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인공의 섬세한 의식세계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언어 형식으로 끌어낸 제임스 조이스.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는 순간, 그 사물과 연관되어 잊혀져 있던 과거의 여러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은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세계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조이스의 소설을 통해, 한 등장인물의 심리적, 내면적 갈등,은밀한 개인적 사고와 가치관, 생각 따위들을 낱낱이 알 수 있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에 나타난 온갖 계층의 더블린 시민들. 더블린 시민들이 영위하는 무감각한 일상과 영혼의 마비, 도덕성의 상실을 그려낸 이 소설에서 조이스가 목표로 했던 것은 오랫동안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시달리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전통의 구습과 향수에만 매달려 있는 조국 아일랜드 국민들에 대한 염려와 비난때문이었습니다.
한데, 이러한 상황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소시민인 리오폴드 블룸의 사소한 일상과 행동을 통해, 그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하고 다면적인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면서, 전통과 권위에 끊임없는 도전을 감행한 <율리시즈>, 식민지 치하에서의 서울 서민층의 애환을 묘사한 박태원의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카페 여급과 실직 인텔리. 그런데 실직자들은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취직을 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러한 실직자들에 대한 강한 연민은 개인만이 아니라 타인, 나아가 식민지 조국이 처한 가난과 슬픔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쉼표를 계속 사용한 장거리 문체의 박태원.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쓰여진 <율리시즈>의 마지막 장은 블룸의 아내 몰리의 의식에 의해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은 마침표없이 무려 40페이지가 계속해서 한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M씨의 <어제와 오늘 사이, 구보의 패러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오후2시에서 이틑날 2시. 블룸과 똑같이 하루동안 일어난 M씨의 내면풍경 들여다 보기.
1.어제의 블룸과 오늘의 구보가 어떻게 비슷한 느낌이 들 수 있는가를 골똘히 느낀다.(왜? 이들의 비교를 통해 나의 소설을 다시 상기해 보고 싶어서)
2.구보가 친구를 만날 때 마다 신맛 나는 홍차,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향수를 나도 느끼기 위해, 나도 (....) 아프리카의 표범같은 몸매를 한 그의 날렵한 육체를 사진으로 더듬으며, 고소해 한다.
3.따분한, 오직 도시 안에서만 맴도는 그의 지겨운, 일상의. 다람쥐 챗바퀴 도는 소설가의 하루를 그려 보다가, 아니야, 이건 뭔가 아니야, 하다가 조이스의 개성에 찬 문체가 선망하게 한다.
4.<소설가 구보의 일일>의 문체에서 나는 끊임없이 제임스 조이스의 흔적을 엿보고 또 엿보며 흐믓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신기하다. 국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문제의식이 달랐을 터인데, 그들은 어째서 똑같이 쉼표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비슷한 문체에 도달한 걸까)
5.보리죽도 못먹던 그 시대에 구보가 누리던 (소설적 기법의?)근대의 세련됨은 어디서, 도대체 비롯된 것일까.
6.(나 역시 구보와 마찬가지로)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선선히 음식을 시킬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다. (그런데도 내 문체는 왜 구보만도 못한걸까?) 7. 치기어리고, 속물적인 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 마다 느끼는 상대적 열등감은 어떻게 해야 보상받을까?
* ( )는 저의 상상력으로 채운 내용입니다. 제 생각이 맞나요? 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오래전에 김종건 선생이 번역한 범우사판 전집을 구입해 놓고도 워낙 난해해서 몇 번 중도하차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여전히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M씨의 재미있는 글을 계기로 한번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아무튼 제임스 조이스를 화제로 삼았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반갑습니다.요즘은 글쓰는 이들까지도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내내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