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나눔아카데미' 특강/ 김진호 목사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현재 한국기독교는 "교파 분열이 극심하지만 교파 간 신앙적 차이는 거의 없다. 또한 교파가 100여개나되는데도 장로 없는 교회는 거의 없다. 반면에 미국의 경우 장로회는 장로를 두고 감리교는 장로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다 비슷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월남자 교회, 선발 대형교회, 후발 대형교회로 유형화할 수 있다. 먼저 월남자교회는 40-50년대를, 선발 대형교회는 70-80년대를, 후발 대형교회는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급성장한 모델이다. 그런데 이들 교회의 정치적 경향은 대부분 친미-반공-친체제이다.
교회사에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사건이 무척 중요하다. 1907년 즈음 평양에서 교세가 급격히 커졌다는 것인데, 왜일까? 1903-1904 러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은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해로와 육로로 진격하는데, 평양이 그 육로에 있었다. 평양은 청일전쟁 때도 격전지였기 때문에, 평양시민들은 외국 군대에 대한 공포심이 유달리 컸다. 일본군이 진격해오자 이들은 공황에 빠졌고, 이때 이들이 달려간 곳이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였다.
일본도 미국 선교사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는 조선인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했고 식량도 배급했다. 진보적 의식을 가진 선교사였다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이 선교사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학파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들과 함께 골방에서 기도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 몇 초기신자들이 '성령체험'을 하고, 이를 계기로 평양의 교인이 크게 불어난 것이다.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종교적 체험은 매우 맹목적인 통합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이를 주도한 미국 선교사들의 권위도 강화되었다. 근본주의 신학파들이 한국 교회의 교육, 제도, 목사안수 등을 도맡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정체성은 이때 만들어졌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장면
해방후 북한에 진주하고 좌익이 권력을 장악하자 이들 교회는 대거 남하했다. 평안도 교회가 먼저, 황해도 교회가 그 뒤를 이었다. 황석영의 <손님>에서 보듯, 교인들은 전투세력화되어 좌익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고, 반대파와 가족까지 학살하기도 했다.
남하한 월남자 교회들은 미군정과 교섭한다. 일본이 남기고 간 교회들을 불하받기 위해서다. 미국 근본주의 교회들도 대폭적인 원조를 보내온다. 미국 망명객이자 독실한 크리스챤인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것도 그들에게 큰 힘이었다.
'반공'과 근본주의 신앙을 정신적 배경으로 하고, 원조물자와 적산물자의 독점을 물질적 배경으로 하여, 월남자 교회는 빠르게 성장한다. 친체제/반공/친미는 이 과정에서 이들의 신앙에 깊숙히 내면화했다. 이때 교파의 분열도 일어난다. 겉으론 '이단'에 대한 배척이었으나 실상은 황해도 라인과 평안도 라인의 분리, 전라도 라인과 경상도 라인의 분리가 핵심이었다. 외국교회의 원조기금과 물자를 어떻게 나눌 것이냐 하는 논란 속에, 지역적 파벌들 사이의 다툼이 교파 분리로 이어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신앙적 차이 없는 교파 분열의 배경인 셈이다.
한편, 70-80년대 고도성장은 순복음교회 같은 선발 대형교회를 낳았다. 이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 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된 때이다. 교회는 이들을 흡수하며 또 한번 성장한다. 교회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준 것은 사회비판능력이 아니라 현실순응과 현실도피의 담론이었다. 교회는 "열심히 일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1주일에 하루, 노동의 고됨과 정신적 피로를 씻어버릴 공동체적 치유를 교회에서 찾았다.
시간이 지나자 실제로 자수성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고 교회의 성공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제도화란, 다른 교회들도 순복음교회를 보며 보수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팽창정책을 서둘러 따라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후발 대형교회는 9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발을 맞춘다. 민주화는 개인의 권리의식을 발달시키고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일방적 억압은 어느 정도 해체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시민사회 내에 계급이 뚜렷이 분화하고 그 사이의 배제는 더 심해졌다.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탈권위적인 중산층의 등장과 함께, <경배와 찬양> 같은 문화코드들이 나타난다. 온누리교회의 경우 심지어 나이트클럽을 빌려 예배를 보기도 하며, 청년층 흡수에 성공하여 대학생만 4천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흐름과 더불어 성장한 교회에 '소망교회'도 있다.
주로 강남에 포진한 이런 교회에는 계급적 특성도 뚜렷하다. 대학부는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등 명문대생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청소년들이 뒤풀이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열고 크리스마스 올나잇을 카페를 빌려 한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대학생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아버지"라고 답한다. 사회와 가정의 권위와 투쟁하며 성장한 민주화세대와 달리, 이들은 매우 체제 순응적이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중상류층에게 질 높은 '결혼시장'을 이룬다.

소망교회
소망교회 사람들은 '쿨'하다고 한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고, 겉으로 보아 도덕적이며, 성공과 나눔을 추구하는 '웰빙' 신앙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신념의 근저는 크게 다르지 않고, 미시적인 여러 문제들은 표면적인 미학으로 은폐된다.
예수는 실상 매우 급진적인 혁명가였다.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이 독점한 권력과 맞서 싸웠다. 죄사함을 구하는 이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러한 정신을 현재의 대형교회들에서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 내 권력독점을 해체하고 참된 예수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소수교회들도 있으며, 꼭 교회가 아니어도 그리스도 정신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예수의 정신을, 이를 독점하려는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출처] "명품교회엔 예수가 없다"|작성자 JU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