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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소설이되 소설 같지 않고,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마냥 무겁지 않음이 이 소설의 매력인 듯하다. 물론 나 같은 역사 문외한이 함부로 덤비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소설이기도 하다. 활자를 따라가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허둥대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행동에서 한 시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인가? 아닌가? 사실 속에 집어넣은 소설적 설정은 늘 작가의 추측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소설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럴수록 제목 때문에 가졌던 호기심은, 어느새 아픈 역사의 이면에 빠지면서 누군가의 최후를 보게 한다. 당연한 죽음인가?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 게? 개운하다거나 당연한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모든 일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게 모든 세계, 오늘의 대한민국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며 읽게 된다.
HHh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라고 한다. 독일이 체코를 합병한 1938년. 히틀러는 독일 제3제국 보호령 체코 총독으로 SS(나치스 친위대)의 2인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임명한다. 보통은 히틀러를 더 기억하곤 하지만, 실제 유대인 대학살 정책의 주인공은 금발의 짐승이자 독일 제3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 불리던 하이드리히다. 그의 별명만 봐도 위험과 잔인함이 감지된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 시대를 주무르고 있었는지 눈에 훤히 보일 지경이다. 하이드리히가 나치의 많은 비밀공작과 정보 정책을 주도한 뇌였던 거다. 언제까지 그럴 수 없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체코 망명정부 베네시 대통령과 영국은 가브치크, 쿠비시를 포함한 낙하산병을 침투시켜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유인원 작전)을 실행하지만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암살시도는 곧 하이드리히의 사망으로 연결된다. 그때의 부상으로 그가 죽게 되니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안타까워, 잠시 이게 허구로 가득한 소설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밀고자의 제보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내고 유인원 작전의 완벽함을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이 소설은 하이드리히의 사망을 보게 하는 여정을 참 느리고, 차분하게 서술한다. 제목만 보면 하이드리히가 이 소설의 주인공 같지만, 오히려 유인원 작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길게 보여준다. 상당히 아프고 잔인함이 넘치던 시절이었지만, 소설은 그 시절의 모습을 오히려 담담하게 읽게 한다. 전쟁이나 싸움을 동적으로 보게 하는 것보다, 어떤 술수나 계획, 어느 단계에 이르기 위한 그들의 움직임을 그린다. 의외였던 것은,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처럼 보였지만 실제 소설의 흐름은 유인원 작전을 배경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체코에 잠입하여 그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청년들의 노력과 안타까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작가는 그 시대의 시간을 사실로 서술하되 자기의 생각 또한 담는다. 그때마다 이게 소설인가 실제인가 헷갈릴 수 있음을 방지하며 자기의 추측이라는 말을 항상 덧붙인다. 사실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마음과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상상하며 같이 읽고 싶은 마음을 저저는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토대 소설이라고 해서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막상 읽고 보니, 때로는 역사적 사실을 소설과 허구의 중간쯤에서 읽게 되는 흥미로움보다, 이 소설처럼 소설이지만 사실의 대부분을 그대로 읽게 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으면 하고 바라게 한다. 실재 인물과 사건, 오디오와 속기 자료를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하기에 더 사실에 다가간 기분이 들어서다. 이건 사실이구나 하는 판단으로 읽게 하면서, 혹시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저자는 자기 말을 덧붙이면서 공감을 구한다. '혹시 이러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같이 해보자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화되어 2017년 개봉이라니 영화까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새롭게 읽는 역사 소설이어서 그런지 분위기도 신선하고,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만나는 이런 느낌 괜찮더라. 묻히지 말고 드러나야 할 것들을 다시 접하는 자세도 경건해진다. '대량 학살을 무슨 과제 처리하듯 물건 정리하듯 저렇게 할 수 있나?' 묻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구나 하는 하이드리히의 생각과 기획에 치를 떨면서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이드리히 같은 인물이 그 시대에 다 죽은 건 아니니까, 여전히 우리 삶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의 토대소설이라는 시도가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알아야 할 것들, 확인하고 지켜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물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