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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평점 :
장르 불문,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을 읽노라면 항해 관련 장면, 용어, 비유가 곧잘 있다. 나는 늘 이물과 고물 사이에서 배회한다, 배의 머리와 배의 뒤쪽 사이에서. 이물은 선두(船頭), 고물은 선미(船尾), 하면 명확한데 순우리말 사랑 때문?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이물은 늘 이물(異物: 정상적이지 않은 다른 물질)로 거기 어디쯤 있다.
또 있다. '선두맡'이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익숙한. 어린 시절 좀 쓰던 말인데, 최근 검색에도 내가 아는 용법을 찾지 못하였다. 선두맡이란 배(풍선, 돛단배)들이 정박하는 포구, 바다로 나갈 때는 그물 등 어구를 싣고 , 돌아와 그날 혹은 그때 잡은 생선들을 내리는 그런 곳, 선창(船艙)의 다른 이름이었다. 머리맡의 '맡'처럼 선두맡은 뱃머리들이 그 머리를 기대는 그런 곳쯤이 아니었을까.
비닐하우스 농사로 요즘이야 딱히 농한기가 없다. 당시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바다로 나가 한동안 뱃사람이 되기도 했다. 배가 들어올 즈음이면 1킬로미터 가까운 거기까지, 대바구니를 들고 선두맡으로 갔다. 당신이 품삯으로 받을 크고작은 생선들을(대체로 상품성은 떨어지는) 집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땐 없었던 생각이지만 무사귀환한 가장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냥 선두맡이었을 뿐이다. 짧게는 한 나절, 길게는 며칠을 거친 파도와 씨름하여 고단했을 어선들이 마침내 돌아와 뱃머리(선두)를 기대고 쉬는 집, 선두맡. 그곳은 포구였고, 규모만 달랐을 뿐 요즘의 항구였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바다는 늘 풍요로운 반찬이었다. 선두맡은 내 유년 시절 아련한 그리움이며 재현불가한 선미(鮮味)이다.
매달 비용이 아깝기도 하여(시간이 더 그럴 것인데) OTT서비스를 만끽한다. 이등병 시절 보초 수준의 경계다. 최근 <트로이: 왕국의 몰락>(영국, 드라마, 2018)을 봤다. 회당 60분씩 8부작, 러닝타임 480분 드라마다. 2004년 개봉 <트로이> 196분(3시간 16분)보다 할애한 시간 상당하다. 덕분에 서사시 <일리아스>는 물론이고 전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 드라마 <트로이>의 미덕이다. 더 이상 볼 장이 없음에도 1회당 60분 남짓은 드라마를 16부작까지 꼭 채우는 국내산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이 아르고스(항)에서 출항해 재차 아울리스(항)에 도착했을 때 함대는 역풍에 묶였다. 그러자 칼키스가 말하기를, 아가멤논의 딸들 중 가장 예쁜 딸을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더 이상 항해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후반, 요약) 적게는 열두 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까지, 트로이로 출항해야 할 그리스 곳곳에서 소환된 함선들이 출항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 아울리스 항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아버지는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었다. 드라마는 필요 이상으로 이 대목에 집중한다. 아울리스 선두맡에서 있었다는 일에 대해서.
도서관 서지 목록에 가까운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 앞서 언급한 신화의 요약본까지 수록한 책 후반부를 읽다, 문득 발견한다. 여기에서 ‘역풍이 분다.’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석이다. 그가 ‘역풍에 묶였다.’로 옮긴 이유다.
‘역풍’의 그리스어 ‘aploia’는 ‘항해할 수 없음’이란 뜻으로 ‘바다의 잔잔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노를 저어 에게 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전적 정의로 역풍(逆風)이다. ‘역풍’이란 한자어 의미까지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역풍’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바람이 필요한데 필요한 바람이 오지 않는다. 서핑하기에 딱 좋을 만큼 포구로 몰아치는 그런 파도가 아닌 것이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하지 않나. 맥락은 맥락이다. 아가멤논은 무플과 싸운 것이다. 무플 때문에 무단히 세 딸 중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바치면서, 너의 전쟁은 나의 전쟁, 우리의 전쟁으로 바꾸는 나쁜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어선에 동승한 적 없으니, 잘 모르지만 버스에 동승한 아버지로 짐직하건데 거의 모든 탈것 들에서 멀미가 유난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 갈 수 있는 배 위에서의 인생도 그랬으리라. 동쪽 나라, 트로이로 가는 대장 함선에서 아가멤논의 심사는 대체로 복잡하였고, 신화와 서사시와 비극들 사이에서, 변명하거나 변론을 하는 고전들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