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늙어갈 수 없을까? (맞춤육체 238페이지)

 

정아은의 소설 『맨 얼굴의 사랑』은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조성환과 글을 쓰려고 하지만 일단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서경이 주인공이다. 이서경은 소설의 캐릭터 연구를 위해 환자로 위장하고 조성환에게 성형수술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이서경은 흐지부지한 글쓰기를 일단 멈추고 조성환의 추천으로 그의 성형외과에 상담실장으로 일한다. 어느 날 이서경은 조성환이 집도하는 가슴 성형 수술에 참관한다. 아무래도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나면, 상담을 좀 더 사실적으로 성실하게 할 수 있을 듯했다. 말로만 듣고 상담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게 날 테니. 생생하게 눈으로 목격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묘사된 가슴 성형 수술 장면이다.

 

가슴 밑을 메스로 긋자 옥수수 알갱이처럼 생긴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호사가 집게로 벌려 준 일자로 난 틈새에 조성환이 기구를 넣어 공간을 넓혔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긴 송곳 모양의 기구가 위아래를 쑤시면서 보형물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했다. 제법 큰 부피의 공간이 마련되자 조성환이 벌어진 구멍을 들여다보더니 간호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중략) 조성환은 으음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작은 동굴 안으로 보형물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동굴이라고 해 봤자 엄지손가락 하나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공간이었다. 그보다 몇 배는 돼 보이는 보형물이 순식간에 가슴 조직 안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곡선을 만들어 냈다. 조성환은 바로 봉합에 들어갔고, 민첩한 솜씨로 입을 벌리고 있던 동굴 입구를 닫아 버렸다.

다른 쪽 가슴에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술 전 그어 놓은 마킹 자국과 번진 핏자국, 방금 꿰맨 자국으로 너저분한 상태였지만 환자의 가슴은 사이즈와 형태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핀셋과 실을 간호사에게 넘긴 조성환이 한손으로 여자의 유두를 잡아 올리더니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순간 외설스러운 상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좋겠구나, 저 여자는. (맨 얼굴의 사랑 218~219페이지)

 

소설이니까, 실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수술실에 들어가 참관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작가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서술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에서는 가슴 성형 장면이 상당히 세세하게 묘사됐다. 가슴 수술을 정말 이렇게 하는 건가? (나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만, 정말 이럴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장면을 쓸 수 있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소설 속 이서경처럼 나도 묘사된 그 장면을 보고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장면이 생생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는 가슴 성형 부분을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를 참고했다고 한다. 궁금해서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까지 펼쳐보게 된 거다. 부제가 '성형 수술 세계로의 여행'이다. 성형수술이 궁금하다면 딱 펼쳐 봐도 좋을 거 아니겠나? 물론 나는 아직 그 성형 수술에 관심이 많거나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이 하늘을 찌르지는 않았으나, 이런 내용을 들을 기회가 흔하지는 않을 터이니 생각난 김에 읽어보고 싶었다. 정아은 작가가 소설에 인용한 부분은 『맞춤육체』의 초반부에 나온다. 그 부분을 보는 순간 궁금증은 더 커진 거고. 코는 어떻게 수술할까? 눈은? 지방 흡입은? 그 외에 여러 부위의 성형 수술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노엘 샤틀레는 몇 곳의 병원을 방문하면서 성형 수술 전과 후의 환자를 면담했다. 성형 수술 직전의 환자를 만나기도 하고, 수술 후 퇴원한 환자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오래전 성형 수술 경험을 한 환자도 만났다. 어쩌면 저자의 성형수술 관찰기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뻔한 느낌도 있었지만, 막상 읽어가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저자가 방문한 병원에서는 심리상담사가 있다는 거다. 의사와 면담하기 전 환자는 반드시 심리상담사를 거쳐야 한다. 물론 일반 병원에서도 진료 접수를 할 때 어디가 아파서 방문한 것인지 묻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성형외과의 심리상담사의 역할은 그보다 큰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심리상담사는 환자가 원하는 수술의 이유나 부위를 이야기하면서 조금 더 환자를 살펴본다. 수술의 이유에 더 집중하면서 보는 듯하다. 그러고 나서 의사와의 면담 시간이 정해진다. 정아은의 소설에서 이서경의 역할도 비슷했다. 그녀는 상담실장이라는 직함으로 환자를 상담한다. 그렇게 상담실장을 통한 1차 상담이 끝나고 각 수술 부위에 적합한 의사에게 2차로 상담받을 시간이 정해지는 거였다. 모든 성형외과가 이런 절차를 거친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아직 내가 성형외과에 방문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소설과 취재로 말하는 내용을 믿기로 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노엘 샤틀레가 방문한 병원의 '심리상담사들'에게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의사를 만나기 전의 환자를 면담하고,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한다. 의사는 진료할 때 그 상담 내용을 참고하고 환자를 관찰하는데, 환자가 바라는 성형이 의학적인 이유가 아닐 때, 지금의 상태도 충분한데 욕심껏 성형을 원할 때,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수술을 거절한다. 어느 정도 살펴보면 이 환자의 문제가 외모인지 정신적인 문제인지 보이는 거다. 그럴 때 다시 심리상담사에게 환자를 인계한다.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이유가 없는 환자들이기에.

