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앤스터디' 김상봉 <그리스 비극론 1> 제 9강
그리스 서정시의 시대는 철학의 시대와 시기적으로 거의 같다. 서정시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진전은 주체성이 등장한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에 대한 자각이 시작된 시대가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런데 서정시의 세계에서 '나'는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자각은 한편으론 사물/자연을 새롭게 보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계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든 참된 사물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자기 의식은 반성적 의미의 사유의 출발인 동시에 나와 타자와의 거리를 의미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의 거리 사이에서 나를 인식한다. 서정시의 시대가 과학, 철학적 세계관의 시대이기도 한 것은 바로 이 거리 때문이다. 이 거리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마주할 수 있다.
서사시의 시대는 모든 것의 합일의 시대이다(총체성의 시대). 반면 서정시에서 나는 나이고 자연은 자연이다. 서정시에는 이탈되는 자립적 존재의 상이 등장한다(소외). 영웅적인 기사도를 숭상했던 서사시의 시대와 달리, 서정시의 시대는 다양성의 존중이 두드러진다. 나와 공동체 사이에는 일정한 심리적 거리가 출현하고 시인은 개별적 자아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사포 등)
나에 대한 자각은 자연과의 무차별한 합일로부터 벗어나 주체가 타자와 어떤 거리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의식의 일정한 진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자칫 자기 자신에 대한 탐닉과 집착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서사시는 문자 그대로 (삼인칭 대상들을) '이야기'할 뿐이지만, 서정시는 주체의 자기 반성 속에서 1인칭 나를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사사로운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한갓 개인의 넋두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문학은 보편적 설득력(전달가능성)을 가질 때에만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서정시는, 서사시적 삶이 보여주는 총체적 지평만큼이나, 내가 보여주는 보편적 자아의 확대가 이루어질 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나의 자기 반성 속에서 세계의 총체성을 돌이켜 보려는 시도는 서사시적 정신의 발전 단계보다도 훨씬 고양된 정신 단계를 요구한다. 나의 정신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지 않고서는 삶의 보편적 진실을 길어내기가 쉽지 않다.
사사로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시와 나 속에서 보편적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시는 분명 다르다. 나를 통해 말하되 사사로운 '나'가 아닌 보편적인 나(주체성)에 대해 말할 때 참된 의미의 보편성과 문학적 정당성이 가능하다.
우리 문학에서 만해와 소월이 탁월한 까닭은 그들의 시에 개인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사사로이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시인들은 그걸 본받지 못했다. 마치 개인적인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시의 진정성인 양 오해되는 시대이다. 한편,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산 것과 보편성을 등치시키는 일이 있다.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져 자기를 노래한 것에 공감하는 것은 사람들이 더불어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나를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의미의 보편성을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나를 말하면서 1인칭으로서 삶을 반성하되, 사사로운 나로부터 이탈한 보편적 나를 사고하고 그럼으로써 보편적 주체성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만해, 소월). 그러나 이에 반해 사사로운 나에서 더 큰 나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작은 나로 함몰되는 구조가 있다(윤동주, 백석, 정지용 등). 똑같은 서정시라 할지라도 후자는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도야하지 못하고 유약하거나 이기적인 나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우리 시는 점점 더 사사로운 자기 도취로 흐르고 있다. 나는 개별성 속에 함몰되어 어떠한 보편적 지평도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이 자각되는 시대에 이상의 도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화적 시험이 된다. 자기를 자각함으로써 보편적인 나로 나아가는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열 수 있지만, 다시 사사로운 자기에게로 함몰하는 시대는 병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시인들은 나를 반성함에 있어 끊임없이 보편적 주체를 사고함으로써, 새로이 열린 개별성이 이기적 개인들의 대책 없는 충돌로 치닫지 않게끔 문학을 통해 동료 시민들을 교육했다. 그것은 서정시로부터 비극까지 이어지는, 그리스 문학의 중요한 화두이자 일관된 시대 정신이다.
우리 문학은 어떠한가? 신문학 이후 처음으로 개인의 자발성과 중요성이 의식될 무렵, 극소수의 위대한 시인들을 제외하고, 나 속에서 나를 잊고 삶의 총체성을 반성하는 문제는 내버려져 있었다. 그 결과 각자는 고립된 자기 반성으로 치달았을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실적 삶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를 알았던 까닭에 그리스 시인들은 주체 자각의 현실적 결말이 대책 없는 개인들의 충돌이 되지 않도록 서정시와 비극에서 남다른 노력을 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