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시댁을 본 적이 있다(사실 너무 많이 봤지만...)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무임금 노예 한 명 들인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혹은 시댁의 많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아니,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런 짓(?) 못 하는 건데,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지 모르겠는 상황들. 하아...

 

미혼인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서 좋아하면 되고, 혹시 헤어지지 않는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라고만 생각했던 어린 나이를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인다. 나의 자매들, 친구들, 지인들의 평균 결혼생활은 15년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직접 보게 되는 상황들도 있고, 속상하다면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TV 일일 드라마의 막장 스토리가 단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며느리를 내 아들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시댁 사람들을 보면, 그럴 거면 죽을 때까지 아들 끼고 살지 왜 결혼하게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신수지의 <며느라기>를 보면서도 한숨만 푹푹 나왔다. 며느라기. '시댁 식구에게 예쁨 받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 그런 단어가 있고 정의가 있는 건지, 이 웹툰에서 만든 신조어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 시기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공감이 먼저 다가오니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다들 그런 시기를 겪었다는 것만 알겠더라.

 

주인공 민사린은 동갑내기 무구영과 결혼했다. 이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겠지.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눈 뜨는 아침이 행복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아내이자 며느리가 된 그녀가 해야 할 역할도 같이 추가된 거다. 잘하고 싶었다.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리하게 잘하려 애쓴다. 시간이 안 되는데도 회사 일에 지장을 주면서 시댁 일을 챙기고, 시어머니의 첫 생일 아침상을 차려주겠다고 전날부터 시댁으로 향한다. 시누이는 미리 전화해서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스타일도 말해주고 말이다. 어쨌든, 시작은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기는 하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잘하고 싶은 마음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쌍방인가 아닌가 하는 거다.

 

미묘하게 던지는 말에 담긴 감정들이 가슴에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까? 웃긴 건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며느리였다는 거다. 웹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감춰진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공감과 동지애를 느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았다. 아직은 며느리인 사린에게만 감정 이입이 되는가 보다. 한편으로는 같은 여자인 입장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모습까지 보니까, 이건 '며느라기'의 시기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여자가 겪는 문제까지 아우르는 것 같다. 명절 끝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의 아내를 배려하지 않고, '간단하게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시아버지의 말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 '간단한 밥상'을 당신이 한번 차려보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 책 읽다가 TV 파일럿 프로그램인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하아,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와서 죽을 뻔했다. 일인다역을 하는 며느리에게 왜 빨리 식당으로 출근하지 않으냐며 전화로 닦달하는 시어머니, 아이가 방바닥에 엎지른 것을 보면서도 느긋하게 다가오는 남편, 결혼 후 처음 시댁 방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며느리, 그런 아내를 방치(?)하고 거실에서 시댁 어른들과 다과 하며 앉아있는 남편, 명절에 만삭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향하는 며느리, 마치 며느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용량의 명절 음식 준비물을 내놓는 시어머니, 주방에서 두 여자가 열심히 차례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도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는 시아버지, 명절 전날부터 몰려오는 시댁 식구들, 차례 지내고도 바로 친정에 가지 못하는 며느리, 며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굳이 손주 아이큐 운운하며 자연분만을 언급하는 시아버지... 말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눈물과 어이없음으로 공감하면서도 보던 이 프로그램에서 그나마 건진 건, 남자 MC의 한마디였다. 평소에는 그 안에 섞여 있느라 몰랐는데, 명절의 모습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고 있으니까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정말 미묘하다. 말 한마디가 건네져 오는데 그 미묘함 때문에 감정이 상한다. 이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아들과 다르게 대한다. 분명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아프게 한다. 남자와 여자, 시댁과 친정,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구분해서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편하다고 아내도 편할 거로 생각하는 착각, 내 아들 좋아하는 것을 차려놓고 며느리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하는 일... 웹툰 <며느라기>에서 나오는 사린의 동서가 차라리 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싫고 좋고 분명히 표현하는 일이 자기 안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정이 없다고, 냉정하다고, 며느리인데 왜 안 하느냐고 욕먹기도 하겠지만, '걔는 원래 그래' 하는 인식이 장착되니 더는 그 며느리에게 뭔가 요구하거나 희생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린의 동서 같은 며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며느라기>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면 공통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남편의 역할. 시댁과 아내의 중간에서 남편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보인다. 내 아내가 시댁에서 어떻게 지낼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남편에게는 '자기 집'이었겠지만, 아내에게는 쉽게 다리도 뻗을 수 없는 '아직은 남의 집'일 거라는 것을. 악의가 없다고 하지만 시댁 사람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집안 일들에 여성들은 힘들어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먹자'는 상차림의 준비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한다. 어른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면 그만하시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의 상황들을 가만히 참고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마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 같다. 요즘 많이 하는 연습이 거절하는 거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끙끙 가슴앓이하면서 위경련을 앓는 것보다 한번 싫다고 말하고 상대에게 나쁜 사람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며느라기'의 시기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새로운 가족과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만 내 손을 내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에는 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그 거리를 너무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부작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 거리를 너무 멀리하려고 해도 서운해지는 일이 생기겠지만...) 사린이, 대한민국의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칭찬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정도만 하면 된다. 때로는 싫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절이, 서로가 잘 지낼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웹툰이 계속 연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남편들, 남자들이 같이 봐주었으면 더 좋겠다. 내 아내가, 내 어머니가 어떤 일상과 시댁이라는 관계 속에서 있는지 보면서 이해와 공감의 시선을 보내주기를. 일방적으로 여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결정으로 만난 인연들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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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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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평균 결혼생활이 15년 이상이다 보니, 아직 미혼이면서도 200% 공감되는 책이다. 마치 내가 사린이 된 것만 같았다. 며느리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그 ‘며느라기‘라는 시기를 나는 겪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가 먼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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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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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책의 느낌을 읽은 그대로의 느낌대로 표현한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공감한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것 같고, 이해한다는 말도 거짓말 같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나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나 역시 남의 일로 치부하며 지나갔을, 혹여 내 자식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 하는 방관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말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아왔을 고통의 시간을 이렇게라도 듣게 된 건, 이제는 방관자(방관자 역시 가해자일지도 모를)로만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적극성을 가지게 된 계기로 남을 듯하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고하는 린이한의 유서였다.

