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앤스터디 김상봉 <그리스 비극론 1> 제 10강

 

나-운명의 동일성/타자성

 

그리스 비극의 특징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다지 타자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신/운명은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moira는 인간이 타고난 몫으로서 이 세계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운명이지만 완전히 외재적인 무엇은 아니다. 운명은 삶의 굴레인 동시에 자기 규정이란 점에서 나의 안/밖에 걸쳐 있다.

 

이러한 이해에서 그리스인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비롯된다. 그리스인에게 운명은 단순한 굴종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운명과 개인적 의식(주체)의 관계는 동일성과 차이성의 공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극은 바로 이 긴장에서 발생한다. 운명과 내가 순수한 의미의 하나, 동일성 안에 있다면 비극은 싹트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와 운명/신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타자적이라면 이때도 비극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신은 순수한 초월자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분열을 상징한다. 우리 삶의 온갖 현실적인 것들이 신적인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오레스테스를 좇는 에우메니데스(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사로잡는 양심의 가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최자영 『아테네 정치제도사』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은 신적인 힘이 된다. 아폴론과 같은 빛의 신 뿐 아니라 에우메니데스 같은 어둠의 신도 인간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미 서사시의 시대에 신은 인간성의 지평 속에 들어 와 있었다. 서정시의 경우에는 그것이 좁은 의미의 개인 안으로 들어온다. 비극에 오면 객관적 공공성과 서정시의 개별적 반성이 매개된다.

 

"기독교적 비극이 가능한가" 질문할 수 있다. 한편에선 가능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여호와가 "마지막에 합하여 선을 이루시니" 무슨 비극이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 경우 전제는, 비극은 본질적으로 결말이 비참하다는 것이다. 참된 의미의 비극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계속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신이 양쪽을 지양해 버리는 기독교적 세계에서 비극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비극의 본질을 다른 데서 찾는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보더라도 해피엔딩이 비극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은 아니다.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극 전체를 통해 인간성의 숭고를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적 세계 속에서도 비극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이들 입장이다.

 

합리성과 운명

 

운명이 합리성의 한계 바깥에 있는 듯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것, 부당한 것을 배제해 나간다. 그러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이 대립이 파열할 때 오히려 파국이 온다. (cf. 우리의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의 문제점은 운명과 합리성이 충돌할 때 아무런 주저 없이 합리성을 버리고 맹목성으로 치닫는다는 데 있다.) 비극은 그 긴장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인들은 그 두 가지 계기가 모두 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왕』의 오이디푸스는 신/운명에 끝까지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신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장중히 퇴장한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 그리스 비극의 탁월함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실천적인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운명과 주체성의 충돌이라기보다 각기 다른 도덕적 정당성이라 할 것이다. 개인이 사회적 삶 속에서 떠맡을 수밖에 없는 악역의 정당성의 한계. 그것은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라 하겠다.

 

아이스퀼로스 작품의 의의는 그리스 문학에서 처음으로 양심을 문제삼았다는 데 있다.


때때로 기독교적 양심과 그리스 도덕률을 비교하여 그리스인의 도덕률은 탁월함의 도덕률이었다고, 기독교적 양심은 그들에게 낯선 정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주체성의 발생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개인이 책임져야 할 정감이 생겼음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개인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폴리스 시민으로서 다른 누구에게도 자기 욕망의 책임을 돌리지 않고 떠맡아야 했다.

 

주체가 자기 일의 모든 정당성과 부당성을 책임지려 할 때 온전한 의미의 주체성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기원전 6세기에는 (철학적 차원과 별도로) 실천적 차원에서 양심이 문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 징후를 비극에서 본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정점은 『오이디푸스왕』이다. 『오이디푸스왕』에는 두 가지 주체성이 결합해 나타난다. 한편에선 인식적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반성적 의식이 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 실천적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과 악을 가름하고 자기가 한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주체가 요구되었던 배경이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비극이 꽃을 피웠던 기원전 6세기∼5세기에 이르는 1백년 남짓한 기간은, 정치적 문맥에선 귀족 정치가 타파되고 폴리스 민주주의가 정착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스인들은 1인 참주정치의 체제 속에서 내부적으로는 권력을 평민들에게 분배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민주주의적인 훈련이 안된 상황에서 시민들이 공공적 이성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면 각종 행정 절차를 정비하는 것만큼이나 시민교육으로서의 문예정책을 펼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이룬 한 가지 계기가 페르시아 전쟁이라면 (아테네인들은 이 전쟁을 통해 민주주의적 자유 국가의 이상을 내면화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비극 혹은 문학의 힘이다.

 

비극은 전국가적인 민족의 자기 계몽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를 길러낼 수 있었고, 좋은 의미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계몽하고 교육하였다. 그것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 황금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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