 

처음 사례로 등장한 가슴 성형 환자의 이야기가 정아은의 소설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를 낳기 전의 자기 가슴을 그리워했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여자는 지금 이 수술을 해야만 했다. (사실, 남편과 같이 상담한 순간 더 알게 되는 이들 부부의 성격이나 사생활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수술을 했고,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가 자기 가슴 수술에 참관한 것을 알았던 여자는 저자에게 묻는다. 자기 가슴 수술이 어땠느냐고. 저자는 그 환자에게 수술은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보형물 외피에 연결된 호스를 빼낼 순간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물러섰다.

나는 C부인의 고통스런 외침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상처로 괴로워하는 짐승의 외침이었다. 호스가 보였다. 나는 그것이 가슴의 어느 부분에 뾰족한 낚시 바늘 같은 닻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무기력해져서 옆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바로 이것이 성형수술이다. 생생한 상처의 폭력에 복종해야 하는 육체. 바로 이 육체는 달라지려는 욕망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고 구원의 외침을 날카롭게 내지르는 것이다. (맞춤 육체 22~23페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부분이었다. 성형수술의 이유와 과정에서 육체의 고통이 빠질 수가 없는 거였다. 수술 후 육체가 마음에 드는, 완벽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가슴 수술을 한 C부인은 퇴원하고서도 고통을 겪었다. 최소 몇 달을 그런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 고통이 사라지고 보형물이 들어간 가슴을 더 만족하게 될 순간이 오겠지. 그녀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으리라.

 

첫 번째 절개가 이루어진 후 지방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 흡입 기구가 거칠게 왔다갔다하면서 일어나는 끔찍한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지방이 배의 내벽으로부터 붉게 물든 혼합물로 축출되는 것, 그리고 나서 호스를 따라 병에 담기는 것을 어떻게 흥분하지 않고 서술할 수 있을까?

저 물질들을 지방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생각하자. 영혼으로부터 뽑혀져 나오는 고통, 지방의 모습으로 저장 용기에 가득 채워짐으로써 마침내 사라질 고통.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맞춤육체 153페이지)

 

다양한 부위의 성형이 등장한다. 대머리, 주름 제거, 코, 가슴 등. 미용 성형인지 재건 성형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미용 성형에 관련된 부위였다. (화상으로 가슴 수술을 한 여자아이도 등장하는 걸 보면 성형이라는 분야를 거부감으로 채우는 게 다는 아니라는 것. 재건 성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듣게 되는 성형의 이유가 참 아팠다. 예쁜 몸을 더 예쁘게 하려는 목적만 등장했다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마다 각자의 히스토리가 있었다. 주름 제거 수술을 원하던 여자는 남편의 바람기와 그가 던진 살인 같은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너무 늙었어." 이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가 수술을 선택하게 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에게 너무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 두지 않음에 불안했다. 급기야 너무 늙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성형 수술이라는 방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기 몸의 주름이 사라지고 늙은 외모가 조금 더 젊어진다면 남편이 자기에게 다시 시선을 주지 않을까 바랐던 거다. 남편에게 집착하고 사랑에 갈구하던 여자의 선택은 성형이었다. 오직 한 가지. 자기 몸과 정신을 남편의 사랑으로 다시 채우고 싶어서.