 

빨간 글씨 : 왜 할 줄 모른다고 했을까? 왜 싫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안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야 이 모든 일이 그 첫 순간에 결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억지로 욱여넣은 건 그인데 내가 죄송하다고 말한 그 순간에. (43~44페이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친해지고, 영혼의 단짝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두 아이, 팡쓰치와 류이팅.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시간으로 쌓은 게 있다. '나'와 '너'를 동일시해도 괜찮을 만큼 하나의 존재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이 둘의 관계나 마음이 여린 시절 뭘 모르고 가지는 절친의 과장된 의미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이 아이들의 관계 이상의 성장 모습이 보이면서 더 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낯선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이팅은 쓰치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쓰치의 이야기가 비밀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쓰치의 일기장으로 드러나면서, 이팅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생각한다.

 

이 소설은 쓰치의 이야기지만 이팅의 시선으로 읽어가게 되러데, 그게 독자의 시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하다. 쓰치의 일기를 발견한 이팅이 쓰치가 겪은 지난 5년의 세월을 재구성한다. 문학을 배우겠다며 찾아간 리궈화의 집. 쓰치와 이팅은 오직 여학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문학 강사 리궈화를 믿고 학업을 목적으로 찾아간 곳에서 쓰치는 되돌릴 수 없는 성폭력의 시작을 경험한다. 리궈화는 처음부터 쓰치를 강간할 목적으로 손을 내민 거였다. 선생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어린 소녀들의 순진한 마음을 세뇌하듯 문학의 문장들로 사랑을 착각하게 하는 위선자였다. 리궈화가 쓰치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면서 길들이는 동안, 쓰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선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을 사랑하면서 이 모든 행위가 사랑이라고 여겨야만 했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관계의 비정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리궈화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쓰치 자신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 (중략) 넌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널 좋아해. 우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어. 이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중략) 넌 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니? 너무 많이 와버렸다고 나를 나무라도 좋아. 하지만 내 사랑을 원망할 수 있어? 너 자신의 아름다움을 원망할 수 있어? 게다가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이잖아. 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의 날 선물이야." (90~91페이지)

 

미처 몰랐던 마음을 이제야 듣는 기분에 답답했다. 뭔가 잔뜩 오해해서 서먹해지고 더없이 친했던 사이가 낯설어지는 느낌이 드는 채로 멀어지는 관계가 되는 듯했는데,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일. 쓰치가 겪은 일을 그렇게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내가 다 들어주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스러운 마음. 그건 이원 언니가 느끼는 마음과 닮기도 했다. 쓰치의 전화가 그냥 안부 전화만은 아닐 터였는데, 쓰치가 망설이면서도 결국 꺼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좀 더 파헤쳐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해진다.

