebook, Amazon, Netflix, Google)으로 대표되는 거대 플랫폼 기업들을 명시적으로 거론하며, 이들이 그동안 보여온 행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누려온 간편하고 저렴하며 빠르게 편리한 소비가, "누군가"의 눈물과 피땀을 희생으로 삼아 일방적으로 누리게끔 조장한 측면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호르크하이머가 일찍이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지적했듯이, 디지털이 잘못되었다기 보다 우엇을 위한 디지털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가치판단을 위한 성찰이 없는 도구적 이성은 크나큰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지난 세기들의 과오를 경계하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우리 "인간"이 중심 담론이 되어야 하고, 그 가치는 지속적으로 논의될 영원한 주제임을 천명한 맥락과 그 궤를 동기화한다. 결코 디지털은 "도구"이지 "목적" 자체가 될 수 없다

4. 아쉬운 부분...


고백컨데,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자처한 때부터 이미 작가의 주장에 동조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적을 명확히, 기꺼이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읽어나감에 있어 전혀 반감이나 무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 (물론 나를 포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이 책은 시작부터 "편향"되었다고 오독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서 드는 사례나 인용하는 주장들이 "확증 편향"의 오류가 있을수도 있다고 느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누구나 공감핳 법한, 논증의 여지가 분명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 대해 저자에 덧붙여 말하려고 한다.

먼저 "디지털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이는 감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로 환원되어서 증명되는 명백하 사실이다. "아날로그", 즉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객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물리적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객체에 대한 측정의 문제일뿐 실재하는 모든 존재를 완벽히 "정보화"하는 기술은 현재로써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처음부터 "디지털"기술의 의도에 어긋나며, 현재의 디지털기술은 그 탁월한 접근성과 효용성 및 효율성을 고려한 "축소된 이미지"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체험적으로 경험하는 실재와 우리에게 전달되는 디지털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이는 보들리야르가 언급한 "실재의 부재"를 경험하게 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미지의 "조작 또는 가공으로 인한 실재의 전복"마져 가능케하는 지점이 오리라고 누군가는 경고하지만, 공허한 러다이트들의 회한쯤으로 치부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펜데믹을 통과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실례는 무수히 목격되고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딥페이크로 인한 온라인상에서의 폭력과 같이...) 

 더욱이 가장 근본적으로 "디지털 신봉자"들이 간과한 점은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이용하는 우리 스스로가 "아날로그"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가정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디지털"적이지 않다. 보고, 듣고, 만지고, 입에 넣어 맛보며 우리의 뇌를 실재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지각하며 인식을 해온 것은 유사이래로 변함없이 진행되온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재라고 인식하는 것들을 지각하고 판단할 때는 단순히 특정 감각만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종합적 경험"에 기초하여 세상을 이해한다. 따라서 "축소된 이미지"의 근본적 한계를 가진 디지털은 우리에게 경험의 일부를 "체험"하게 해줄지언정, 경험 자체를 대체할 수 없다.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 얼굴의 표정, 그 사람의 말, 살짝 느껴지는 체취까지도 그 사람의 특징으로써 각인되며, 우리는 각인된 거대한 정보들을 모두 충족시킬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데 축소된 디지털 이미지만으로 행위양식을 강제하면, 우리 뇌는 현재 가용한 감각에 의존하여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디지털적 모호함"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 기시감"이라고 종종 부른다.) 을 극복할 수 없으며 이는 이번 펜데믹에서 수없이 목격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내면의 분석에 초석을 제공한 카를 융은 일찍이 심리학적 분석과 접근법을 주창하며 "페르소나"와 "아니마"의 상보성에 주목한 바 있다. 페르소나(인식의 가면)와 아니마(무의식의 원형)은 때때로 상호대립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며, 외부적 환경에 의해 그 균형이 깨질 경우 어느 한 쪽의 힘이 다른 영역으로 흘러가서 병리적 현상을 일으킨다고 봤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많은 것이 분명해진다. "의식의 세계"에서 아무리 디지털정보를 그럴싸하게 조작하고, 가공한다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이것이 "실재"가 아님을 근본적으로 알게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재라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페르소나"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 갈등관계의 모순에서 우리는 소위 "실재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며 허탈감과 무기력이라는 "병적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디지털은 함께하는 유대성과 공감의 현실을 제약하고 왜곡시키며, 더욱더 사람들이 "실재이 허기"에 지쳐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도록 부추길 뿐이다. 이는 엔데믹을 선언하고 있는 지금을 전후하여 사람들의 폭발적 행위양식 안에 이 무의식적인 집단 반발이 목격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디지털과 공존해야만 하는 현재 우리의 삶에 중요한 점을 이 책은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며 우리 안의 어떤 것들에 대해 더 성찰해야 함을 말이다. 

5. 나오며...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즐겨듣던 "유재하"의 LP를 턴테이블 이에 올려놓고 함께하고 있다. 과거에 CD로, 이제는 물리적 실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스트리밍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이 무슨 원시적인 고집을 부리는가...라고 냉소적으로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처음 이 음반을 듣던 그때의 느낌을 잊지 않는다. 

조심스레 레코드 판을 꺼내어 올리고, 조용히 바늘을 얹는 그 긴장의 순간과 어떤 노래가 나올지에 대한 호기심, 곧이어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투박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따스한 느낌의 LP 특유의 톤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노랫말...때론 약간 마음에 들지않는 곡이 있어도 바로 "skip"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다음 곡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한 인내, 한 면이 다 돌아갈동안 기-승-전-결이 느껴지는 전체의 예술적 조형미, 그리고 그 다음 면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탐험을 기꺼이 나는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유재하를 좋아하는 이유에 영향을 미치고 그가 우리에게 하는 노래에 내 감정을 같이 이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말한다. 시작부터 skip이 되지 않기 위해 "기형적"으로 클라이막스부터 나오는 긴박함의 요즘 곡들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중함을 느낄려면 무언가 불편함을 감수할수 있는 여유도 있어야, 자기 감정을 투사할 여지도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현대인들도 어서 깨닫기를 바란다. 이 멋진, 소소한 이야기를 해준 작가에게 감사를 다시 표하며 나는 오늘도 유재하의 노래에 상념에 잠긴다.

 

#디지털이할수없는것들 #데이비드색스 #아날로그의반격 #신간도서

@across_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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