아버지의 코와 닮았다는 남자는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고 싶어서 코 수술을 했다.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다. 23살부터 36살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10번의 수술을 했다. 그래서 10번의 수술로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혹시 또 한 번의 수술로 아버지의 기억과 완전한 이별을 이뤄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가슴 속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성형 수술. 그게 완전한 답이자 치료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밖에도 많은 성형 수술 환자의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드는 생각은 -저자도 같은 얘기를 했지만- 결핍과 사랑이 성형수술로 이끄는 부분이 많다. 물론 성형 수술 환자의 모두가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듣다 보면, 정말로 그 이유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 때문에 선택하는 성형. 사랑받기 위해서,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건 아니냐고... 수술의 남용과 방지를 위해서, 걱정 때문에 심리상담사가 존재하는 걸 보면, 환자의 불안과 결핍을 없애주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성형 수술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심리상담사일 거라고. 애슐리 몬테규의 『터칭』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촉각, 인간의 피부에 접촉되는 감각으로 존중과 배려, 아껴지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다는 말. 접촉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게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내가 그 책에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이다. 우리 몸을 덮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피부가 스킨십을 통해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외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감정들이 우리를 건강하고 사랑받게 한다는 느낌이다. 수술을 통해 외모의 변형이 사랑을 만들거나 완벽한 육체를 선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와 닮은 듯하다.

 

나는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고 결점을 고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육체를 내밀고, 의사가 그 피부라는 옷감에 실시하는 작업을 본 이후로, 정말로 우리가 외모에 관한 욕구의 한 단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속임은 더 이상 옷이나 화장, 액세서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눈속임은 이제 의복과 액세서리가 된 살 자체를 정복하고 있다. (맞춤육체 56페이지)

 

성형은 분명 삶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성형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막연한 거부감이 먼저 생기곤 했다. 여기를 좀 고쳤으면 더 예쁠 텐데, 더는 굶어도 빠지지 않는 뱃살의 지방을 좀 뽑을 수는 없을까, 눈이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어떻게 쌍꺼풀이라도, 안 그래도 작은 가슴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은데 내 가슴에도 보형물을?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가끔 보는 부작용의 모습들이 성형 후 나의 모습이 될까 봐 무서워서 감히 엄두를 못 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대로 사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대로 살아내 보자, 하는 긍정의 주문을 걸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완벽을 위한 욕망이 아닌 숨겨진 사연들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형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에게 그들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면 나도 성형외과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젊음에 대한 욕망을 꿈꾸다가도 세월의 흐름과 같이 가는 얼굴의 주름이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면서 한번 웃고 마는 결론에 이를 때가 더 많지만 말이지.

 

성형수술이 모든 사회 계층으로 확산될 거라는 예감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논리적이다. 즉 수십 년 전부터 이러한 의학적 발달의 혜택은 여성의 외모라는 문제에 집중되었지만 이제는 남자들과 학생들,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것 역시 달리 보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메스로 손쉽게 고칠 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평생 감수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시술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아름다움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일종의 끔찍한 면이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맞춤육체 211페이지)

 