 

그 후 20여 년 동안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았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123페이지)

 

이런 일들은 왜 가능한 것일까.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유교적 환경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점점 더 개인주의로 변하는 세상도 한몫하는 듯하다. 게다가 입시 위주의 교육이 치열한 학습의 장으로 만들면서 리궈화 같이 선생이라는 이름의 대상에게 내 딸을 믿고 맡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도 했을 테지. 리권화에게 여학생을 조달하던 그 관리자 역시 여자였는데, 나와 직접 관계없는, 나에게 피해가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특히 이런 폭력은 쓰치의 이웃 첸이웨이와 결혼한 이원에게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이원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한여름에도 목이 올라오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생활한다. 쓰치와 이원은 서로의 상황을 알아보지만 직접 얘기해본 적은 없다. 쓰치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면서도 캐묻지 못하는 이원, 이원이 맞고 사는 걸 알면서도 묻지 못하고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던 쓰치. 무엇보다 궁금한 건 쓰치의 부모가 왜 나서지 못했나 하는 거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딸에게 왜 성교육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차단했으며, 딸의 변화와 심리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은 학교로의 진학, 우등생, 학업이 최우선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겠지.

 

사실을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며, 사랑도 아니며,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팅이 처음 쓰치와 리궈화의 만남을 듣고 불륜이라고 여기면서 더는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열세 살의 어린여자 아이가 무엇이든 터놓고 말할 유일한 상대라고 여긴 절친에게 들은 말은, 더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거로 믿은 대상에게 들려온 말이 부정의 대답이었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내 딸에게 성교육이 웬 말이냐고 여기는 쓰치의 엄마 역시 쓰치가 인생을 의논할 대상은 되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쓰치는 자기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 폭행의 대상을 사랑으로 만드는 거였다. 리궈화와의 시간이, 쓰치가 성폭행을 당하던 상황을 낙원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낙원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쓰치에게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으리라.

 

월요일에는 이름이 '희(喜)'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려가고 화요일에는 이름이 '만(滿)'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수요일에는 '금(金)'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희, 만, 금 모두 길한 글자였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녀를 송두리째 사로잡을 수 있었다. 문학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197~198페이지)

 

문학의 생명력은 가장 참담한 상황에서도 언어로 유머를 캐내는 데 있다. 그건 남들에게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혼자 느끼는 즐거움이다. 문학은 쉰 살 아내와 열다섯 살 연인에게 똑같은 사랑시를 읊어줄 수 있는 것이다. (289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쓰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해준 것도 문학이고, 쓰치에게 고통을 덜어주던 것도 문학이다. 이원 언니와 같이 문학 작품들을 접하면서 문학의 즐거움이나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배우는 게 성장하는 모습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삶의 아이러니나 지혜 같은 것들. 아마 지금 문학을 읽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문학을 먹이로 리궈화는 손을 뻗었다. 이 어린 소녀에게 달콤한 쿠키를 입에 물려주듯이, 문학으로 미끼를 던지고 문학 작품 속 문장들로 그의 폭력을 사랑이라고 감싸며 들려주었다. 이원 언니 역시 문학 작품을 꾸준히 접했지만, 그 문학이 그녀의 인생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문학 작품은 그녀 옆에서 그냥 존재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쓰치와 이원에게 문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리궈화의 입에서 나오는 포장된 문장들로 쓰치는 무너져갔지만, 한편으로 쓰치는 문학으로 그 위기를 간신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록. 쓰치는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리궈화의 폭력을 기록했으며 그녀가 겪는 마음을 적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의 양면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여성들이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경험. 말하기 어려워서 더 쌓이는 비극들. 그 마음들이 문학으로 드러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 세상에 문학이 있어서 다행이다. 쓰치에게는 그 문학이 달콤한 사탕발림이 되어 판단 오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저자에게 문학은 세상의 폭력을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독자에게는 여성들이 겪는 비극을 마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여전히 강단에 서 있는 리궈화 같은 사람에게, 형태가 없는 사회가 하나가 되어 협조하는 가해를 마주함으로써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일을 남겼다. 편 가르기가 아니라, 어느 편에 서는 게 정의를 찾는 방법인지 계속 묻게 할 작품이다. 그 질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잠재적 쓰치, 이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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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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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끝이 있다. 그게 사랑이라도 말이다. 사랑의 끝에 이별이 있거나, 사랑으로 함께하는 시간 계속되어 영원한 헤어짐으로 끝이 나거나. 사랑의 끝이 힘든 것은 전자이리라. 그것도 헤어짐을 통보 받은 처지에서는 더더욱. 내가 하는 사랑은 최선을 다했어도 이런 결말일 수밖에 없는 건가 하면서, 이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거나. 무엇보다 이별이 이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것. 인생의 커다란 한 부분을 실패한 것만 같고, 무엇을 해도 안 될 것 같은 좌절감에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의 절망만을 보는 상태로 계속되기도 하는 일이 무서운 거다. 이별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포기해도 좋은, 나 자신의 행복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냥, 또 한 번의 사랑이 끝났을 뿐이다.

