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저 <권력과 교회>(창비, 2018)/ * 출판사 리뷰에서 옮김 

장면 1

2017년 11월 12일, 국내 초대형교회에서 40년 가까이 최고 지도력을 행사해온 원로목사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었다. 이 일로 교회 내 부자세습을 비롯한 세습 문제가 새삼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 해당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는 2013년 제정한 교단 내 ‘세습금지법’에 따라 새 담임목사 위임이 무효인지에 관한 재판이 진행 중이며, 이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장면 2

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식 때 영부인이 ‘한복’을 입지 않고 대통령과 나란히 양장을 한 것이 화제가 됐다. 이 특별할 것 없는 일이 왜 화제가 됐을까. 여성의 한복은 활동적이지 않은데, 왜 그전까지 대통령의 배우자는 공식석상에서 한복을 ‘즐겨’ 입었던 것일까.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한 행사 때마다 여성 신도가 한복을 입고 입구 밖에서 분주하게 안내하는 모습이 눈에 띄곤 한다.

먼저 첫번째 장면에서와 같은 세습은 한국 교회에서 흔한 일일까? 수치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혈통적 세습이 일어난 교회는 350개 정도로, 전체 교회의 0.4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세습은 극소수 교회에 국한된 문제일까? 그 또한 아니다. 사실상 거의 모든 교회에서 목사직의 승계 과정이 불투명하다. 일반 교인은 배제된 채 일부 특권적 신자와 목사만 아는 상태로 승계가 이루어지는 게 다반사이며, 특히 여성은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곤 한다(19면 참조). 두번째 장면에서처럼 가부장제적 가족 모델로 구상된 교회 안에서 여성은 지도자의 위치를 쉽게 허락받지 못한다(49면 참조). 따라서 교회의 세습 문제는 권력의 세습이라는 더 큰 그림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세습 문제가 불거지는 곳은 담임목사라는 위치가 교회 안팎으로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곳, 즉 대형교회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형교회에는 오늘날 한국의 ‘파워엘리트’가 밀집해 있다. 이명박정권 시기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박근혜정권 시기 ‘사미자’(사랑의교회·미래를경영하는연구모임)라는 말이 돌았듯 몇몇 대형교회에 정재계를 주름잡는 핵심 인맥이 포진해왔다. 대한민국 역사에는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이라는 세명의 ‘장로 대통령’이 존재했다. 이는 2015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무렵, 한국의 파워엘리트 3만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가 40.5퍼센트에 달한 사실과도 관계가 깊다. 우리 사회 권력의 중추에 개신교가 오랫동안 자리해왔으며, 신자가 아닌 시민들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개신교 출신 파워엘리트 혹은 개신교라는 종교 자체는 사회에 좋은 존재인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긍정적 평가보다는 부정적 평가에 한표를 던질 것이다.”(6면) 이 책의 저자인 민중신학자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권력화된 교회의 양상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끈질기게 추적해왔다. 그렇게 해서 손에 쥔 단서는, 지금 한국 사회를 과잉 대표하는 대형교회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뼈아픈 성찰이 없다면 검찰·언론·재벌 등에 보이는 나쁜 권력의 주역들처럼 개신교 역시 나쁜 권력이라는 사회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244면)

이 책에서 저자는 강남순(신학/철학), 박노자(한국학), 한홍구(한국근대사학), 김응교(문학)와 대담을 통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개신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해방 이래 한국사회의 지배권력과 다층적으로 얽힌 역사적이고 본원적인 문제임을 밝혀낸다.

