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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의 2014년작 <윈터 슬립 Winter Sleep>은 예술영화의 정수가 무엇인지, 왜 영화가 문학 이상으로 훌륭한 장르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영화의 특별함은 여러가지지만 우선 시종일관 계속되는 잦은 대사를 꼽을 수 있다. 가령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거의 연극적 무대를 방불케할정도로 빈번하고 현란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쇼트와 쇼트의 시각적 정보, 이미지에 의존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윈터 슬립>의 경우는 시각적 이미지와 병행해서 등장인물들이 쉴새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따라서 관객들은 시각적 이미지 보다 이들의 대화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은 에릭 로메르 감독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과도 유사한데, 관객은 쉴새없이 이어지는 인물들의 대화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해석해야 한다. 즉 영화의 기존 틀인 시각적 정보 전달에서 연극적인 대화 중심 전달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윈터 슬립>은 연극적 영화다. - 우디 앨런의 영화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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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영화에서 대화 위주의 영화라면 홍상수 감독을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감상태도를 요구한다. 따라서 만약 관객들이 기존의 영화들과 같이 시각 이미지에만 의존한다면 이내 진력을 느낄 수밖에 없고, 아마 이점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도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홍상수와 누리 빌게 세일란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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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슬립>은 무려 3시간 가까운 긴 상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30분짜리 단편영화를 보는듯 긴장과 몰입을 하게 한다. 영화를 보던 중 나도 모르게 '아~ 멋지다 멋져' '원더풀!' '브라보!' 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두 마리 토끼, 즉 영화적 재미와 교훈을 한꺼번에 성취한 영화!

 

홍상수의 영화가 삶의 단면을 조명한 단편이라면 누리 빌게 세일란의 <윈터 슬립>은 인생 전체를 조망한 대하장편에 비교될 수 있다. 우리에겐 과연 언제쯤 이런 감독, 이런 영화가 가능할까. 로베로 브레송, 잉그마르 베르히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테오 앙겔로풀로스 이후 오랫만에 맛본 최고의 감동이다. 역시 영화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예술장르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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