 

 

남남으로 돌아가는 게 이별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과거의 자신과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습니다. (57페이지)

 

이별은 일방적이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만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남아 있는 정을 싹둑 잘라버리고 비정해질 것. 그게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19페이지)

 

사랑이 끝나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의 위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같은 따뜻한 말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금의 이별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말들. 정말 주문처럼 다 잘 될 거라고 믿게 되는 말들. 그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별 후에 정작 필요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이별 후 정말 들어야 할 말은 냉정하고 따끔한 말들, 착각 속에 허우적대다가 시간 낭비하지 못하게 현재의 모습을 보게 하는 말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게 하는 말들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저자는 이별 후의 다양한 사례들을 들려주면서, 더욱 정확하고 분명한 말로 위로를 전한다.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면서 희망 고문에 시달리는 일, 상대가 건넨 달콤한 이별의 말에 또다시 허무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일, 전 애인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을 그만두어야 함을 경고한다. 동시에 이별의 후유증으로 다음 연애가 두려워 연애 세포를 죽이는 사람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일상의 곳곳에서 전 애인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울고 싶은데 참지 말라고, 좀 외로우면 어떠냐고,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연애에 그만 끌려다니고 이별을 선택한 건 아주 많이 잘한 일이라고. 당신은 너무 강한 사람이기에 이 모든 일을 건너왔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이별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더욱 현명하게 이별을 대했다면, 우리는 이별을 인생에서 통과하는 하나의 문으로만 여겨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일어나는 판단과 감정을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경험했겠지만(곧 경험하겠지만) 사랑을 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이별은 찾아온다. 그때마다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사랑으로 인한 불행과 이별을 반복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끝난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건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설픈 배려의 말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상대의 표정에서 읽히는 무관심을 못 본 척하고, 이미 변해버린 사람을 붙잡고 있으려고 애쓰며, 아직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들을 놓기 싫어서. 의미 없는 희망 고문은 상대가 쳐놓은 그물일 때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만들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매번 자기 자신을 볼 타이밍을 놓친다. 끝난 마음에 미련 두지 않고 이별을 인정해야만 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상대를 사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시간을 이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걸 저자의 따끔한 충고로 알게 된다.

 

아무리 듣기 좋게 늘어놓은들 밑바탕에 깔려 있는 뜻은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입니다. 그럴듯한 포자에 마음을 뺏겨 진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 돼요.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이별을 택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별이란 가슴 시릴 정도로 냉정한 거예요. 이별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마음껏 우세요. 그래도 돼요. (73페이지)

 

이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별을 감당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 슬픔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판단 오류였던 듯하다.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간 시간과 나의 감정들을 되돌려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그런 시간이 가져야만 이별은 깔끔하게 소화되고,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주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만든다. 그 시작이 또 다른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뻔한 이별의 위로, 흔한 사랑에 관한 조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주제의 글을 처음 접한 것도 아니었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랑에 관한 많은 지침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문장 곳곳에서 발견하는 이성적인 한 마디가 마음에 들어온다. 따끔하게 가슴을 찌르기도 하고, 후회했던 순간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에 비슷한 경험을 기억해내면서, 그때 미처 대처하지 못한 바보 같은 모습을 저장했다. 온갖 이유로 꺼냈던 말들, 들었던 말들이 결국은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하나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지지부진 끌고 가려고 애썼던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품게 한다. 나는, 우리는 행복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물린 말이지만,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아닌 이별하는 법입니다. 이별을 통해 살아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을 제대로 한 사람은 같은 눈물을 두 번 흘리지 않아요. 한번 이별을 결심했다면 확실히 혼자로 돌아오세요. (205페이지)

 

그러니까, 제목 그대로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사랑할 때의 나보다 (때로는 불안하게 보이는) 사랑이 끝난 후의 내가 더 성장해 있는, 사랑을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사랑을 똑바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이별 역시 현명하게 배우고 감당할 수 있다. 나답게 살아가는 법, 슬퍼할 가치도 없는 일에 혼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서툴렀던 사랑과 이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누군가 이별을 하고 있다면, 사랑이 힘들어서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시작할 사랑에 두려워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펼쳐 봐도 좋겠다. 사랑과 이별을 넘어서서, 인생 사는 법을 한 수 배우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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