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사무실 서재에서 나리만 스카코브의 저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잠깐 읽다. 저자 약력을 보니 스탠포드 대학에서 슬라브어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워낙 책 내용이 촘촘하고 영화 분야에 두루 박식해서 깜박 영화학과 교수로 착각할정도. 타르코프스키를 다룬 책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국내 저서로는 유일하게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김용규 교수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가 유일하다.

 

김 교수는 교양인문학의 한 방편으로 영화와 철학을 접목한 글을 많이 쓴 학자인데, 타르코프스키 외에도 폴란드 출신의 거장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십계> 연작을 분석한 장장 700여쪽 분량의 <데칼로그>를 출간한 바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세상의 수많은 영화감독 중 내가 으뜸으로 손꼽는 감독. 예술영화의 모범이자 교과서 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은 이미 모두 감상한 바 있지만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이라도 반복 감상해야 할 이유가 있다. 볼 때마다 새롭고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 때문인데, 작품 하나하나가 이른바 고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과거 학교 실습선 승선시절에는 300여매 분량의 타르코프스키 영화관련 글을 쓴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전혀 집중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 늘 아쉽다.  

 

퇴직하면 어느 골목 단골카페에 자리잡고 커피 마시며, 종일 글이나 쓰고 책 읽는게 꿈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전혀 예기치않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누가 배를 탈줄 알았으며, 그것도 동기생 중에서 가장 오래 탈줄 누가 알았으랴. 게다가 이 나이 되도록 독서실에 붙박힐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정 무렵,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올라오니 텅빈 건물, 집도 텅비어있다. 아내는 친정에 다니러 갔다. 나 홀로인 이 시간, 비록 하루동안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로움이 주는 느긋함, 여유가 너무 행복하다. 여름저녁, 고요함.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하나 꺼낸다. 프로젝터를 켜고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쪽으로 간 까닭은>을 볼까하다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을 감상하기로 하다. 대체 내 삶에서 책과 영화, 음악을 빼고나면 무엇이 남을까

 

홍상수와 타르코프스키의 차이점. 타르코프스키의 관심은 비일상적인 현실이라고 부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본래 이 영역이 진정한 현실이며 일상생활에 매몰된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그저 수많은 종류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이 고양된 인식 상태에 이르는 능력을 개발한다면 비일상적인 현실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면 홍상수는 우리가 늘 겪고있는 일상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낯익은 영역이다. 그는 하루하루 현실에 매몰된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고,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감독의 역할은 그런 장면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일상생활을 정작 얼마나 모른채 살고 있는가, 얼마나 그런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풍경은 분명 우리가 평소 습관처럼 하던 것이지만 영상으로 보는 순간 전혀 낯설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잠깐 말했다시피 우리가 일상에 워낙 매몰된 상태로 살다보니 영상 속 일상이 오히려 비일상적인 현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숲을 보여준다면 홍상수는 나무를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가 나무를 놓치거나 홍상수가 숲을 놓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체로 전자가 우주, 세상, 인생이라는 거시적 주제, 틀에 관심을 갖는다면, 후자는 자잘한 일상, 생활, 개인의 버릇, 습관 같은 미시적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망원경, 홍상수는 현미경에 비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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