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경희대 교수)/ <나의 철학 수업> 중 일부의 글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니체는 교회 나가지 말라고 선동하는 나쁜 사람쯤으로 비치는 것인데, 이렇게 황폐한 지성의 풍경이 내가 경험한 한국 교회의 실상이었다. 한 마디로 이 정도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신의 말씀’을 운운한다는 사실에서 별로 신뢰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후일 이런 편견은 다양한 성서신학자들을 만난 뒤에야 일정하게 사라졌지만, 이렇게 각인된 허접한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는 꽤 오랫동안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의 ‘말씀’보다 니체의 말에 훨씬 더 무게중심을 두게 만들었다. 나에게 기독교에 목을 맨 ‘종교적 인간’은 니체의 포효 앞에서 사라지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니체가 나를 사로잡았던 까닭은 종교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그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도 문학도 나에게 구원을 주지 못할 때, 니체는 깊은 허무주의를 극복할 묘책을 던졌다. 니체를 달리 실존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존주의는 궁극적으로 허무에 대한 대책이라고 볼 수 있다. 허무의 본질은 곧 신의 부재와 관련성을 맺는다. 지금 현존하는 삶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각성은 인간에게 공포를 준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초월자’를 발명해서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기탁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생각의 근본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화비평이다.

 

니체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선구적인 문화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의 계보』는 아주 훌륭한 문화비평서이다.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은 니체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비평’한다.

이 도덕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위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선한 정령에게 경의를 표하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는 역사적 정신 자체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역사의 모든 선한 정령 자체에서 방치되어버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 모두는 낡은 철학자들의 관습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으로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루는 도덕 계보학의 미숙함은 ‘좋음’이라는 개념과 판단의 유래를 탐구하는 것이 문제될 때, 처음부터 드러난다.  - 『도덕의 계보』.


이렇게 도덕사를 기술한 역사학자들을 비판한 뒤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압권이다.

그러나 첫째로 나에게 분명한 것은, 이 이론에서 ‘좋음’이라는 개념의 본래적인 발상지를 잘못된 장소에서 찾고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즉 저급한 모든 사람, 저급한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 비속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즉 제일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드높은 사람들, 높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 있었던 것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니체는 도덕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바로 “격차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에서 찾고 있다. 『도덕의 계보』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나 원래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라, “고귀함과 격차의 파토스, 좀 더 높은 지배종족이 좀 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에서 기인한 “‘좋음’과 ‘나쁨’의 대립”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통찰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하다.    

 

이택광 교수 블로그 http://wallflower.egloos.com/4117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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