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쟁탈기 보름달문고 63
천효정 지음, 한승임 그림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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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효정의 글을 좋아한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지만, 작가의 글로 공감하고 웃던 시간을 경험했던지라 매번 천효정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궁금하다. 삼백이의 엉뚱함으로 깔깔거리게 하더니, 이번에는 열세 살 소녀의 성장기로 두근거리게 한다. 아, 여기서 이 단어를 써야겠다. 설렘설렘. 그냥 설레는 것도 아니고 그 강도가 굉장히 센 어감이다. 설렘설렘. 두 볼에 홍조를 띠고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과 누군가를 향해 귀가 쫑긋 열리는 두근거림이다. 살면서 이런 순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유독 그 떨림에 두근대게 하는 건 ‘처음’일 때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첫사랑’이어서다. 입을 열고 이 단어를 말하는 순간부터 떨림이 오고 있잖아. 안 그래?

 

앙큼한 깍쟁이 같은 열세 살의 세라가 사립 명문 학전초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획적이다.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정말 놀랐음. 요즘 아이들 다 이런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지 않는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처세술을 발휘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잘 되어가나 싶더니 이 학교의 킹카가 세라에게 눈독 들인다. 아직은 안 되는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한 다음에 일이 터져도 안심인데... 계획과 어긋난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면서 세라의 새 학교생활에 위기가 온다. 거기에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명구의 등장은 이야기가 점점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구는 정신지체 장애우다. 근처의 보육원에서 사는 명구는 학전초등학교의 특별한 학생이다. 아이들은 명구를 바보라고 부르지만 세라의 눈에 들어오는 명구의 행동은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어라? 명구 좀 멋진걸?!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아는 아이, 그 외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더 잘 아는 아이, 아이들 세계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그 세계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방법을 터득한 아이가 세라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산되고 계획된 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여야 할 모습을 취하면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히 다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자랄 때도 이랬나? 나는 좀(아니, 많이) 순진했던 것 같은데... 세라의 행동을 보면서, 세상살이에 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어른들의 찌든 삶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게 지금 열세 살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싶어 무섭기도 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내가 자랄 때와 다른 그 시간의 적나라함을 확인하게 하더니, 이야기가 봄날의 꽃가루 날리는 장면으로 바뀐다. 갑자기 세라의 눈에 들어온 명구 때문이다. 아이들이 바보라고 불리는 명구의 다른 모습을 본 순간 세라의 마음은 철렁한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내 마음이 내 것인데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건지 모르는 사이에도 두근두근. 왜 명구를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거냐고! 명구는 내 취향 아닌데, 왜 하고많은 매력남들 놔두고 명구가 눈에 들어올 게 뭐야? 세라의 이런 고민을 알 리 없는 명구의 천진난만함이 대조적이다. 한쪽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붙잡지도 못해 동동거리는데, 한쪽에서는 유유자적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이 연상된다. 난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것처럼. 어쩌면 좋아?!

 

어느 무리에서나 있을 법한 캐릭터가 하나씩 있다. 여자아이들의 리더 격인 예린이, 모든 여자아이들의 로망 같은 대상 다니엘, 눈치 없이 둔해 보이는 반장 대호. 이 아이들 때문에 세라의 계획이 자꾸 한 발짝씩 빗나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분위기로 이야기는 흐른다. 세라가 계획한 대로 새 학교에서의 적응과 처세술을 발휘했다면 완벽한 모습의 학생으로 자리했을 텐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될 텐가. 원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관심과 대호의 순박함이 빚어내는 갈등, 그에 예린이가 희생양이 되는 계획에 없던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세라는 당황한다. 그 당황의 최고봉은 역시 명구에 대한 마음이다. 처음 세라가 등장했을 때부터 파악할 수 있는 건, 세라가 어떤 아이로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세라는 냉정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도 거뜬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새 학교에서 기죽지 않고 자리 지키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고, 그에 마음 단단히 먹고 교실 문을 연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명구는 절대 눈에 들어오지 못할 대상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거다. 세련되고 공주님 같은 세라와 어딘지 좀 다르고 많이 느린 아이 명구라니. 아마 세라가 생각했던 첫사랑의 그림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 ㅎㅎ 그래서 웃음이 많이 난다. 이 설정이 세라에게 가져올 변화가 어떨지, 이 과정에서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서다. 전혀 관심 두지 않은 아이 명구를 향한 세라 만의 시선, 그 시선을 통해 세라가 보게 될 난생처음의 것들, 그리고 성장해야만 하는 그 시간에 새롭게 쌓이게 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얼 봤느냐고? 봤지. 보긴 봤지. 열세 살 아이의 설레는 맘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공부나 집안 배경이나 눈에 보이는 계산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명구의 순수함, 그런 명구에게 관심 두면서 점점 세상을 보는 시선을 넓혀가는 세라의 표정을 함께 보게 되는 거였지. 저절로... 어때? 이 정도면 이 아이의 첫사랑이 얼마나 큰 알을 낳았는지 보이지 않아? 세상을 살면서 계산도 해야 하고, 사람도 가려야 하고, 피해가야 할 것도 있게 마련이지만, 아직 그 모든 것을 경험하기도 전에 그런 세상을 선입견처럼 듣고 배우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씁쓸했다. 나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 부끄러워...) 세라가 변하는 모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 변화에 응원하게 된다. 정말 봐야 할 것을 보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위태로운 세라의 가족과 학교생활에 좀 더 웃음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은 나만 드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바람인 걸까.

