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역, 길(2007년)


지젝은 발터 벤야민의「역사철학테제」제1번을 뒤집는다. 즉 발터 벤야민이 유물론을 꼭두각시, 신학을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난쟁이에 비유했다면, 지젝은 이 테제를 뒤짚어 유물론을 난쟁이, 신학을 꼭두각시의 자리에 놓는다.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후 역사적 유물론이 파산한 이념으로 간주되지만, 여전히 우리 사유의 토대는 유물론이고 유물론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신이 죽은 사회, 즉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어쩌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일상적 삶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한다. 즉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종착역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곧 “지배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섹스를 즐길 것, 죄의식을 느끼지 말 것을 명한다. 이때 우리가 죄의식의 부재에 대하여 치르는 대가는 불안이다.” 즉 불안은 우리의 실존적 체험의 근간을 이루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이데올로기로서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 기독교, 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젝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는 점은 무수히 많은 한국사회의 교회 피뢰침과 대도시 밤거리의 향락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에서도 역설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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