실천하는 기독교인 김진호와 강남순·박노자·한홍구·김응교, 한국 교회의 ‘가장 아픈 곳’을 이야기하다

1장 「기독교인은 왜 보수적인가」에서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파워라이터이자 페미니스트 신학·철학자인 강남순과 시민사회 안팎의 시선을 통해 ‘후퇴한 민주주의’의 표상으로서 한국 교회를 들여다본다. 목사 세습 문제를 비롯해 교회 내 권력세습이 어떻게 가능한지, 개신교의 신망을 깎아먹는 일순위 요인인 재정 불투명성을 과연 ‘종교인 과세’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여성 신자들로 하여금 ‘한복’을 입게 하는 데 여성혐오의 혐의가 깔려 있지 않은지, 또 개신교 내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반동성애 운동이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한국 교회의 뿌리 깊은 보수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2장 「대형교회,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탈경계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읽어온 박노자와 ‘특권층의 안식처’로 자리 잡은 대형교회의 현주소를 짚는다. 한국은 대형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인 미국보다도 압도적으로 대형교회의 비율이 높다(한국 1.7% 이상, 미국 0.5% 추정). 주로 강남·강동·분당권에 위치한 이들 대형교회는 1990년대 강남으로 이주한 베이비붐 세대를 유인하며 팽창해갔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결혼과 취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맥공장으로 기능하는 한편, 부유한 자본가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고 바깥에서 벌어지는 노동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 교회는 이런 신자들을 위해 맞춤형 ‘웰빙’ 상품을 제공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왔으며, 담임목사는 기업의 CEO를 자처한다. 노르웨이 중상류층에게 헬스클럽과 명상센터가 있다면, 한국에는 ‘웰빙교회’가 있다.

3장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는 근현대 역사에 숨은 폭력성을 파헤쳐온 한홍구와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찾는다. 2012년 대선 국면 당시 폭발한 ‘박근혜 메시아니즘’은 종교적 광기 혹은 광신도 현상과 맥을 공유한다. 이는 멀게는 한국전쟁 전후 ‘반공’을 앞세운 서북청년단의 극우 행동주의, 좀더 가깝게는 산업화시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포섭한 ‘산기도원’의 부흥회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국가도 가족도 책임지지 못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몰려든 곳이 바로 형제복지원 같은 수용시설, 그리고 산기도원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산기도원마저 경영난으로 속속 문을 닫으면서 이곳에 있던 이들은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반공·반동성애를 기치로 보수 결집을 꿈꾼 극우적 목사·엘리트 집단에 포착된 이들 상당수가 태극기 집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4장 「욕망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개신교 내부에서 가장 날카로운 내부 비판가로 활약해온 김응교와 ‘보스적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시스템의 문제, 나아가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교회를 떠나는 이른바 가나안 신도가 늘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교회가 택한 돌파구는 성소수자·이민자·타종교에 대한 증오의 정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던 교회가 바깥의 적을 만들어 분노와 혐오를 설파함으로써, 신자들이 교회 안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전략이다.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는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였지만, 과거 빈민의 사도는 이제 ‘빨갱이 척결’을 외치는 이념의 사도로 변신했다. 개신교가 부패한 개신교, ‘개독’으로 외면받는 지금, 교회는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권력을 정의롭게 나누는 공동체를 위하여

권력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다. 문제는 권력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 권력의 효과가 공정하게 분배되느냐다. 소수자를 배제하고 혐오발언을 일삼으며, 권력의 독과점과 대물림을 정당화하고, 온갖 연줄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건물과 부동산에 집착하는 ‘일부’ 교회의 폐단은 권력이 기형적으로 작동해 쌓여온 것이다.