저자의 취재로 듣는 성형에 관한 좀 더 깊고 넓은 이해. 무엇보다 성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술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성형외과는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성형이 인생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성형이 옳다 그르다 하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렇게 편 가르듯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오늘도 성형을 고민하는 사람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균형 감각의 유지를 말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우리 몸과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심리적 의미와 질문을 계속하면서 글을 맺었다. 수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며 선택의 책임을 묻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성형을 선택해야만 하는 고민도 언급한다. 성형과 관련한 업종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다면 잘 알지 못한, 성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시술 후 이야기를 같이 들려줌으로써 여러모로 문제를 인식하게 한다. 영원한 물음표로 계속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볍게 농담처럼 말했던 성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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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 먼저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근래에 접하기 어려웠던 성찰과 사색을 던져주는 글입니다. 정말 구단씨 님의 글 「육체를 맞춤할 수 있다면, 삶도 맞춘 것처럼 바뀔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 또한 요즘 성형에 관한 생각을 나름 깊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접점이 딱 맞아떨어지는 글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요. 정말 놀랍고도 흥미롭습니다. 윗글에서 구단씨 님의 성형에 관한 일종의 실존적 고민과 성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숨 막히듯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은 과장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구단씨 님 윗글을 읽으면서 분명 그런 느낌을 느꼈습니다. 성형 시술자(성형외과의사), 성형 심리상담사, 성형 당사자, 성형 관찰자들 각각의 시각으로 성형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 이면 혹은 속사정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형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 피상적 인식을 뚫고 들어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니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못했던 성형의 비밀과 사연과 고민을 귀 기울여 듣게 합니다. 나아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까지 이끄는군요. 우리 각자는 고유의 형태 혹은 형상을 지니고 있죠. 그것이 고유하다는 의미는 불변하는 정보로서 유전자에(DNA에) 각인돼 있다는 것이죠. 우리 몸의 형태는 동그라미(원), 세모, 네모 등등의 형태적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완성이 된다고 볼 수 있죠. 그 비율이 유전자에 들어 있는 정보일 텐데요. 그 정보 내용들이 개인마다 존재마다 다르다는 것이죠. 헌데 성형은 (즉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외과적 성형은) 그 정보 내용을 원천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대개의 경우 (특히 족보 등 뿌리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경우) 원본, 원형, 원천적인 것, 근원적인 것, 본질적인 것 따위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전자나 DNA에 내재된 원본·원형·본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성형이 외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의 발로인 것이라면 우리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성형은 외형적 가치 중시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위 구단씨 님의 글에서 이러한 점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봅니다. 성형이 불가피한 선택, 필수불가결한 처방(치료), 혹은 실존적 결단일 수도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니까요. 해서 저는 이런 상황을 꿈꿔봅니다. 내 정체성(identity) 혹은 인격 동일성, 존재적 고유성을 결정짓는 유전적 정보, 그 원천적 정보의 코드를 선택적으로 바꾸거나, 수정하거나, 교체하거나, 조정하는 그런 가능 세계를 꿈꿔봅니다. 요컨대 외형만을 바꾸는 불완전한 성형에서 원형을 바꾸는 근본적 성형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이건 헛된 욕망일 수 있죠. 너무나 공상적이거나 혹은 망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의 외과적 성형이 외형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런 공상/망상은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요? 외형을 바꾸기보다는 근원으로 돌아가 원형과 본질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을 저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이런 사유를 전개하다 보니 수많은 논제와 개념들이 빗발치듯 마음 속에 몰아치네요. 요즘 화젯거리인 인공지능(AI), 유발 하라리의 Data 개념, 일론 머스크의 AI 종말론, 레이 커즈와일의 2045년 특이점(singularity) 도래 예측, 사이보그(cyborg), 앤드로이드(android), 섹스 로봇(sex robots, sexbots) 등등과 관련지어 성형(plastic surgery) 개념에 대한 사유를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데요. 하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짓겠습니다. 막상 깊게 고민하던 문제가 눈앞에 딱 나타나면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지는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런 순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구단씨 님의 윗글은 너무나 깊은 사유의 글이고, 또 그런 깊은 사유로 이끄는 글인 듯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구단씨 님 덕분에 성형이란 논제 혹은 개념을 조금은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한 듯도 합니다.

2017-08-26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제베도 2017-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은 글 읽었습니다. 내가 참 무식하구나...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qualia님의 글도 좋구요.
아...난 무식해...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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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내 누나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다. 웃음이 저절로 나는 이야기에 '맞아 맞아' 하면서 무릎을 치면서 읽었더랬다. 역시, 공감의 아이콘이야 하면서 말이다. 남자 사람인 동생의 머릿속을 한번 파헤쳐보고 싶다, 혹은 여자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들려주고 싶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호감을 더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와무라 씨 시리즈도 즐겁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모와 미혼의 딸이 함께 사는 가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면서도, 공감을 잃지 않게 풀어가는 일상의 이야기 기대했다. 맞다. 사와무라 씨 댁의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우리네 가정의 모습과 똑같았다. 어머니 노리에 씨는 저녁 식사 걱정을 하고, 아버지 시로 씨는 퇴직 후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운동도 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산책도 하면서. 거기에 마흔의 미혼 딸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퇴근 후 동료들과 술도 한잔 하면서 일의 고됨을 토로하고, 이렇게 혼자인 삶을 이어가는 고충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살짝, 모든 것을 다 드러내기에는 불편한 마음을 감춘 채로. ^^ 이게 마스다 미리 만화의 매력인 것 같다. 솔직하고 적나라한 마음을 독자에게만 보이게 만들어놓는 일, 이야기 속 상대방에게는 아닌 척하면서 감추는 감정이 사실은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라는 걸 인정하는 일.