 

세라가 명구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궁금하다. 사실 웃음이 더 많이 난다. 열세 살 아이의 마음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어른들 세상의 축소판 같은 아이들 세상에서 보게 되는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다른 점도 있고 비슷한 점도 있어서 새롭게 보게 되는 세상을 만나기도 하고 공감을 담아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라의 시간을 살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조카가 있다. 이 아이가 내년에 그 시간을 살아갈 거로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지금도 그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내년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러네. 이 작은 이야기로 공감하고 품게 될 것들. 설렘과 두근거림, 긴장감과 기대감, 쓸쓸함과 안도감까지, 많은 감정을 불러올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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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병원 생활이 익숙할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을 듯하다.

어제는 집으로 돌아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엄마 말로는 7시간을 꿈쩍도 않고 잠을 자더라고...

몇달동안 하루에 2~3시간 자던 것을 생각하면 꿀잠이어야 하는데

어째 피곤은 더 쌓이기만 하는 건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서평도서 신청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거였는데

갑작스러운 일에 집에 다녀갈 때마다 보이는 책이 참 무겁게 느껴진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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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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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옳은 일이라고, 그때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으며 그 순간을 견딘다. 여러 경우를 떠올리며 계산을 한다. 뭔가를 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덜 잃을 것을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든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므로 그쪽으로 손을 뻗는다. 잘했어. 잘한 거야. 토닥토닥. 그리고 안도한다. 이제는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더 중요한 걸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다 좋은 거야. 하지만 괜찮지 않다. 좋은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게 되는 거다. 참아야 할 게 있고, 참아서는 안 될 게 있다. 셀레스트가 용기를 내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할 때,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631페이지)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거다.

 

자신이 처한 진실을 숨기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은 점점 몸을 불리고, 표정을 가리기 위해 쓴 가면의 화장은 점점 두꺼워진다. 읽다 보니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이들의 사연에서는 좀 불편하다. 그저 마음속 말들을 표현하지 않은 거라고 해 두자.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게 거짓말인 건 아니니까. 피리위 반도에서 만나게 된 세 여자 매들린, 셀레스트, 제인의 숨겨진 마음을 듣는 게 독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서로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품은 사이지만, 그녀들은 정작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통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했다. 아마 그 세 사람만의 처세술은 아닐 거다. (나도,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 사람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예비학교에 다니는 다섯 살 아이를 둔 학부모들, 자기 아이가 세상의 유일한 천사인 것처럼, 가정이 이룬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학교 안에서도 적용된다고 믿는 개념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권력을 정한다. 시쳇말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안에서 세상의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마흔의 여자 매들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며 부유한 삶 이면의 것을 감당하는 셀레스트, 우연히 찾아든 해변의 매력에 빠져 아들과 함께 피리위 반도에 스며든 싱글맘 제인. 세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비학교의 학부모들과 각자의 인생이 들려줄 소소하고 큰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끌고 간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을 파헤치는 수사의 과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물을 한 명씩 배치해놓고, 그들의 말을 잠깐씩 끼워 넣으며 독자가 사건을 추리하게 한다. 도대체 누가 죽은 거야? 왜? 범인이 누구기에 이 사람들의 진술을 다 듣는 거지? 근데 모두 엇갈리는 진술뿐이잖아?