박근혜정권 탄핵 국면에서 차기 정부의 우선 개혁과제로 꼽힌 것이 검찰과 언론 개혁이었다. 개혁의 완수란 먼 길이지만, 검찰 수사권을 분산하고 공영방송을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으며, ‘촛불’을 경험한 시민사회 역시 그 과정을 꾸준히 견제하면서 지켜보고 있다. 교회개혁에도 그런 성찰과 비판, 전문가와 시민 공동의 개입이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반지성주의가 사회의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좋게든 나쁘게든 사회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형교회의 쇄신은 특히 절실하다. 대형교회는 전체 교회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대형교회가 아닌 교회들 대부분이 대형교회를 성장모델로 삼는 점을 고려하면 대형교회의 자정노력이 파급할 효과는 그만큼 더 크다. 나아가 대형교회의 신자이자 사회의 파워엘리트이기도 한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만큼, 사회적 혜택에서 소외되거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이들이 존재함을 상기해야 한다. 책임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넘치게 가진 자가 궁핍한 자의 하나 남은 소박한 것까지 빼앗는 것은 결코 신이 주려는 복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215면), “누구는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누구는 ‘나이스’한 존재로 만드”는 시스템 자체를 의문시하며 이를 바꿔나가고자 할 때(236면), 비로소 교회는 권력의 효과가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가는 공동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출판사 리뷰에서 옮김  
김경재 저 <틸리히 신학 되새김>(2018, (재)여해와함께)

*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이 책은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용은 다섯 개의 부로 구성되었다. 제1권에서는 이성과 계시, 그리고 존재와 하나님을 서로 상관시켜 다루었다. 제2권에서는 인간 실존과 그리스도를 상관시켜 다루었고, 제3권에서는 생명과 성령,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관시켜 다루고 있다.
****************************************

김경재 저 <틸리히 신학 되새김> 소개

1) 제1부 신앙과 이성, 그리고 거룩 체험

제1부는 틸리히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궁극적 관심’에서 시작한다. 필자는 되새김에서 “‘궁극적 관심’이 될 수 없는 대상을 궁극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과 집단의 자유지만, 틸리히에 의하면 그 결과는 우상 숭배요 인간성 파괴요 실존의 사람다움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틸리히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했고, 이 통찰은 세속화된 한국 종교에 경종을 울리며 자기 성찰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이 ‘궁극적 관심’의 자격에 부응하는 특징으로 궁극적, 무제약적, 총체적, 무한적 속성의 네 가지 필요 충분 조건을 제시했는데, 필자는 되새김에서 예수의 ‘궁극적 관심’이 생명, 정의, 자유, 사랑으로 압축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의 실현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강조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에 의해 비판받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해야 함을 강조한다.

필자는 틸리히의 사상 체계는 마치 중세 고딕식 성당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처럼, 장엄하고 정교하며 조직적이라고 주장한다. 세 권으로 구성된 『조직신학』은 모든 신학적 주제를 인간의 실존적 물음과 연관시키면서 기독교 진리를 조직적으로 변증하고 설파하는데, 방법론을 다루는 ‘서론’을 제외하면 전체 내용이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어 그의 ‘상관 방법’에 따라 전개된다. ‘상관 방법’이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서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이 상호 의존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인데, 낡은 신학 방법을 대체할 방법론으로 틸리히 변증적 신학의 핵심이다.

2) 제2부 존재자들과 존재 자체: 피조물 의식 창조주 신앙

같은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동료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틸리히의 신학 체계가 지나치게 ‘존재론적 신학’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틸리히는 니버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지만 성숙한 신앙이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장성한 사람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필자는 2부에서 틸히리가 21세기 사람들의 영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점에 주목한다. 이는 라이몽 파니카의 ‘우주-신-인간 의식의 영성’이라는 신학적 화두와 같은 맥락이다. 이는 초월적 유신론과 내재적 범신론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범재신론적 신앙의 입장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부성적 남성 신으로만 강조하기보다 모성적 속성의 하나님을 고백하려는 의도가, 명령하기보다는 설득하는 하나님이며, 군주적 신이 아닌 동반자 하나님이고, 무감동의 초연자(超然者)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긍휼의 하나님이며, 전능을 과시하는 작업가설적 신(deus ex machina)이 아니라 기다리고 치유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려는 신관이라고 설명한다.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이어서 신학적 표현으로는 성공적인 것 같지 않지만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부르고 싶은 진정한 이유는 인간이 만든 종교적 우상 신들을 폭로하고, 허무주의가 삶을 밑동에서부터 허물어뜨리려는 시대 사조를 극복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한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동아시아 문명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와 다른 세계적 종교들(불교, 유교, 도교)의 가장 큰 특징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주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을 꼽았다. 틸리히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도 창조론은 과거 한 때 일어났던 창조 사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우주 세계의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며,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를 그 피조성에서 찾고 긍정하려는 신앙고백적 담론이라고 말한다. 즉 창조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유한성을 절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인간이 지닌 자유와 운명, 창조성과 파괴성, 선함과 악함, 희망과 절망, 기획과 전진 등 생명의 양극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신앙적 담론이라고 되새김한다.

