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물론 천문학의 관점에서 본면 지구가 스스로 도는 위치에 따라라고 써야겠다) 날이 저물고 다시 날이 밝는다. 이것은 어떤 날이라고 해서 다른 여느 날과 달리 특별해지지 않지만, 일상적 시간의 흐름에 인간의 역법(曆法)을 얹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왠지 오늘 저녁은 한 해가 속절없이 저물었다며 쓸데없이 비감에 빠지기 좋은 시간인 것이다.

 

작은 성취를 기억하며 한 해를 살자!고 기운차게 써 놓고는 한 해 동안 서재 글을 쓰지 않았다. 자녀를 돌본다고 휴직했으면서 블로그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 혹여 육아휴직하는 남자는 정작 육아를 안 하고 자기계발을 한다는 통념을 강화하는 데 내 사례가 쓰일까 사뭇 자제한 면이 있다(작은따옴표 안 문장의 사례는 불행히도 많다). 생활 패턴이 상대적으로 단조로워지다 보니 글 쓸 거리와 의지가 달려서인 면도 있다(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연초에 이정표를 세운 덕에 한 해를 목표한 대로 살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좋다(연초의 나 잘했다).

 

1.작년보다 책 많이 읽기: 어쩌면 향후 10년간은 이보다 더 읽지 못할 정도로 많이 읽었다. (122)

(한 해 동안 읽은 책 권수로 한 사람의 독서량을 평가하는 데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회의적이다. 위의 122권은 상대적으로 텍스트의 양이 적은만화(27)와 어린이용 동화(4) 포함한 수다.)

2.술술 읽히는 책과 더불어 깊이 있는 양서를 시간 들여 읽기: 에세이 위주로 읽고 시간을 들여 읽으려던 이론서들은 여전히 지그시 바라만 보고 있다. 저거 언제 한 번 봐야 하는데... 하면서.

3.가능한 한 비건 지향 실천하기: 가능한 만큼 했다. 자녀도 배우자도 없는 시간에 짬짬이 비건 식당에라도 좀 더 가 볼 것을 그랬다고 소소하게 후회한다. 회사에서는 다시 논비건(인 것)처럼 살아야 할 테니 하루 한 끼라도 가능하면 비건식을...

4.날 풀리면 운동하기: 했을 리가?

5.작은 성취를 기억하기: 출근하는 대신 가족과 여행을 많이 간 것이 공동 성취라면 성취겠다.

 

집 안에 책을 둘 곳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전자책을 자주 읽었고, 종이책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내돈내산내읽’(내가 돈 내고 내가 산, 내가 읽은) 종이책은 헤아려 보니 네 권이다. 전자책도 처음에는 예산을 쪼개어 사서 보다가, 그 다음에는 공공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다가, 하반기에 가서는 통신사 제휴가 되는 유료 구독 서비스에 다다라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찜해 놓고 읽었다. (유료 구독 서비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일단 별도 요금 없이 쓸 수 있다니 쓴다만, 저작자나 출판사에 정산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그러나 굳이 확인하지 않는.)

 

새해에는 모두가 복 많이 받고 바라는 모든 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쓰면 거짓말이다. 바라는 모든 일을 되는 대로 이루면 안 되는 이들은 아득바득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한다. 분노가 차오르다 못해 냉소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주위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할 텐데. 잠깐 깨친 듯 하다가도 다시 기대를 하고 이내 실망을 하고 냉소에 찬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 더 복을 나눌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아래에서 조금은 더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라는 복을 받기를. 이 정도만 바란다.

한 해를 살아서 남는 게 거의 없다 느껴졌다면 8할은 가사(家事) 때문이겠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우리 집 아이에게는 비록 잔소리하는 아빠가 남았더라도, 지금 당장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는 올 한 해의 결과로 남았을 것이다. 쓰다 만 책읽기의 생각 타래는 언젠가 다시 서재에 정돈된 형태로 풀 수 있기를 바란다. 시계를 보니 그 사이에 남은 2022년은 더 어두워졌다. 곧 다시 날이 밝을 이다. 그게 2022년이 아닌 2023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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