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잡은 통속예술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기만적이거나 자기 만족적이며 무엇보다 감상이 용이하고 피상적인 사이비예술이다. 키치가 감상자에게 아첨하고 거짓된 예술이라는 것은 통속예술과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통속예술과 달리 순수예술에 기생한다. 즉 고급예술 혹은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는 점에서 통속예술과 다른 특징을 지닌다는 거다. 또한 키치는 그 감상이 지극히 피상적인 인식에 기초해 있고 어떤 긴장도 요구하지 않는 안일한 예술작품임에도 순수예술의 한 자리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중의 악덕을 지니게 되는데, 하나는 통속예술 고유의 악덕과 다른 하나는 오만이라는 악덕이다. 어떤 경우에는 제3의 악덕까지도 있다. 키치의 생산자가 자기 작업의 사기성을 알면서도 고급예술임을 위장하는 경우로서, 이때에는 거짓과 위선이라는 새로운 악덕이 부과된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치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 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양식이다. 고도의 집중과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모욕적인(?) 고급예술과는 반대로 키치는,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며 그 달콤함(때로는 시큼함)으로 추근댄다. 키치는 독창성과는 반대의 예술양식이고, 탁월함에 대한 범용함의 승리이며 천재에 대한 재능의 승리다." - 조송배

티켓 파는 지휘자

지휘자가 연주를 앞두고 행여 아이들의 소란으로 연주회장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까 염려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의 연주시간이 무려 70여분에 이르는데, 과연 청중들이 참고 들을 수 있을지도 걱정한다. 티켓이 안 팔리다 보니 지휘자가 손수 나서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무료로 와서 들어 보라 해도 오지 않는데 누가 돈을 주고 살까. 한때 시향 지휘자이셨던 S선생의 푸념이다.

키치. 어중간한 예술, 고급예술에 기생한 사이비 예술, 시큼하고 느끼한 것. 이제 키치는 한발 나아가 키치적인 독자와 관객을 양산하기에 이른다. 교양과 우아함으로 치장한 청중들의 몸짓 사이를 떠돌며 완고하게 자리잡은 키치적인 것.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에서 주연 여배우의 비극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배경음악 <죽음과 소녀>를 접한 후, 뒤늦게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에 관심을 갖는 감상자들. 이들의 문제는 이 음악이 영화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곡을 들을 때마다 그 상황과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령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을 감상할 때 '월광'을 떠올리거나 반드시 '운명'을 연상해야만 <교향곡 제5번>을 제대로 감상하는 듯한 태도도 마찬가지며, 이런 인상주의적 감상 방식은 다름 아닌 키치적 산물이기도 하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지오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예>에서 나오는 아리아 '람마 모르타'는 몰라도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하다. 오래전 토요음악감상회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푸치니와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를 소개하기에 앞서 아그네스 발차가 부르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강조해야 하고, 굳이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아리아조차 수용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 때문이다.

로베르트 알라냐와 안젤라 게오르규가 부르는 노래는 정작 뒷전이고 그들이 미남미녀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선호되고, 험프리 보가트와 마를린 몬로, 장 가방과 알랑 들롱이 나와야 반응하는 이 적당한 교양, 이 시큼한 냄새, 이 느끼한 키치적 상황은 일말의 위기감을 떠올리게 한다.

상당수 오디오매니어는 정작 음악을 좋아하기보다 오디오 기기와 소리에만 집착한다. 주객이 전도된 셈인데, 음악보다 오디오 자랑에 더 열을 올리는 그들은 어떤 기기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가가 주요한 관심사다. 더욱 문제는 자신들의 세계에 타인의 접근을 쉬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일종의 선민의식이랄 수 있겠는데, 이들의 모임은 마치 비밀결사체를 방불케 한다. 이런 식의 배타적인 섹티즘은 이들 뿐 아니라 클래식을 전공하는 상당수 음악인과 클래식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키치의 진원지는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그 당시 여러 명의 오디오, 클래식 매니아를 만났지만 어느 누구도 음악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음악 주변의 가십과 오디오 기기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새로 안 사실인데, 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조차 음악을 화제로 삼기를 꺼린다.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지만, 맨날 음악 속에 살다보니 지겨워서 그런가 보다 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창밖을 바라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를 감동적으로 들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감동을 잊지 못한 나머지 귀가하자마자 소유하고 있던 고급 오디오로 곡을 다시 들어봤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 전 라디오에서 받았던 감동을 맛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음악은 결코 오디오 성능 여부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면 아무리 낡은 라디오라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부득이 국산 오디오에 2급 시디를 주로 듣는 편인데, 간혹 오디오 매니아들을 만나면 내가 소장한 시디를 자랑하고픈 생각이 들어 말을 꺼내보지만 아예 경청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에겐 최상의 음반, 최상의 음질, 최고의 연주자가 연주한 음반이 중요하지 그밖의 것들은 감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키치

나는 내 주변의 문화적 현실을 키치적인 너무나 키치적인 상황이라고 단언한다. 키치의 만연은 말할 것 없고 예비작가 기성작가 할 것 없이 모두가 키치적 상황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과장하면, 대규모적인 웅대함이 특징인 말러의 교향곡조차 키치로 분류될 수 있다. 융통성이 없이 외형적 스케일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베토벤의 아류라고 비판받기도 하니까.

그러기로 말하면 서머셑 모옴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작 <인간의 굴레>는 좀 망설여지지만 부를 안겨준 대부분의 희곡과 소설은 거의2급 수준으로 폄하되는 실정이니 말이다. 한때 국내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던 이문열 경우 <황제를 위하여>를 제외한 여타 작품은 키치에 불과하다, 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다시 반복한다. 키치란 순수예술에 기생해서 "독창성과는 반대의 예술양식이고, 탁월함에 대한 범용함의 승리이며 천재에 대한 재능의 승리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일은 이런 식의 확대 해석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키치적 상황부터 차근차근 따져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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