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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개인 아침, 뒷뜰 손뼘만한 텃밭에 노란 배추꽃이 피다. 배추꽃, 하고보니 배추가 꽃이었나?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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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두어 평쯤되는 뒷란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밭도 아니고 화단도 아닌 어중간한 곳이라 오래 돌보지 않던 곳이었다. 40여포기 임피 농협에서 배추 모종을 가져왔다. 면적이야 크던작던 과정은 별차이가 없다. 구시장에서 사온 검정비닐 씌우고 영양제도 주고.....,시골에서 자란 아내는 눈썰미있게 작은 밭고랑도 내고, 모종 주변을 흙으로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농사가 쉽지 않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40포기남짓 텃밭이 무슨 농사일까만은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게 아니었다. 가물면 물줘야지, 시도때도 없이 자라는 풀 뽑아야지......비만 내렸다하면 풀들이 쑥쑥자랐다. 뒷뜰, 한뼘 햇빛마저 사라지자 가을이 깊게 익어갔다. 덩달아 배추도 포기가 풍성해졌다. 어렵쇼! 제네들좀 봐, 잎사귀가  제법 푸르네, 덩치도 커졌고. 제법 배추밭 테가 났다. 아내와 나는 걸핏하면 그리운 연인 기다리듯 뒷뜰로 달려갔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자 아내의 얼굴에 희희락락 미소가 번졌다.  

- 올겨울은 저걸로 김장하자구요.

고시텔생이 있으니 100여포기는 해야 된다. 기껏 40포기로는 어림없지만, 암만 그래야지~ 호기롭게 맞장구를 쳤다. 올 김장은 우리 배추로 꼭 해보자구. 아내와 나는 굳게 결의까지 했다. 시나브로 가을이 가고 초겨울로 접어들자 배추잎에 벌레들이 생겼다. 하나둘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꼬물거렸다. 아내와 나는 일어나자마자 이쑤시개를 들고 텃밭으로 내달렸다. 희안한게 해만 뜨면 귀신 같이 벌레가 사라졌다. 워낙 작은 크기라 잘 보이지도 않고, 보호색이라 돋보기를 써야 겨우 보였다. 한 마리, 두 마리, 제법 많았다. 비가 내리면 배추도 커지고, 벌레들도 함께 몸집이 커갔다. 하루게 다르게 숫자도 많아졌다. 처음엔 녹색이더니 회색빛으로 굵어졌다. 그새 진녹색 짙푸르던 배추잎도 숭숭 구멍이 뜷리고 줄기가 앙상해졌다. 처음엔 한 두 포기더니 갈수록 상처투성이 구멍난 배추가 늘어났다. 큰일이었다.   
아내는 새벽이면 쏜살 같이 텃밭으로 달렸다. 몇 십포기 배추키우기가 이렇게 힘든줄 몰랐다. 벌레잡는다고 허리를 꾸부리니 점점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실은 나도 그랬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푸념이 나왔다.

- 까짓 몇 십 포기 사다먹지 뭐.

배추벌레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농약을 뿌리고 싶지만, 지난 두어 달 쏟은 정성을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와중에 풍성히 자란 푸르른 배추가 불쌍했다. 열심히 잡아보자구, 허리 아프다는 아내를 독려하며 아침이면 텃밭으로 갔다. 좋다. 너희들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해보자. 벌레와의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겨우 40포기지만 고생한걸 생각하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계속될무렵....