 

폭력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난폭해진다. (451페이지)

 

예비 학교 학부모들의 퀴즈대회가 있던 밤, 누군가 죽었다. 소설은 퀴즈대회가 있기 6개월 전의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매들린과 셀리스트, 제인의 개인적인 일들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세 여자의 삶을 독자의 눈에 각인시킨다. 학교에서 전남편의 새로운 가족과 아이를 봐야 하는 매들린은 쿨한 전처이자 엄마가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이성이 이끄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들린의 상황이다. 이런 희한한 상황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견디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이런 관계가 뭐 어때서?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자리한 용감무쌍함을 매 순간 발휘한다. 자상한 남편과 쌍둥이 아들, 부유한 환경이 우아한 삶을 부여한다고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셀레스트는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사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고 잘 사는 거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나를 위한 모든 게 최상이에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만족이 셀레스트의 행복을 얼마나 지속하게 해줄지 궁금해질 무렵, 이 소설의 분위기가 전환된다. 가난한 싱글맘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언제까지 알게 하려고 하는지, 제인과 그녀의 아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첫날부터 호의적이지 않다. '카더라 통신'의 중심에 선 학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선입견으로 이방인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인은 포기할 수 없다, 아직은.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자리한 곳에서 정녕 내가 발붙일 곳은 없는 건가요? 내 아들과 행복해질 권리가, 나에게도 있어요...)

 

이 소설의 제목만 보고, 처음부터 등장하는 학부모의 말을 듣고,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거로 생각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읽어가면서 내내 느꼈다. 이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수도 어른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커져 있는 상태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그게 인생을 얼마나 휘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게 이들의 실수라면 실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겠지만,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순간의 안도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거다. 그저 한 번, 두 번, 그냥 지나가고 말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쓴 약을 삼킨 뒤 달콤한 사탕 한 알 입에 넣는 것과는 다르다. 전혀 다른 무게다. 너무 늦게 알게 되는 일들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답을 줄 수도 있음을 소설은 말한다. 무엇보다, 친밀하다고 여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자 반전으로 흥분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삶을 걸어온 이들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시사한다. 새로울 게 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서로에게 시종일관 가면무도회장에 초대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상대를 향한 진심을 가린 채로, 앙숙처럼 지내다가도 순간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기도 하는, 다른 엄마에게 질 수 없어 소리 없는 발악을 내지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을 눌러 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알 수 없고, 알리고 싶지도 않다. 그 표정 너머의 진심을 말하고 싶지 않은 거다.

 

다른 사람 문제는 항상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 아이는 항상 고분고분해 보이는 거야. 재빨리 걸어가는 지기를 보면서 매들린은 생각했다. 제인이 가족사진을 가지러 간 사이에 매들린은 제인의 작고 깔끔한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언제나 그렇듯 애비게일과만 함께했던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떠올렸다. (260페이지)

 

제발, 그러지 마. 참지 마... 나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주문을 걸면서 읽고 있었다. 더는 그러지 말라고, 가리지 말라고. 그렇게 나의 시선은 그녀들이 언제쯤 터트릴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문장을 쫓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과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운함이 밀려왔다. 등장인물들의 엇갈린 진술 속에서 진실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야 마주하는 진실은 뜻밖의 감정을 불러왔다. 이렇게 풀릴 수도 있다는 걸 보면서, 누군가를 향한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긍정의 기대를 품게 한다. 아줌마들의 가벼운 수다 한판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안의 뿌리 깊은 진심을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인간의 겉모습 뒤로 가린 삶이 얼마나 많고 다양할 수 있는지, 어떤 고통으로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사소한 거짓말이 결코 '사소한' 것으로 머물지 않음을 풀어낸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겪는 오해와 진실에 관해 이만큼 재밌게 읽게 하는 소설이 있을까 싶다. 동시에, 읽는 재미는 더없이 좋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우리 삶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아서 아팠던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달콤한 초코파이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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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새옷을 입고 나와서 좋긴 하다만

딱히 만족스럽지는 않다만

좋아했던 책이라 그런지 눈길이 가긴 한다.

 

 

 

 

 

 

 

 

 

 

 

 

 

도서 세트와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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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 신나는 새싹 15
길상효 글, 안병현 그림 / 씨드북(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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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추석에 조카들에게 선물하려고 고르다가 발견한 책이다. 제목의 어감이 좋아서 눈에 담았는데, 막상 펼치고 보니 그림까지 따뜻해 보여 더 좋았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어떤 풍경이 읽는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럴 수밖에.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늙어가고 있는데, 이 시간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코 질질 흘리면서 뛰어놀던 아이의 시간으로 돌려놓곤 했으니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리움을 뿌려놓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보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오래된 것들은 점점 사라진다. 편리하고 예쁜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낡은 것들이 밀려나듯 자리를 비켜주고, 새것들이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곤 한다. 굳이 말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 변화에 익숙해지는 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익숙하게 보이고,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 바닥마저 흙이 사라진 지금, 이 동네 이야기가 선뜻 다가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이런 모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쉽게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런 그림책에서 보는 장면들에 시선이 한참 머문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모습이기에.