3) 제3부 새로운 존재: 인간 실존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이신 예수

필자에 의하면 틸리히는 자기 실존의 비참 상태에 빠져 절망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영적 의사로서 신학적 인간학과 그리스도론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실존 분석, 심층심리학, 타락 설화의 관점으로 현대인이 ‘왜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 사상의 공통점으로 거론되는 명제, 곧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는 인간 본질적 상태에서 소외된, 타락한 상태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갈라진다고 해석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래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고, 단순한 무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행위에 의해 존재를 선물로 받은 피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구별한다는 것이다. 즉 본질은 창조와 인간성의 본래 모습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라고 기뻐하신 진선미가 충만한 생명 상태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적 반란과 탐욕과 교만에 의해 생명 동산에 반란이 일어났고,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생명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독교 신학이 복음의 변증을 위해 실존주의를 과감하게 사용하지만, 실존주의 넘어서 믿음에 의한 ‘존재에로의 용기’를 갖는다. 필자는 기독교와 실존주의가 인간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본다는 견해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편다. 이에 대해서는 비존재의 힘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피조물 긍정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의 실존적 탄식과 절망인 [로마서] 8장을 인용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8장 38~39절

또 3부 20장에서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 상태의 특징으로 겪는 체험 중에 동서 종교사에서 공통으로 다루는 중요한 주제인 ‘고난’과 ‘고독’의 문제를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비교하여 되새김하고 있다.

4) 제4부 성명과 성령: 생명의 불안정성과 성령의 현존

필자는 틸리히가 ‘생명과 성령’을 다루는 관점에 틸리히와 생몰 연대가 비슷한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을 언급한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벌어졌던 베르딩 전투 때 각각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군목으로 전쟁에 참가해 청년 장교 시절을 보냈고 그 후 테이야르는 가톨릭 예수회 신부로서 고생물학 분야의 과학자로, 틸리히는 철학적 신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화두는 생애 후반부 이 두 사람의 화두였다. 
 
필자는 틸리히가 테이야르 샤르댕의 명저 『인간 현상』을 읽고 미래에 대한 다소 낙관적인 전망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대자연 안에서 생명의 진화론적 과정들에 대한 샤르댕의 진술을 지지한다. 틸리히는 신학은 자연과학 이론 안에 안주하는 않는다는 입장이면서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은 인정한다. 샤르댕과 틸리히 두 사람 다 생명의 다양한 현상을 ‘생명의 차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으며, 생명은 창조적 진화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인간을 다차원적인 인간 존재, 소우주라는 인식은 단순히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창발(emergence)’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언급한다. 창발이란 밖으로 새로운 현상이 발생, 출현, 생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원리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요소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대해 자연과학자이면서 위대한 과정철학자인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이라는 요소를 창조적 과정에 개입시킨다. 필자는 기독교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특이성을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갖춘 독특한 능력이나 내용에서 찾지 않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이성 능력, 언어 능력, 윤리적 가치판단 능력, 심미적 예술 능력, 도구 제작 능력뿐만 아니라 거룩 체험의 종교 능력에서도 찾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규정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며, 피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햇빛처럼 비치는 생명 세계가 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의지에 참여하는 데서 찾는다. 필자는 영성은 재능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뜻’을 묻고 추구하는 사람됨의 유일한 품성이라고 본다.