 

그래서일까. 이번 사와무라 씨네 이야기는 많이 씁쓸했다. 세 명의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일상을 보내는 시간 속에서 풍기는 느낌이 무거웠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안쓰러움과 애틋함은 묵직한 현실 그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느덧 죽음과 가까워진 시간을 살면서 시로 씨와 노리에 씨는 마지막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늙어가는 육체에 쓸쓸함을 느낀다. 히토미는 미용실 거울로 보는 자기 얼굴의 칙칙함에 멈칫했다가, 생기 있게 보이도록 앞머리를 가볍게 커트한다. ^^ 나를 보는 것 같다. 답답해서 앞머리 내리는 거 싫어하는데도 언젠가부터 앞머리를 내려서 자른다. 미용실에서 권해주기도 했지만, '음, 이렇게 하니까 조금은 어려 보이는 걸?' 하는 느낌을 받으니, 답답하고 귀찮아도 그 앞머리를 다시 올려서 기르지 못하겠다. 히토미와 노리에 씨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 누군가 자매 같다고 했다는 말을 들은 노리에 씨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지만, 기분이 좋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인다는 말이 노리에 씨의 얼굴에 웃음이 피게 한다. 때로는 매해 다르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즐거운 노리에 씨지만, 운동하면서 육체의 단련을 이어가는 시로 씨지만, 항상 자기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납골당 전단을 보면서 어떤 계산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히토미에게 집안의 통장이나 서류의 보관 위치를 설명하기도 한다. 부모가 부재했을 때 닥칠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것처럼. 그런 순간들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부모와 함께여서 뭉클한 시간이 더 큰 순간들을 전하는 사와무라 씨 가족이다.

 

얼핏 보면, 평균 연령 60세인 이 가족의 분위기가 칙칙할 것 같지만, 늙음과 죽음이 가까이에 있어 우중충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런 주제를 가볍고 즐겁게 이끌어가는 이 가족의 대화법에 빠져들고 싶어진다. 장례식의 음악은 좀 더 힘차고 밝은 것을 틀어야겠다고 말한다. 언제까지 돌봐줄 수 있을지 모르니 이제는 개도 키우기 어렵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표정이 가볍다. 시로 씨와 노리에 씨가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겪는 감정과 다르게 히토미는 늙어가는 것의 나쁘지 않음을 피력한다. 맛있는 케이크를 먹으면서 상대방과 나누지 않아도 되는, 그냥 자기가 먼저 맛있다는 걸 확인해도 되는 편안함을 느낀다. 예쁜 외모와 옷차림이 아니라 인성의 중요함을 배운 지금이 좋다는 걸 안다. 아픈 엄마를 간병하던 어느 날, 기억을 떠올려 보니 엄마가 자기에게 그대로 해주었던 과거의 시간을 기억해낸다.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감정들. 부모의 생활이 좀 더 편하게 배리어 프리 공사를 한다거나, 부모와 같이 TV를 보면서 양로원 같은 곳의 취재를 같이 보는 일이 힘들다거나, 노안이나 새치, 잔주름 걱정에 표정이 쳐지기도 하지만, 이 가족이 사는 법에 웃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게 좋아서, 고령화 가족인 이들에게 또 한 번 눈길이 머문다. 어떤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 지금 이후의 큰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 보통의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오늘의 행복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 이들이 사는 법이 아닐까.

 

히토미보다 사와무라 씨 부부의 활기찬 일상이 감사해서 닮고 싶다. 노리에 씨의 69번째 봄을 보면서 70번째 맞을 봄을 서글퍼하는 게 아니라, 오늘 69번째 봄의 설렘을 만끽하는 모습이 즐겁다. 젊었을 적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게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 먹은 대로 이어가고 피어나는 열정의 다양함과 모양이 이 가족의 활기에 근원인 듯하다. 처음 페이지를 펼치면서 어둡고 우울할 것 같은 느낌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은 모습에 나이 들어감과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마냥 슬프게만 바라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은 마음도 생겼다. 친가 쪽은 왕래가 없어서 잘 모르는데, 외가 쪽 이모들 집에는 40~50세 사이의 미혼 자녀가 있다. 다 딸이다. 엄마와 딸의 구성으로 사는 집들이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다. 예전에는 이모들이 모이면 혼자 남은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들려왔는데, 지금은 딸과 함께 보내는 일상의 소소함에 걱정을 밀어 넣는다. 어느 날 TV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엄마가 우울해하시기에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엄마 돌아가시면 아주 예쁜 유골함에 모셔드린다고. 거울 볼 때마다 눈가의 주름이나 자꾸만 생기는 주근깨가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런 이야기, 부모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게 좋을 때도 있더라. 물론, 고아가 된다는 건 여전히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으로 눈물이 흐를 테지만...