 

시골이나 도시라는 구분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한 30년쯤 전의 어느 동네를 그린 듯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이어져 있고, 담장 너머로 누구네 집 이야기 소리가 흘러 넘어오고, 해가 기울고 집집이 켜진 불빛이 불꽃놀이보다 더 예뻐 보인다. 아마 그 시간에 작은 밥상을 앞에 두고 둘러앉은 식구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져서일 거다. 넉넉하지 못한 시절에 밥 한 끼 먹자고 마주하는 그 시간이 너무 귀하다. 하루에 한 번도 얼굴 마주하지 않고서도 잘 지내는 가족들이 요즘의 모습이라면, 그 시대의 가족들은 그 한 끼에 모든 것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웃으면서 하루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소박한 찬거리에 젓가락질이 재밌던 시간이다. 많은 것이 삶을 채우고 부유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때 그 시간, 그 장소가 주는 정겨움이 있다. 소박한 삶의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애틋한 그림책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오후의 시간을 보냈을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면 숨어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면 그대로 놀라버리고 마는 일이 익숙하다. 개인 소유의 마당이란 개념이 없이 대문이 없는 집도 허다하고, 골목에 꺼내놓고 다듬는 채소들, 남의 집 일거리가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수다 떨듯 모여 있는 시간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일에 웃음보따리가 터진다. 가을볕에 말리려고 담벼락 사이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의 색이 점점 진해진다. 옆집 아저씨가 술에 취해 들어와서 고음불가 능가하는 노래를 부르고, 늦은 밤에 누가 다녀가기라도 했는지 동네 개를 밤새도록 짓는다. 마을 입구의 조그마한 슈퍼 앞에 자리한 평상은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이 되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게 그늘을 만든다.

 

 

피곤함에 지친 사람들이 밤새 행복한 꿈을 꾸고 난 이른 아침의 풍경은 활기차다. 두부 장수가 뜨끈뜨끈한 두부가 왔음을 알리고, 청소부 아저씨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른 하루를 연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군데군데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지각할까 봐 열심히 뛰어가는 구둣발 소리, 앞집 뒷집에서 책가방 매고 나오는 아이들이 몰려가는 소리, 서로 얼굴 보며 인사하는 소리... 활기찬 아침의 풍경이 골목길의 시간을 적는다.

 

"사라져 가는 골목을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저, 골목이 있었던 이야기예요.

아직 어딘가에 이런 골목 하나쯤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요."

다 읽고 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첫 페이지를 열면 나오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읽은 나도 알고 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 골목의 시간을 살려낼 수도 없다는 것을. 그저, 우리의 시간 한구석에 이런 추억이 있었다는 걸 잊고 싶지 않다는 조용한 바람이 아닐까 싶다. 가끔 엄마가 외할머니 살아계실 적의 집, 그 우물이 있던 자리를 얘기하곤 하신다. 내 기억에도 없는 외할머니와 외갓집의 우물은 엄마의 머릿속에 저장된 채로 그렇게 가끔 추억을 소환하는 주인공이 된다. '그땐 그랬지~' 하는 그리움을 쏟아내는 단골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기억 하나쯤 깊게 새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 이 시간, 이 공간, 이 시간의 냄새를 그리워하면서 떠올리는 때가 오겠지...

 

 

가끔 조카들과 이런 그림책을 같이 읽을 때가 있는데, 아이들의 눈에 이런 풍경은 낯설다. 이런 골목이나 집들, 창문을 열면 앞집과 옆집이 보이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는 구조가 희한한 듯 보기도 하더라. 왜 땅에다가 고추를 놓고 말리고 있느냐며 묻기도 한다. 당연하다. 실내놀이터가 익숙하고, 아파트 생활만 하면서, 학교마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구조가 익숙한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 속의 풍경은 정말 책에서나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아이들이 잘 듣고 잘 이해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예쁘다. 그때는 이렇게 생활했었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끄덕이는지 모르겠지만, 이 낯선 풍경이 지금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느끼는 향수를 공감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슬쩍 들지만 뭐, 몰라도 어쩔 수 없고... 장면이 다를지 몰라도, 이 아이들이 자라고 나서 그리워하는 어떤 시간의 모습도 그리움이라는 공통점은 있을 것 같다. 외할머니 집 마당의 텃밭을 파헤치고 엉망을 만들어놔도 예쁜 건 그래서다. 언젠가,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지나서 조카들이 이 시간을 떠올릴 때, '우리 외할머니 집에 갔을 때 흙을 잔뜩 묻히고 놀아서 엄청나게 혼났었지.' 하는 기억을 꺼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때, 오래 전 얘기를 하면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일 것이기에.

 

글도 그림도 예뻐서 눈에서 금방 사라지지 않을 듯한 책이다. 아이와 어른 모두 애틋해질 수 있는 이야기다.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공감이란 이름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골목이 우리를 그 시간 속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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