5) 제5부 역사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

제5부에서 필자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실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역사의 해석은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역사적 실재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 실존적 근본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수운 최재우를 인용하고 신천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 실린 시 [미완성]을 인용하여 인간이란 대자연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주와 역사, 공간과 시간, 생태 자연과 인간 사회는 독립되어 있는 두 개의 실체라기보다는 ‘실재의 양면성’이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경도되는 것은 참된 종교가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또 5부에서는 다른 동서양 종교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 틸리히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도 소개한다. 틸리히는 세계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눴는데 하나는 비역사적 종교 유형이고, 하나는 역사적 종교 유형이다. 비역사적 종교의 대표적 사례로는 힌두교와 불교로, 역사적 종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든다. 이들 역사적 종교의 장점은 역사에의 관심, 역사 변혁의 의지와 뜻을 역사 속에서 이어가고 찾으려고 하는 미래지향적 성격, 개인의 구원 못지않게 사회 공동체 전체가 구원받는 이상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종교적 특성을 든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비역사적 종교로 분류한 불교에 대해서 치밀한 되새김 작업을 시도한다. 필자는 불교를 현실도피적인 종교로 본다든지, 인연생기설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개체 인간과 개체 사물의 독자적 존재성이 경시되거나, 덧없는 안개 같은 것으로 간주하다거나, 심지어 공동체 의식 없이 개인의 해탈만 추구하는 종교로 보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나 틸리히의 지적대로 ‘역사를 통한, 역사의 구원’이라는 비전은 약하다는 지적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이 점에 있어 필자는 틸리히가 어쩔 수 없이 서양 기독교 신학자임을 인정한다. 이 장에서는 또 20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대두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 문제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틸리히의 입장과 한국에서 일어난 기독교와 이웃 종교들의 만남, 종교 간의 대화의 역사도 소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지만 졸업 후 바닷생활을 하느라 아쉽게도 트럼펫을 놓아야 했다. 그러다 2008년경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무려 35년여만에 다시 연주생활을 하게된거다. 군산에 적을 둔 레인보우악단은 가요와 팝 등 경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그런데 과거 브라스밴드 경험은 있었지만 막상 경음악단 입단무렵은 초보나 다름없었다.

3년쯤 지나자 쉬운 가요정도는 따라 할 수 있었지만 연주나 악보보기 모두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 악단 생활을 하다 2011년 전주 하나임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클래식 연주였다. 경음악단 생활을 3년이나 했으니 내딴에 초보티는 벗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경음악은 곡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불어대지만 클래식은 50마디, 많게는 7, 80마디를 쉬다가 들어가야한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한 음 한 음 정확히 어택해야하고, 여리게 혹은 강하게 앙상블을 이뤄야한다. 물론 이 점은 경음악도 마찬가지지만 클래식은 더욱 섬세하고 정확히 연주해야 한다. 

 


       

첫 연주는 슈베르트 <교향곡 제 8번 '미완성'>이었지만 입단 초기 6개월여는 거의 피스를 입에도 대지 못한채 전주, 군산을 오갔다. 안 하려는게 아니라  실력이 딸리니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렇게 3년여동안 하나임, 라모니오케스트라를 거쳐 군산에 적을 둔 칸투스오케스트라가 창단된게 2014년이다. 

과거 하나임, 라모니 시절은 세컨 파트였고, 칸투스에서는 퍼스트를 맡았다. 세컨 파트때는 연주를 제대로했다기보다 엉거주춤 퍼스트를 따라 한 정도였다. 무엇보다 박자가 자신없었고, 간혹 퍼스트와 같은 선율을 연주할때조차 얹혀가는 정도였다. 그러니 칸투스에서도 실력은 과거 세컨 때나 별 차이가 없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2회 연주까지 객원 연주자들에게 의지해야했다. 