 

 

동봉된 투명 책갈피를 보면서 떠올려본다. 저기 나란히 있는 집 중 한 곳에 사와무라 씨 가족이 살고 있겠구나. 오늘도 노리에 씨는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할 것이고, 시로 씨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서성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구나. 히토미는 얼굴의 늙음을 걱정하면서도 퇴근길의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겠구나.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풍경에 잔잔한 행복이 깃든 집으로 들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골목에 있는 개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치바의 자리를 대신할 무언가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기대도 해보고. 서로에게 짐이 아닌 의지가 되는 이들 가족에게서, 점점 더 고령화되어 가는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대입한다. 누구네 집 한 곳의 이야기가 아님을 아니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알게 되는 것으로 남은 시간 이들이 더 행복해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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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시민들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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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열대야를 경험하는 요즘을 견디기가 힘들다. 밤의 더위로 잠을 자지 못해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너무 아파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한낮의 더위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밤에까지 그 열기를 남겨두는가 보다. 그럴 때에 만난 쿠바의 이야기가 반가울 리 없다. 온도를 더 높이는 것 같았다. 덥고 습한 쿠바의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져올 것만 같아서 무서울 정도였다. 아니, 읽기 전에는 그랬다. 한여름의 무더위에 이 책이 전하는 쿠바의 이야기가 끔찍한 온도를 더해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가 걸었던 쿠바의 도시, 아바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가온 것은 더위가 아니었다. 인간이 뿜어내는 열기였다. 소박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 속 뜨거운 온도였다.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아바나'가 낯설다. 쿠바? 아바나? 익숙하진 않아도 들어왔던 그곳, '하바나'였다. 사실은, '하바나'보다는 그냥 쿠바라는 나라가 조금 더 익숙하리라. 그랬다. 시가를 물고 뿌연 연기를 뿜어대던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 전부일 수도 있는 나라. 체 게바라나 헤밍웨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처럼 더 생각나는 게 있지만, 뭐로 보나 낯설다는 감각은 비슷하다. 선뜻 여행지로 선택되는 것도 드문 나라이지 않을까. 쿠바와 한국은 가까운 문화권도 아닌데, 그런 쿠바로 향한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곳을 걷던 작가의 시야에 잡힌 많은 사람, 많은 장소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작가 역시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이 되어 그곳을 보고 싶었나 보다.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에게 '당신'이라 부르며 그 발걸음을 뒤에서 보는 것처럼 말한다. 당신의 표정, 당신의 눈빛, 당신의 뒷모습까지 함께 보고 있으니, 그렇게 뒤따라가고 있으니, 어디 한번 가고 싶은 곳으로, 걷고 싶은 속도로, 마음껏 향해보시구려, 라고 말하는 듯이... 느리게, 천천히, 걷고, 바라본다. 그렇게 아바나의 여러 곳을 걸으며 발견한 유일한 것은 사람이다. 아바나의 시민들.

 

당신은 말한다. 아바나의 진정한 볼거리는 자연광관이나 유적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바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향해가는 시민들인데. (136페이지)

 

아바나의 많은 볼거리들은 관광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장소, 우연히 도달한 시간에 당신은 매번 다른 매력을 발견한다. (237페이지)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걸었다. 말레콘, 아바나 비에하, 베다도, 아바나만 건너, 커피톨리오 인근. 그 안에는 유명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도 있겠지만, 작가는 발걸음 닿는 그대로 걸었다. 때로는 길을 잃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 골목의 풍경이 그를 사로잡았다. 말레콘을 걷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낯빛을 바꾸는 바다를 보고, 방파제를 때려 부술 만큼 힘이 센 파도를 본다. 도로 건너편까지 흠뻑 적셔놓는 파도에 마음까지 젖는데도, 다시 찾는 곳이다. 열대성 폭우를 만나 몸이 젖기도 했다. 등에 멘 가방이 열려 카메라가 다 젖어가는 줄도 모르고, 비 내리는 거리 풍경을 찍으려 했을까? 그 때문에, 그 순간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채로 계속 걷게 될 줄 알았을까?

