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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적 감정의 직접적인 표시였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고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가장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그 무엇에 결별의 인사를 해야만 했다. 어쩔도리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은신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도 또 들판이 있고, 사막을 지나가도 또 사막이 있으리. 나는 영원히 그 여행을 끝내지 못할 것이고, 마침내 나의 둘씨네를 그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어느 누군가가 말하듯이, 이 좁다란 공간 안에 그 오래고 긴 희망을 가두어 두어야 하리!
마죄르 호숫가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그러한 영광의 대용품들을 찾으면서 사는 수밖에!" - 장 그르니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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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속에서만 알던 마죄르 호수가 스위스의 한 지명이었다는걸 우연히 알았다. 젊은 시절, 그르니에의 글을 통해서만 알던 그곳. 하지만 나에겐 늘 보던 호수같이 친근하고 낯익었다. 역시 멋진 풍경이다. 비록 사진이지만 족히 에세이에 등장할만하게 보인다.
혹시라도 실제 가볼수 있을까? 늘 독서실 일로 분주한 내 형편으로는 어림없다. 아니, 사실은 가보고싶지도 않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도 또 들판이 있고, 사막을 지나가도 또 사막이 있"거늘.....안 가본들 또 무엇이 다르랴. 게다가 나는 지금 독서실 일로 단 하루, 아니 몇 시간도 비울수 없지않은가? 그러니 설사 제주도가 마죄르라 해도 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각한건대, 설사 마죄르 호수가 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딱히 가보고싶지 않고, 다만 그런곳이 있었나 알면 그만이겠다. 은파호수보다 좀 낫긴 하겠지만 그래서 어떻다는건가. 중요한건 실제의 호수가 아니라 내 마음 속, 상상 속의 호수가 더 중요한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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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기원전 12세기 무렵의 고대 그리스를 다녀왔다. 거리로 따지면 스위스 마죄르 호수보다 훨씬 멀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등 그리스 비극을 연이어 읽고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소 모두 지금 내가 사는 이곳과 비교하면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시공간이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주도나 마죄르 호수나 고대 그리스나 다를바 없다.
아마 나는 평생 독서실에 갇혀 살다가 이곳에서 생을 다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이들면 자연스럽게 독서실을 그만두겠지만 그럴지라도 마죄르 호수를 찾을 확률은 거의 제로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수 없이 좁다란 두 어평 크기의 사무실에서 나의 둘씨네를 찾아야하고, 마죄르 호수를 꿈꿔야하며, 에게해 푸른 바다까지도 떠올려야한다. 아니, 바로 이곳이 마죄르 호수이고, 에게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