트럼펫을 시작한지 어느덧 45년여, 내 나이 64세가 돼서야 드디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자신있게 퍼스트 역할을 한게 지난 해 3회 연주가 아니었나싶다. 7년전 처음 오케스트라 입단 때 슈베르트 <교향곡 8번>을 연주했는데 공교롭게도 작년 정기연주회도 같은 곡이었다. 그밖에 를로이 앤더슨의 소품곡도 몇 곡했지만 자신 있었고 큰 실수 없이 연주한 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칸투스오케스트라 창단은 잘한 결정이다. 우선은 전주까지 멀리 다니지 않아도 되고, 라모니 때와 달리 퍼스트를 맡다보니 어데 숨을데가 없어 발전 속도가 빨랐다. 잘하나 못하나 트럼펫 선율을 책임져야하는 퍼스트는 결과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연습량도 따라 많아졌다. 또 하나는 시향에 계신 G선생한테 1년정도 레슨한것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맘 같아서는 2, 3년 더 했다면 좋을것을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이제 올 9월이면 4회 정기연주회다. 연주곡은 모차르트 서곡 <티토의 자비>,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을 비롯해서 메인 곡으로 드보르작 <교향곡 제 9번' 신세계'>. 연습 시작한지 어느덧 8개월여가 흘렀다. 나름 연습을 열심히 한 때문인지 비록 수준있는 연주는 불가능해도 당장 연주회를 할 수 있을정도는 된다. 남은 3개월여, 연습에 더욱 박차를 가해 이번만큼은 최상의 연주를 하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혹시 바쁜 일이 있어 책을 못 읽더라도 모임은 꼭 나오시기 바랍니다. 꼬박꼬박 책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것만으로도 족한 독서회, 문득 생각날 때 책을 펴들수 있는, 비록 책을 자주 읽진 못해도 단지 독서회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독서회, 하지만 언젠가 기어이 책 한 권을 몽땅 읽어보겠다고 다짐하는 것. 이게 바로 제가 바라는 독서회이지요.  

2
빈센트 반 고흐의 서간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여러분에게 많은 생각을 줄것 같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무엇인지,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지, 거친 세상, 부대끼는 일상 가운데 예술을 향한 열정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나태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하는지 등등. 이 책은 음악을 가까이 하는 회원님들에 분명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것입니다.    

3
점심 마치고 커피 한 잔. 젊은 시절 자주 듣던 돈 매클린의 <빈센트>를 듣고 있습니다. 스타리 스타리 나잇....별이 빛나는 밤/ 팔레트를 블루와 회색으로 칠해요/ 여름날의 밖을 내다봐요/ 내 영혼의 어두움을 이해하는....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하려는 말을.....때로 일상이 막막하고 알수 없는 노곤함으로 휩싸일때 잠시 하던 일 멈추고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열정을 되살리며 은은한 고독감으로 감싸주는 노래니까요. 그리고 서간집도 함께 읽어보시고....푸근한 봄날씨, 님들 편안한 오후 되세요.

4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위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서양음악사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독서회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님들을 위해 진즉부터 음악관련 책을 읽어볼까 했는데, 마침 시공사디스커버리 총서로 나온 <모차르트>를 이번 기회에 읽게돼 다행입니다. 비발디, 바하, 헨델, 비인 고전파가 활동하던 시대, 즉 바로크-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찬란한 서양예술사를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번 기회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5
'칸투스 문학살롱' 오늘은 모차르트를 비롯한 비인 고전파와 금년 정기연주회 연주곡인 모차르트 오페라 <클라멘차 디 티토>서곡,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짧게 알아보았습니다. 토론 역시 짧게 하고, 주로 회원님들의 음악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군산 클라식계의 산 증인이랄 수 있는 K샘의 재미난 음악생활도 듣고, G단무장님도 오셔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 함께 했지요.

