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역, 그린비(2012년)

타우베스는 사도 바울의「로마서」를 독해하면서 바울의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이에 의해 구원에 대한 바울의 믿음, 바울이 세우려 한 공동체 등이 정치적 문제가 된다. 타우베스는 바울의 「로마서」가 “정치신학이며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45쪽)라는 테제를 내세운다. 당시 세계 질서는 로마 제국과 혈연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바울은 이 질서에 맞서 범이스라엘 사상을 주장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유대인이라는)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에 따른 ‘약속’과 ‘믿음’의 공동체이다. 하느님의 옛 백성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포괄하는 이 범이스라엘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질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범이스라엘’은 어떤 정치 질서를 지닌 공동체인가? 바울에게 세속의 정치 질서와 신의 질서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세속의 질서는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상의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인 [율]법의 폐기를 주장한다(「로마서」가 정치적 선전포고였던 점도, 로마 제국이 [율]법의 기초한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이 지상의 질서는 폐기되고, 믿음을 가진 자들은 구원받게 된다는 사상을 펼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저항이나 반항을 하는 대신,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라(‘이웃 사랑’의 계율)는 충고를 던진다. 그리하면 최후의 순간에 메시아가 도래할 때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타우베스가 해석하는 바울의 사유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얼핏 이는 어차피 종말이 올 테니 이 세상의 문제에서 도피하라는 염세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과 타우베스는 염세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애세주의(愛世主義)자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세계를 무화하고 “지상의 질서를 틀 짓는 권력의 구조 자체를 폐기해 버리는 부정적 정치신학”을 작동시키려 했던 것이다(252쪽).

타우베스에게 20세기에 태어난 바울주의자는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청년 시기에 쓴 「신학, 정치적 단편 」과 「로마서」를 비교 독해함으로써 타우베스는 바울과 벤야민의 유사성을 밝혀낸다. 두 사람 모두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니힐리즘’적으로 파악했다.

둘 모두 창조를 덧없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이 세계를 스러져 가는 것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청년 벤야민에게도 지상의 질서와 신의 질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벤야민 역시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폐기하는 메시아의 도래를 확신했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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