 

 

카메라를 다시 구하려 쿠바의 점포를 다녔지만, 없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대신하는 아바나의 풍경들. 카메라에 다 담지 못한 장면들은 기억에 의존하기로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기억에 담은 풍경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얼마만큼의 사진으로 다시 인화되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점점 보이는 게 있다. 카메라에 담기지 못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기억 속 아바나는, 에세이와 소설 사이를 오가며 다 담아내지 못한 사진은 이야기가 되어 펼쳐진다. 석 달 동안 아바나의 곳곳을 걸으며, 그곳의 태양을 맞는다. 산책하듯 나선 걸음에 아바나를 겪는다.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고, 뜨거운 햇볕이 살을 태우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한 매력이 잡아끄는 순간에 기꺼이 빠지고야 만다. 가이드북 없이, 계획이 없이 걷는 길은 그렇다.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마 그의 가방이 열리고 카메라가 젖어버린 것도 그래서겠지) 그렇게 마주한 곳에서 그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본다. 한국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그들에게서 발견한 자유로움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곳에서의 시간이 불편함을 준다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그것마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감각을 찾는다. 현실의 무게를 지울만한 무언가가 머릿속을 파고들어 올지도 모른다.

 

책의 앞부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궂은 날에도 변함없이 방파제로 나오는 낚시꾼 할아버지를 보며 작가는 궁금해한다.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 집은 있는지, 나이와 학벌, 딸린 식구는 있는지, 같은 궁금증에 그는 알게 된다. 아바나에 닿은 그가 아직도 한국식으로 궁금해한다는 것이 아직도 서울에 있는 것과 같다는 걸. 낚시꾼 할아버지에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식 가치관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로, 그곳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려 애쓴다. 그곳은, 한국식 셈이 끼어들 이유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 여행의 목적을 떠올리게 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려고, 어떤 정보를 찾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 같은.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다. 여기를 떠나 각자가 정한 그곳을 향해 가는 이유는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일의 연장선이 아니라면, 여행은 오직 그곳에서의 시간과 삶으로 채우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싶다.

 

하나의 장소는 여러 시간대를 통해 여전히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르마스 광장의 성당은 어느 때는 합창단을, 어느 때는 댄싱팀을, 어느 때는 오케스트라를, 어느 때는 단정하고 꾸밈없는 예배 광경을 제공한다. 당신이 장소들을 남김없이 소비했다고 해서, 아바나를 다 본 것은 아니다. (163페이지)

 

 

밴드가 선 자리가 곧 무대이고 태양은 조명이 되는 곳, 전문 댄서가 없으면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막 식사를 끝낸 연인이 나와 춤을 추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곳, 거리의 악사가 부는 색소폰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는, 이방인의 카메라에 웃음을 보내는 자연스러움, 올드카의 소음에도 즐거워지는. 아바나는 그런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중남미에 속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쿠바의 배경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오직 그곳의 사람들만 보게 된다. 그들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그들이 보는 세상을 사는 법에 한 번쯤은 매료될 것 같다. 그 어떤 자격 조건 없이 스텝을 밟는 거리의 춤꾼들에게서, 뭔가를 잃어버린 채로 떠나온 한국의 시간을 읽는다.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어떤 것을... 한국에서의 속도는 잊고 아바나의 시민들이 걷는 속도를 그대로 보게 하는 순간이다.

 

아직 그 장소에 있는 듯이 아바나의 태양이 느껴진다. 태양을 찍지 않았어도 모든 사진에 태양이 있다. 낮이 지고 밤이 찾아와도 태양은 열기로 남아 있다. 낮의 눈부심도 잔상처럼 한밤까지 머물러 있다. 열기와 눈부심, 태양 아래 아바나는 모든 것이 뜨겁고 눈부시다. (303페이지)

 

미사여구가 가득한 문장이 없어도 글에서 보이는 표정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글이다. 뭔가 더해진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장면 그대로를 서술한 느낌. 문을 열고 내다보는 모든 게 피사체가 되는 것이 그곳에 있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즐거움을 뿜어내는 그곳 사람들의 표정에, 누군가는 이미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변화, 기존의 사고를 벗어나 오롯이 여행지에서의 삶을 보게 하는, 여행의 의미와 만족감을 동시에 전해줄 곳이기에... 나를 감싸 안은 영혼의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는 그곳, 아바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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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완전판.

개정판이 나왔다.

전에는 절판이어서 구매하려고 중고 찾아보니 가격이 후덜덜...

이상하게도, 절판이라니까 더 궁금해서 찾아보고 싶었는데 개정판 소식이 반갑다.

 

 

 

 

 

 

 

터칭. 피부로 느끼는 감각, 언어. 이 책도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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