6
채만식의 <탁류>는 지금 읽어도 아주 흥미진진한데다 우리고장 군산이 배경이어서 등장하는 지명들이 낯익습니다. 이미 책이 있는 분은 상관없지만 새로 구입한다면 꼭 '문학과지성사' 판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신뢰할만 하니까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탁류>를 읽으며 최근 새롭게 알았는데, 명산동 사거리에서 둔율동 쪽으로 가다보면 양쪽 산등성이에 구름다리가 있지요? 원래 이곳은 막힌 산이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양쪽을 뚫었더군요. 소설 주인공인 초봉이 집은 정확히 구름다리 한가운데였습니다. 읽다보면 일제시대 배경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지요.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들. 백년광장 주변( 미곡취인소, 은행), 빈해원 앞(동녕고개) 제중당 약국, 창성동, 개복동, 둔율동(둔배미), 영화동, 서천, 째보선창 등등. 

7
오랫만에 한길문고에 들러 여성학 학자 정희진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과 독서모임을 다룬 책을 구입했다. 독서회에서 읽어볼까싶어서다. 그동안 가벼운 문학서 중심이었는데 <페미니즘의 도전>은 다소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회원 다수가 여성들이고, 최근 미투운동이라는 핫이슈가 있으니 시의적절할것 같다. 사실 이런 책은 여성들이 먼저 읽자고 해야할 텐데, 60중반의 남성인 내가 권유하려니 좀 머쓱하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아내와 서산 처가행. 동서 부부, 결혼한 딸 은별이도 왔다. 손자 다온이 손잡고 시골 들녘을 걷다. 한낮인데도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 부엉이, 뻐꾸기, 간혹 꿩소리까지....다온이가 후욱~ 불어대자 민들레 꽃잎이 하늘하늘 공중에 날린다. 이름모를 풀잎들, 처마 제비집을 보며 다온이에게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려주다. 어린 강아지 송송이, 들고양이가 송송이 밥그릇차지해도 무심한 송송이. 그래 아옹다옹하지말고 송송이처럼 살아야하는데, 한발 비껴서서 느긋히 바라봐야하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그게 잘 안 된다. 허겁지겁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내남없이 고단한 인생살이지만 여유, 혹은 일상의 작은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매사 어떻게 절제 하느냐,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가 관건이다. 이쯤되면 경제적 여건이 아닌 마음 씀씀이가 문제다. 또 하나. 설사 건강에 큰 이상이 없고, 여전히 강한 열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죽음이 아주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2
호기심이 끝나는 순간 인생은 내리막길이다. 호기심이 사라졌다면 어쨌든 죽은 송장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소소한 호기심이라도 소중히 간직해야한다. 언제든 워밍업 상태로 가슴을 활짝 열어둘것. 

3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이 한창 칸느를 달구고 있다. 과연 이번엔 일을 낼 수 있을까? 내심 이창동이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 내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감독은 이창동과 홍상수다. 이젠 한국영화도 황금종려상을 받을 때가 됐지 않았나? 지난 일이지만 <밀양>도 못지않은 수작이었기에 아쉬웠던차다.

4
오늘은 종일 오케스트라 연습이다. 드보르작 <교향곡 제 9번>,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 20번>,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의 자비> 서곡 등 세 곡. 금주 내내 연습에 충실히 했다. 특히 2악장 서두 네 마디와 빠른 악장인 3악장 연습에 치중했고, 피아노 협주곡도 어느정도 릴렉스 상태로 연주할 수 있으니 아마 평소대로만하면 좋은 연주가 될 것이다. 문제는 멘탈! 자, 파이팅하자.

5
모처럼 영화를 감상했다. <살인의 추억>과 <곡성> 등 두 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두 번째고, <곡성>은 첫 감상이다. 엊그게 한겨레신문에서  창간 30주년을 맞아 지난 30년동안 한국사회를 가장 잘 그려낸 영화를 설문조사 한 결과 <살인의 추억>이 1위로 꼽혔다. 대중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상업적 요소 작품성 모두 빼어나 최고작으로 꼽을만하다. 반면 <곡성>은 예술영화를 흉내낸 가짜다. 엔간하면 끝까지 감상하려고 참고참다 결국 포기했다. 그냥 공포 오락영화라고 하면 좋을 것을 왜 진지함을 가장할까. 여하튼 작품성과 오락성 양다리를 걸친 얼치기 대중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