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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쟁탈기 ㅣ 보름달문고 63
천효정 지음, 한승임 그림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천효정의 글을 좋아한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지만, 작가의 글로 공감하고 웃던 시간을 경험했던지라 매번 천효정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궁금하다. 삼백이의 엉뚱함으로 깔깔거리게 하더니, 이번에는 열세 살 소녀의 성장기로 두근거리게 한다. 아, 여기서 이 단어를 써야겠다. 설렘설렘. 그냥 설레는 것도 아니고 그 강도가 굉장히 센 어감이다. 설렘설렘. 두 볼에 홍조를 띠고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과 누군가를 향해 귀가 쫑긋 열리는 두근거림이다. 살면서 이런 순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유독 그 떨림에 두근대게 하는 건 ‘처음’일 때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첫사랑’이어서다. 입을 열고 이 단어를 말하는 순간부터 떨림이 오고 있잖아. 안 그래?
앙큼한 깍쟁이 같은 열세 살의 세라가 사립 명문 학전초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획적이다.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정말 놀랐음. 요즘 아이들 다 이런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지 않는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처세술을 발휘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잘 되어가나 싶더니 이 학교의 킹카가 세라에게 눈독 들인다. 아직은 안 되는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한 다음에 일이 터져도 안심인데... 계획과 어긋난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면서 세라의 새 학교생활에 위기가 온다. 거기에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명구의 등장은 이야기가 점점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구는 정신지체 장애우다. 근처의 보육원에서 사는 명구는 학전초등학교의 특별한 학생이다. 아이들은 명구를 바보라고 부르지만 세라의 눈에 들어오는 명구의 행동은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어라? 명구 좀 멋진걸?!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아는 아이, 그 외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더 잘 아는 아이, 아이들 세계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그 세계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방법을 터득한 아이가 세라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산되고 계획된 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여야 할 모습을 취하면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히 다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자랄 때도 이랬나? 나는 좀(아니, 많이) 순진했던 것 같은데... 세라의 행동을 보면서, 세상살이에 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어른들의 찌든 삶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게 지금 열세 살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싶어 무섭기도 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내가 자랄 때와 다른 그 시간의 적나라함을 확인하게 하더니, 이야기가 봄날의 꽃가루 날리는 장면으로 바뀐다. 갑자기 세라의 눈에 들어온 명구 때문이다. 아이들이 바보라고 불리는 명구의 다른 모습을 본 순간 세라의 마음은 철렁한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내 마음이 내 것인데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건지 모르는 사이에도 두근두근. 왜 명구를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거냐고! 명구는 내 취향 아닌데, 왜 하고많은 매력남들 놔두고 명구가 눈에 들어올 게 뭐야? 세라의 이런 고민을 알 리 없는 명구의 천진난만함이 대조적이다. 한쪽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붙잡지도 못해 동동거리는데, 한쪽에서는 유유자적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이 연상된다. 난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것처럼. 어쩌면 좋아?!
어느 무리에서나 있을 법한 캐릭터가 하나씩 있다. 여자아이들의 리더 격인 예린이, 모든 여자아이들의 로망 같은 대상 다니엘, 눈치 없이 둔해 보이는 반장 대호. 이 아이들 때문에 세라의 계획이 자꾸 한 발짝씩 빗나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분위기로 이야기는 흐른다. 세라가 계획한 대로 새 학교에서의 적응과 처세술을 발휘했다면 완벽한 모습의 학생으로 자리했을 텐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될 텐가. 원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관심과 대호의 순박함이 빚어내는 갈등, 그에 예린이가 희생양이 되는 계획에 없던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세라는 당황한다. 그 당황의 최고봉은 역시 명구에 대한 마음이다. 처음 세라가 등장했을 때부터 파악할 수 있는 건, 세라가 어떤 아이로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세라는 냉정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도 거뜬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새 학교에서 기죽지 않고 자리 지키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고, 그에 마음 단단히 먹고 교실 문을 연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명구는 절대 눈에 들어오지 못할 대상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거다. 세련되고 공주님 같은 세라와 어딘지 좀 다르고 많이 느린 아이 명구라니. 아마 세라가 생각했던 첫사랑의 그림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 ㅎㅎ 그래서 웃음이 많이 난다. 이 설정이 세라에게 가져올 변화가 어떨지, 이 과정에서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서다. 전혀 관심 두지 않은 아이 명구를 향한 세라 만의 시선, 그 시선을 통해 세라가 보게 될 난생처음의 것들, 그리고 성장해야만 하는 그 시간에 새롭게 쌓이게 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얼 봤느냐고? 봤지. 보긴 봤지. 열세 살 아이의 설레는 맘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공부나 집안 배경이나 눈에 보이는 계산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명구의 순수함, 그런 명구에게 관심 두면서 점점 세상을 보는 시선을 넓혀가는 세라의 표정을 함께 보게 되는 거였지. 저절로... 어때? 이 정도면 이 아이의 첫사랑이 얼마나 큰 알을 낳았는지 보이지 않아? 세상을 살면서 계산도 해야 하고, 사람도 가려야 하고, 피해가야 할 것도 있게 마련이지만, 아직 그 모든 것을 경험하기도 전에 그런 세상을 선입견처럼 듣고 배우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씁쓸했다. 나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 부끄러워...) 세라가 변하는 모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 변화에 응원하게 된다. 정말 봐야 할 것을 보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위태로운 세라의 가족과 학교생활에 좀 더 웃음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은 나만 드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바람인 걸까.
세라가 명구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궁금하다. 사실 웃음이 더 많이 난다. 열세 살 아이의 마음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어른들 세상의 축소판 같은 아이들 세상에서 보게 되는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다른 점도 있고 비슷한 점도 있어서 새롭게 보게 되는 세상을 만나기도 하고 공감을 담아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라의 시간을 살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조카가 있다. 이 아이가 내년에 그 시간을 살아갈 거로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지금도 그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내년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러네. 이 작은 이야기로 공감하고 품게 될 것들. 설렘과 두근거림, 긴장감과 기대감, 쓸쓸함과 안도감까지, 많은 감정을 불러올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