아내와 함께 2박3일 완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무슨 청승일까, 여행지에서도 은근히 구멍 숭숭뜷린 배추가 걱정이었다. 아이고, 징글맞은 배추벌레 우리 아까운 배추 다 갉아먹겠네. 배추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 멀리까지 들려오는듯했다. 아내와 나는 배추 걱정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귀가하자마자 뒤란 텃밭부터 살폈다. 어허~ 불과 사흘인데 처참했다. 온곳에 구멍뚫린 배추가 나뒹그러져있었다. 더이상 볼게 없다. 늑달 같이 구시장으로 달려갔다. 좀 독한놈으로 주슈~ 배추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놈의 배추벌레만 사라진다면...... 한 뼘 텃밭에 물에 탄 농약을 마구 뿌렸다. 쥑일놈의 배추벌레 너죽고 나죽자, 사정없이 뿌려댔다. 제풀에 손가락만한 배추벌레 몇 마리가 꼬물꼬물 기어나왔다. 죽어라 이놈~ 그제야 화가 좀 풀렸다. 뒤란 맨땅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는 잿더미 불난 집이라도 되는양 하얗게 농약가루 묻은 배추밭을 바라봤다. 저것 키우느라 고생 많았는데 하루아침에 거덜나는구나. 아, 인생이고 배추고 별것 아니구나. 

3
고군분투했던 가을은 그렇게 지나가고, 어느새 초겨울 눈발이 날렸다. 슬슬 김장을 할 때가 되었다. 추워지기 전에 김장을 해야겠지? 발산 단골 농가에 절임배추 100포기를 주문했다. 아~ 40포기는 우리것으로 하려고했는데, 아쉬웠다. 꼭이 김장비를 절약해서라기보다 직접 키운 배추로 하면 얼마나 대견스러울까. 하지만 이미 기차는 저멀리 떠나버렸다.  

농약뿌린 배추면 어때 잘 씻으면 되지. 시장에 나온 배추라고 다 농약 안 쳤을까. 포기가 탐스러운데 농약 안 치고 저렇게 키울리 만무하다. 아내와 나는 애써 위안했다. 문득 텃밭 볼품없는 패잔병 배추가 떠올랐다. 별것 아니지만 몇 포기 뽑아다 함께 해볼까? 텃밭 배추를 보자 사연 많던 지난 가을이 떠올랐다. 너희들 참 애썼다. 벌레들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오종종하니 손바닥만한 배추들이 역전의 용사처럼 대견스러웠다.

4
아침, 고시텔 학생 등교 시킬때는 으레 FM방송을 켠다. 이즈음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이 자주 흘러나온다. 비단 음악뿐일까, 사위가 온통 봄냄새로 가득하다. 우리 집 봄은 독서실 계단에서 시작된다. 계단 벽돌 틈틈이서 얼굴 삐죽이 내민 풀잎들, 바야흐로 독서실 화단 연분홍 철쭉도 화사하게 피었다. 지난 주 아내와 함께 대야장에서 왕대추 한 그루. 대봉시 한 그루, 자두 나무 한 그루를 사왔다. 고놈 배추벌레 보기싫어 배추는 포기하고 대신 유실수를 심기로한거다.

겨우내 팽개쳤던 텃밭에 풀포기가 마구 자랐다. 지난 가을 배추벌레, 농약 살포로 몸살 앓던 배추도 풀과 함께 모두 뽑아버렸다. 모처럼 뒤란 텃밭으로 갔다. 그새 미뤘던 유실수를 심어야지. 비 개인날, 봄 햇살 화사하니 바람까지 간지럽다. 아지랑이 너울너울, 순간 눈에 들어온 노란 물결, 노란 꽃이파리~ 텃밭 귀퉁이, 풀과 함께 뿌리 뽑힌 배추에서 노란 꽃이 피어났다. 잔뿌리 몇 개 애써 땅에 의지하고 버틴 노란색 배추꽃. 아름다워라~ 볼품없던 네가, 마구 뽑아버린 네가 이렇게 예쁜 꽃이 되다니. 반가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비록 장미가 아니라도, 기품 가득한 수국이 아니어도, 그래 분홍빛 화사한 철쭉이 아니면 어떠랴! 지난 가을, 그리고 겨울내내 뿌리채 뽑힌 신세였지만 끝내 이겨내고 노란색 새생명으로 피아났구나. 

비개인 아침, 뒷뜰 손뼘만한 텃밭에 노란 배추꽃이 피다. 배추꽃, 하고보니 배추가 꽃이었나?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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